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96
596
다음 날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연락하자 만수르는 비서실장이자 최측근인 자드란을 호텔로 보냈다.
“남부평의회에 지원해 줄 물품 목록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자드란이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받아 든 혁권은 천천히 내용을 훑어봤다.
소총 같은 개인화기는 물론이고 탄약과 수류탄, 피복류에 박격포 같은 중화기까지 아주 다양한 물품이 적혀 있었다.
한 개 연대 1,500명가량은 너끈하게 완전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물량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부평의회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 주민들한테 나눠 줄 식량과 물자 들도 수백 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급적 이번 달 안에 물품을 다 넘겨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예멘으로 바로 가져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남부평의회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 가운데 규모가 작지만 항구가 있으니 그리로 운송을 하면 됩니다.”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을 한 혁권은 이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기한 안에 물품들이 모두 인도될 겁니다.”
자신 있는 대답에 자드란은 두 번 묻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회장님께서 원하는 의용군 규모는 1개 대대 600명 정도입니다. 여기에 보병을 측면 지원해 줄 전차 1개 중대와 박격포 소대가 포함되어 있어야 됩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이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면서 말했다.
“전차와 박격포는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한 병종이라 인원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투력이 뛰어난 후티 반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 저희 측의 판단입니다.”
“대신 전차와 포병은 꼭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각종 최첨단 무기로 중무장한 아랍동맹군도 후티 반군에게 일격을 당했으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의 전력을 갖추려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좋습니다. 그렇게 원한다니 어렵지만 노력을 해 봐야겠지요. 하지만 비용 부분에서 약간의 절충이 있어야 될 겁니다.”
자드란이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빙긋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앞서 제시했던 액수에서 4천만 달러를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용군은 언제까지 예멘으로 보내야 됩니까?”
“내년 3월을 목표로 진행 중인 분리 독립 국민투표 전까지는 모든 준비가 다 끝나 있어야 됩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전투 경험이 있는 용병들로 인원을 구성할 계획이었기에, 그 정도면 만수르가 원하는 수준의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예정일에 맞추도록 하지요.”
그렇게 의견 조율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듯하자, 자드란이 아래에 내려놓았던 은색 알루미늄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뭡니까?”
“직접 확인해 보시죠.”
자드란은 희미한 웃음만을 띨 뿐 제 입으로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혁권이 손을 뻗어 가방의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들어 올리자 안에 빽빽하게 들어찬 종이 뭉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일반인들은 봐도 무엇인지 짐작할 길이 없지만 혁권은 단번에 미국 재무부에서 발행한 채권인 것을 알아보았다.
대충 어림짐작해 봐도 상당한 액수였기에 혁권이 의도를 묻는 듯한 눈길로 자드란을 쳐다보았다.
“정확히 8억 4천만 달러입니다.”
“약속한 액수로군요. 이런 걸 미리 한 번에 다 줘도 괜찮은 겁니까?”
“회장님께서 그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재력을 과시하는 것은 아닐 테고, 혁권에게 자신의 배포와 관대함을 보여 주려는 뜻이 담겨 있는 게 분명했다.
거기다 만약 혁권이 배신했을 경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리라는 것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상황을 이해한 혁권은 알루미늄 가방의 뚜껑을 닫고는 상대를 보며 말했다.
“잘 받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혁권이 따라서 몸을 일으키자 가볍게 악수를 나눈 자드란은 뒤편에 조용히 서 있던 수행원들과 함께 객실을 나갔다.
다시 소파에 앉은 혁권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리 독립 투표라…… 예멘에 또다시 거센 피바람이 불겠군.”
하디 정부와 후티 반군으로 대표되는 종파 전쟁에 IS 잔존 세력, 거기다가 이제는 분리 주의자들까지 본격적으로 내전에 개입한다면 예멘은 국토 전체가 갈기갈기 찢어져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싸움판이 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IS와의 전쟁과 시리아, 예멘 내전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투르크족 독립 문제까지 중동 전역이 전화戰火에 휩싸여 있었다.
역설적이었지만 이건 곧 혁권한테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펼쳐졌다는 뜻이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혁권은 고개를 들어 한쪽에 서 있는 하킴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서울로 돌아갈 거니까 전용기를 대기시켜.”
“알겠습니다, 보스.”
잠시 뒤. 혁권은 부하들과 함께 아테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자드란과 있었을 때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에서 맞춘 몸의 선을 살려 주는 정장이었지만, 체크아웃을 하는 김에 새로 갈아입었는지 지금은 연한 브라운 톤에 가슴께엔 비슷한 색깔에 체크 패턴이 들어간 행거칩을 꽂아 부드러우면서도 격식을 갖춘 느낌이 드는 차림새였다.
그가 막 로비를 벗어나려던 참에,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이게 누구야? 김 대리 아냐!”
갑자기 들린 한국어에 혁권이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도 전에 상대편 쪽에서 먼저 그를 알은척하며 다가왔다.
“여어.”
돈이라면 부족할 것 하나 없고 교육도 충분히 높은 수준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껄렁거리는 발음이었다.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옷차림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비아냥거리면서 서 있는 사내는 바로 태일그룹 김종원 회장의 셋째 아들이자 예전 직장 상사였던 김인철이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것과 동시에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쯧.”
가능하다면 평생 안 봤으면 싶은 얼굴이었는데.
혁권은 속으로 날카롭게 튀어나가려던 말을 삼켰다.
비자금 사건 이후 김종원 회장의 노여움을 사서 태일물산 이사 자리까지 내놓고 미국으로 유배(?)를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신경을 끄고 있었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깨 너머로 일행으로 보이는 남녀 세 명이 서 있었는데 그렇게 호되게 당해 놓고도 제 버릇 개 못 주고 여자들을 끼고 놀러 다니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한번 복수를 해서 그런지 이제 별다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던 혁권은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김인철이 그저 귀찮게만 느껴졌다.
그냥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자 김인철이 와락 인상을 쓰면서 한쪽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고 했다.
“이 자식이.”
하지만 하킴이 재빨리 팔을 잡아 뒤로 꺾어 버리는 바람에 김인철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악!”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크게 비명을 내지르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이 새끼, 이거 안 놔!”
“뭐야? 왜 그래?”
안내 데스크 쪽에 있던 김인철의 일행과 호텔 보안 요원들이 굳은 얼굴로 황급히 뛰어오는 모습에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풀어 줘.”
“예.”
짧은 대답과 함께 하킴이 붙잡고 있던 팔을 놔주자 김인철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납게 소리를 쳤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이봐, 방금 이 놈들이 먼저 폭력 쓰는 거 봤지. 어서 경찰 불러!”
난리를 치면서 고함을 지르자 호텔 보안요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손님, 이분 말씀이 사실입니까?”
혁권은 꼴 사나운 김인철의 행동에 내심 혀를 차고는 차분하고 대답했다.
“저자가 먼저 예의없이 구는 걸 내 경호원이 막아선 것뿐이오.”
“그럼 먼저 시비를 건 사람은 이쪽 분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자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고 있던 김인철이 버럭 소리쳤다.
“뭔 헛소리야! 네가 먼저 날 무시했잖아!”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라는 말을 실천이라도 할 요량인지 김인철의 고함은 갈수록 커졌다.
그래도 본인이 주변 평판을 신경 써야 할 위치인 것을 알면 이렇게 날뛰지는 않을 텐데 지금은 자기가 무시당했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완전히 상했는지 천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난리를 피우는 형국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보안 요원이 그의 앞을 막아서며 단호히 제지했다.
커다란 덩치에 일순 움찔한 김인철은 이내 인상을 쓰면서 이번엔 보안요원에게까지 삿대질을 해 댔다.
“뭐? 먼저 손을 댄 건 저 쪽인데 왜 나한테 잔소리야!”
“목소리를 낮춰 주시죠. 여긴 손님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지 싸우는 장소가 아닙니다.”
“씨발!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무슨 이런 개떡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제 속이 답답했는지 마지막 말은 한국어였으나 대충 눈치로도 좋은 뉘앙스는 아니란 걸 파악한 보안 요원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편 괜히 죄 없는 사람을 붙잡고 화풀이를 해 대는 김인철의 행동을 혁권은 하찮은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김인철이 계속 진상을 부리는 모습에 혁권의 기분은 갈수록 바닥을 쳤다.
소란이 커지자 곧장 연락을 받고 왔는지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뒤에 보안 요원을 더 대동하고 로비에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그는 얼른 직원을 시켜 로비에서 반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또 반은 큰 싸움으로 번질까 봐 불안해하는 눈으로 구경하고 있는 다른 손님들에게 별것 아니니 금방 수습하겠다는 말을 전하는 한편 맨 처음에 달려온 보안요원에게 상황을 보고 받았다.
“사실은…….”
보안요원이 귓속말로 소곤거리는 동안 지배인은 음음, 하면서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제부턴 내가 처리할 테니 자네는 뒤로 물러나 있게.”
앞으로 나서며 양쪽을 쳐다보던 지배인은 혁권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얼른 가까이 다가와 알은척을 했다.
“존슨 씨 아니십니까?”
처음 호텔에 묵은 손님이었지만 일박을 하는 데 한화로 1천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프레지던트 룸을 며칠씩 이용한 VVIP였기에 지배인이 한눈에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어찌 된 상황인지는 대충 들었을 테고, 바로 공항으로 가야 되니까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김인철이 다시 한번 목청을 높였다.
“어딜 가려고? 당장 경찰 부르라니까!”
계속 소란을 피워 대는 김인철의 행동에 눈가를 찌푸린 지배인은 이내 정색을 하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자꾸 이러시면 업무 방해로 경찰에 넘기겠습니다.”
“뭐야!”
로열 패밀리로 태어나 한 번도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김인철은 당혹감과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든 말든 지배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혁권을 보며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혁권은 그가 사과할 필요 없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원인을 따지자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김인철이 문제지, 지배인을 비롯한 호텔 측은 애꿎은 소동에 말려든 죄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시종일관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혁권과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며 난폭하게 구는 김인철.
어느 쪽이 더 자기네 호텔에 어울리는 고객인지는 굳이 비교해 보지 않아도 명백했기에 지배인은 감사하다며 혁권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