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95
595
“받으시오.”
“잘 마시겠습니다.”
샴페인 잔을 살짝 부딪친 혁권은 한 모금만 마시고는 옆에 놓인 탁자에 내려놨다.
“그동안 존슨 씨의 활약은 가끔씩 이야기를 전해 들었소. 그쪽 세계에서 상당한 거물이 됐더이다.”
“아직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겸손한 대답에 만수르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존슨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소. 내 앞에서도 당당하던 모습과 강인한 눈동자는 지금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줬었소.”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인지 아니면 그냥 던지는 말인지 몰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그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요즘 중동 지역 정세가 많이 불안한 건 존슨 씨도 잘 알고 있을 거요. 그중에서 우리 아랍에미리트 정부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예멘 내전이오.”
3년 전 반군이 대통령궁을 공격해 장악하고 하디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면서 시작된 것이 예멘 내전이었다.
후티 반군과 망명한 하디 대통령을 지지하는 아랍 동맹군 그리고 알카에다 세력 등이 뒤섞이면서 오랫동안 내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아파 맹주인 이란이 이라크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나날이 영향력을 넓혀 가는 상황에서 등 뒤에 또 다른 시아파 국가가 탄생하는 건 우리 정부와 왕실 입장에서는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오.”
종파가 다를 뿐만 아니라 신정일치 국가인 이란은 왕실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아직 국왕이 국가를 통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같은 여러 아랍 국가들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주요 원유 수출로 중에 하나인 홍해로 들어가는 밥 엘만뎁 해협을 옆에 끼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더욱 예멘이 이란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는 걸 그냥 놔두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 존슨 씨가 우릴 좀 도와줬으면 좋겠소.”
“도움이라니, 회장님도 애를 먹는 일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라오.”
만수르는 잡지 광고 모델처럼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힘이 될 거라고 믿소.”
“제가 뭘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고 판단하겠다는 듯 신중한 태도를 보이자 만수르는 그것도 당연하다는 듯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미 아랍 동맹군이 예멘에 15만이나 되는 병력과 각종 중화기를 투입했지만 부끄럽게도 그다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중이오. 아니, 오히려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후티 반군이 예멘 정부군의 임시 수도인 아덴Aden까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오.”
처음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주도로 아랍 동맹군이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병력은 물론이고 최신 무기로 무장한 동맹군이 빈약한 전력의 후티 반군을 단숨에 제압할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자 결과가 정반대로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수천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건 물론이고 각종 항공기와 전차를 잃고 사우디아라비아는 군함까지 피격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어쩌면 애초에 예정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동맹군에 가담한 국가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데다 지상전보다는 공중 폭격에 더 치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이란이 후티 반군에 100여 발이 넘는 각종 탄도미사일을 넘겨주는 바람에 여간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요.”
“얼마 전에 살만 사우디 국왕이 거주하는 야마마 왕궁을 향해 후티 반군이 탄도미사일을 쐈다는 뉴스는 저도 들었습니다.”
“메카와 리야드뿐만 아니라 아부다비Abu Dhabi를 향한 공격도 있었소.”
아부다비는 아랍에미리트의 수도로 아부다비 토호국 왕실 일원인 만수르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어느새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만수리는 후티 반군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다행히 모두 다 요격에 성공해 사막으로 추락했지만 만에 하나 탄도탄이 시가지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오. 그래서 왕실에서는 후티 반군을 몰아내고 예멘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내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했소.”
이제부터 나오는 것이 진짜였기에 혁권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후티 반군에 대항하는 남부평의회에 필요한 군수품과 물자 지원을 해 줄 계획인데 그걸 존슨 씨가 맡아 주시오.”
“……!”
엄연히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은 하디 대통령의 정부가 있는데, 제3 세력인 남부평의회를 지원해 준다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같은 수니파라고 하지만 남부평의회는 하디 정부를 부정하고 분리 독립을 원하는 또 다른 반군 세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장인 에다루스 알 주바이디 남부 평의회 의장이 원래 아덴 지방 주지사였다가 하디 대통령한테 해임된 인물이라는 것만 봐도 양측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른 혁권은 후티 반군 토벌은 핑계에 불과하고 만수르, 아니 아랍에미리트의 진짜 속셈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남부평의회를 통해서 요충지인 예멘을 장악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전력이 약한 남부평의회에 직접 병력을 보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으니까 의용군도 함께 모집해 줬으면 좋겠소.”
“지금 의용군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오랜 내전에 고통받고 있는 예멘 국민들을 구하고 평화를 되찾는 데 앞장설 병사들이 필요하오. 필요한 돈은 내가 지원해 주겠소.”
이야기를 듣자마자 혁권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했지만 결국 용병을 예멘 내전에 투입하겠다는 거였다.
원유와 천연 가스 덕분에 막대한 부富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겨우 600만 명 남짓한 인구를 보유한 아랍에미리트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저보다는 민간군사기업Private Military Company에 의뢰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만수르가 두툼한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물자 등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자드란이 재빨리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만수르는 하얀 시가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간군사기업을 이용하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돈에 좌지우지되는 자들은 믿을 수가 없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전투에 내세운다면 자칫 외부 세력을 내전에 끌어들이는 걸로 후티 반군한테 명분을 빼앗길 수도 있어서 안 되오.”
“돈을 받고 움직이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렇지만 당신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요.”
“제가 만약 회장님을 배신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자 만수르가 눈가를 살짝 접으면서 답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니 실수의 대가는 감내해야겠지. 하지만 존슨 씨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거요.”
희미하게 웃는 것 같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 예리한 기운을 띠었다.
꿰뚫는 듯한 만수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대한 혁권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어느새 다시 미소를 지은 채 상대가 이야기를 이었다.
“남부 평의회에 지원할 물자 액수가 대략 5억 달러이고 의용군 모집에는 3억 달러를 주겠소.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잠시 침묵하던 혁권은 이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 솔직히 당황스럽군요.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만수르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하지만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니 가능하면 내일 이 시간까지 대답을 해 주시오.”
“그러지요.”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싱가포르 시내로 돌아온 혁권은 일행과 함께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객실에 도착하자마자 아테네에 있는 자말과 함단을 인터넷 영상 통화로 연결해서 만수르의 제안을 이야기해 줬다.
-인구수가 적어 직접 개입이 부담스러운 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용병 부대를 만드는 건 의외군요. 아무래도 프랑스의 외인부대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던 혁권은 자말의 말에 살짝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외인부대보다는 만수르, 아니 아부다비 왕실이 넘쳐흐르는 오일머니로 대신 피를 흘려 줄 민간군사기업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을 거야. 틀린 점은 오직 아부다비 왕실의 의뢰만 받는다는 정도랄까.”
-겉은 의용군이라고 하지만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고, 아부다비 왕실은 물론이고 아랍에미리트 정부와의 관련성을 일체 부인할 테니 그 말씀도 맞군요.
자말과 함께 있던 함단이 표정을 굳힌 채 말을 받았다.
-책임은 피하면서 언제든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무력을 쓸 수 있는 별도의 군사 조직을 만들겠다니, 야비하지만 정말 기막힌 방법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랍에미리트 정부가 의도하는 대로 예멘 내전에 제3 세력이 공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면 전비戰費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며 하디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만 뒤통수를 얻어맞는 꼴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상황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예멘 내전에 개입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자초한 일이라고 봐야지.”
수궁하듯 자말과 함단이 머리를 끄덕였다.
-만수르 회장이 정확하게 보스한테 원하는 것이 뭡니까?
“남부평의회에 무기와 물자를 공급하는 건 미끼일 테고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용병들을 조직해 달라는 거지.”
잠시 생각을 하던 자말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혔다.
-그런 거라면 저희가 직접 예멘 내전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니까 전 나쁘지 않은 제안 같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이걸로 만수르 회장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남부평의회에 물자를 계속 공급할 수 있게 된다면 상당한 이득일 겁니다.
당장 만수르가 약속한 액수만 해도 8억 달러에 달했고 여러 세력이 복잡하게 뒤엉킨 예멘 내전이 쉽사리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감안한다면, 지속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물인 만수르 회장과 친분 관계를 만들어 놓는 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자산이었다.
“좋아. 그럼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하지.”
결정을 내린 혁권이 차분하게 말했다.
“만수르 회장을 만족시키려면 꽤 많은 숫자의 용병을 그것도 가급적 이슬람교도들로 구해야 되는데, 가능하겠어?”
그러자 자말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장 북아프리카에 있는 이슬람교 국가들만 뒤져도, 돈만 확실히 준다면 용병으로 일하겠다는 자들이 차고 넘칠 겁니다.
-용병들이 제 역할을 하려면 훈련 캠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함단이 슬쩍 끼어들며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손발을 맞춰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최소한의 훈련은 시켜야 되겠지.”
-그럼 훈련 캠프를 시에라리온에 위치한 보크사이트 광산에 차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뜻밖의 제안에 혁권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긴 시설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잖아.”
-그러니까 더 마음껏 훈련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오래 머물 것이 아니니 임시 가건물이나 천막 정도면 될 것이고, 무엇보다 대규모로 용병들이 가 있으면 주변에 있는 무장 세력들이 광산을 함부로 건들이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노림수가 뭔지 알아차린 혁권이 눈을 반짝이면서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일종의 위력시위를 하자 이거군.”
-그렇습니다. 돈을 받고 용병을 훈련시키면서 주변 무장 세력들을 눌러 놓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니겠습니까.
흐음, 소리를 내면서 함단의 의견을 곰씹은 혁권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괜찮은 생각 같군. 한번 구체적인 계획을 짜 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