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19
619
아직 계약을 맺은 건 아니었지만 기체 가격만 5천만 달러에 달하는 비즈니스 제트기 가운데 가장 비싼 기종을 선택하자 클리퍼드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주문을 하면 언제쯤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거요?”
“옵션 선택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제작에 평균 20개월 정도가 소요됩니다.”
상당히 오래 걸렸으나 공장에서 막 찍어 내는 것도 아니고 하나하나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지는 거였기에 그 정도 시간은 필요했다.
“따로 요구한 장비들을 장착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는 거겠지요?”
혁권의 물음에 상대가 살짝 얼굴을 굳히면서 대답했다.
“기술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뭔가 여운이 남는 말투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 상대를 봤다.
“자위용이라고 해도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장비들은 장착하는 데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하고 있는 사업의 특성상 위험한 지역을 방문하는 일이 많고 경쟁 상대가 공격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미사일 경보 장치를 비롯해 플래어와 적외선 지향성 기만장치(DIRCM) 등의 안전 장비를 탑재하길 원했다.
“그래서 장착을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고객님께서 기체를 인도받아 별도로 개조를 하신다면 저희가 공식적으로 관여할 방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상대가 말을 이었다.
“원하신다면 법적 제약이 없는 제3국에서 추가 옵션을 장착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은 거요?”
“물론입니다. 고객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드리는 것이 저희가 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대신 비용은 꽤 늘어나게 될 겁니다.”
“그건 상관없소.”
“그러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법을 어기는 일이었으나 수천만 달러의 돈이 오가는 계약이었기에 그런 것쯤은 간단히 무시됐다.
그 뒤로도 세세한 옵션 사항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듣고 하나씩 결정을 내렸다.
시트 가죽의 종류와 색깔부터 시작해서 침실에 들어갈 침대 크기까지 혁권한테 맞춘, 말 그대로 그만을 위한 전용기가 만들어졌다.
진한 향이 풍기는 홍차를 마시면서 잠시 기다리자 클리퍼드가 옵션을 모두 포함한 최종 견적서를 보여 줬다.
“US 달러로 8,500만 달러가 나왔습니다.”
건네받은 태블릿 PC를 천천히 훑어본 혁권은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있는 클리퍼드를 보며 말했다.
“개조 비용도 포함된 거요?”
“그렇습니다. 아, 물론 계약서를 쓸 때는 다른 항목으로 표시가 될 겁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태블릿 PC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대로 계약을 하겠소.”
미적거리지 않고 시원하게 결정을 내리자 클리퍼드가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고객님의 품격에 어울리는 최고의 전용기를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뒤 봄바디어 측에서 만들어온 계약서에 서명을 한 혁권은 총금액의 10%에 해당하는 850만 달러를 바로 입금시켜 주는 걸로 전용기 주문을 마무리 지었다.
한화로 1천억에 가까운 초고가 쇼핑을 했지만 혁권의 재력을 생각하면 그리 큰 지출은 아니었다.
똑똑.
퇴근을 하려고 옷걸이에 걸어 둔 외투를 꺼내 몸에 걸치던 심인성은 노크 소리에 옷깃을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최기혁이 심인성을 보며 말했다.
“퇴근하시는 겁니까?”
“그래. 오늘이 딸내미 생일이거든.”
“이제 네 살인가요?”
“맞아.”
“한창 귀여울 때겠네요.”
“그렇지. 오죽했으면 지금 이 모습대로 더 이상 안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니까.”
딸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 심인성은 앞에 서 있는 최기혁한테 시선을 주며 용건을 물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김혁권에 관계돼서 보고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관리하는 인물들 가운데 단연 제일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혁권이였기에, 심인성은 얼굴에서 바로 웃음기를 지우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서 이야기를 해 봐.”
“주위를 맴돌면서 김혁권의 뒤를 몰래 캐고 다니는 놈들이 있습니다.”
“어디 기관원이야?”
“조사를 해 봤는데 그런 쪽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CIA나 다른 나라 정보기관일 거라고 지레짐작한 심인성은 최기혁이 머리를 가로젓자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럼 뭐야?”
“대정 서비스라는 곳에 소속된 놈들이었습니다.”
“…….”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최기혁을 쳐다보던 심인성은 이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대정 서비스라는 곳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데는 아니겠지?”
“짐작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노형석이라고 강력계 형사 반장 출신이 운영하는 용역 업체입니다.”
“나 참. 이제 별게 다 설치는군.”
짧게 혀를 차며 심인성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자식들은 뭣 때문에 주위를 얼쩡거린 거야?”
“알고 보니까 태일그룹 3세인 김인철 부사장의 의뢰를 받아서 움직인 거였습니다.”
뭔가를 떠올린 심인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태일그룹이라면 김혁권이 속해 있던 회사잖아?”
“맞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최기혁이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태일기획 부사장으로 있지만 그 전까지 태일물산 이사로 재직하며 김혁권하고 관계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팔짱을 낀 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최기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저쪽에서는 이걸 알고 있어?”
“아직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김혁권은 지금도 계속 외국에 있나?”
“예. 아직 안 돌아온 걸로 압니다.”
그러자 심인성은 짧게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놔두고 지켜만 봐.”
“알겠습니다.”
어떻게 할지 이미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껄끄러운 기분에 심인성은 김인철의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며칠 뒤, 혁권은 그리스를 들렸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동안 신경을 거의 못 썼음에도 불구하고 김덕현 전무와 정빛나 디자인 실장이 호흡을 잘 맞춰 회사를 이끌어 간 덕분에 미리내 브랜드는 흑자를 기록하면서 꾸준히 매출과 인지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강남 매장에 마련된 사장실에서 김덕현 전무가 그를 보며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번 1/4분기도 매출이 꾸준히 증가해 흑자를 기록할 걸로 예상됩니다. 특히 럭셔리 라인의 판매가 많아 이윤이 아주 높습니다.”
“그래?”
처음부터 고급 명품 브랜드를 지향했기 때문에 미리내에서 내놓은 제품 가격이 대체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싼 럭셔리 라인의 매출이 많다니 의외이면서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콜라보를 하고 있는 제니퍼 와츠의 작품이 다 완판된 건 물론이고, 여기 있는 정 실장이 디자인한 목걸이와 반지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정빛나 실장을 쳐다보니 그녀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한껏 당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이어 디자인 초안을 뽑아내느라 다소 초췌해진 감은 있었으나 한창 영감을 받았을 때의 예술가처럼 어딘가 형형하게 빛나는 분위기가 있었다.
스스로도 그런 것을 아는지 요즘 정빛나 실장은 제일 먼저 사무실에 출근해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기대한 대로 제 몫을 단단히 해내고 있는 정빛나 실장의 모습에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다들 수고 많았어. 특히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정 실장의 공이 커.”
“저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디자인실 직원들이 함께 만들어 낸 성과입니다.”
“물론 그렇지만 자네가 큰 역할을 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나.”
옆에 앉아 있던 김덕현 전무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정 실장이야말로 우리 회사의 보물입니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칭찬을 하자 정빛나 실장은 아닌 척하면서도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열심히 해서 성과를 냈으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줘야지. 이번 분기 결산이 끝나면 모든 직원들한테 두둑하게 보너스를 지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시에라리온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과 브랜드 론칭에 많은 투자금이 들어갔기에 연속 흑자를 냈다고 해도 아직 전체적인 손익 분기점을 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혁권이 여러 차례 거액의 자본금을 넣어 준 덕분에 회사 자금 사정이 넉넉한 데다 보너스로 직원들의 애사심과 의욕을 심어 줄 수 있었기에 김덕현 전무는 순순히 지시를 받아들였다.
“모두들 열심히 노력해 줘서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미리내 브랜드가 안착했지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건 여기가 아니라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
“예.”
혁권의 말에 두 사람 다 의욕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는데 특히 정빛나 실장은 자신의 손으로 세계 최고의 보석 브랜드를 만들어 내겠다는 열정에 불타올랐다.
이런 목표와 꿈이 있었기에 해외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 자리를 박차고 이제 막 시작하는 신생 회사로 옮겨 온 거였다.
김덕현 전무 역시 거대한 기계에 들어가고 있는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라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회사를 키워 나가는 것에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성장세에 더욱 탄력을 붙이기 위해서 잠시 보류해 뒀던 매장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면 합니다.”
“생각해 둔 방안이라도 있나?”
혁권이 관심을 보이자 김덕현 전무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열의를 띈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동화그룹에서 인천 공항 면세점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는 오퍼Offer가 있었습니다.”
동화그룹은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 등을 운영하는 종합 소매 유통업체로 연간 매출액이 10조 원에 달했다.
“백화점이 아니라 면세점 입점을 먼저 제안했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중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우리 브랜드 보석 악세사리가 입소문을 타고 인기인 걸 알고는 이런 오퍼를 한 것 같습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강남 매장까지 찾아와 한번에 값비싼 악세사리를 서너 개씩 구입해 간다는 보고를 받았던 걸 떠올린 혁권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매출에서 중국 관광객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나?”
그러자 시선을 받은 김덕현 전무가 바로 대답했다.
“절반이 조금 넘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비율에 그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많아?”
“고객 숫자는 적지만 개인당 구매 액수가 압도적으로 높다 보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구매 액수가 얼마나 되기에 그래?”
“평균 1만 달러가량 됩니다.”
한 사람이 1천만 원 정도 되는 돈을 쓰고 간다는 말에 혁권은 내심 역시 중국 관광객들의 손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
“동화그룹에서 그런 제안을 할 만하군.”
“매장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서 지난 달에 통역해 줄 직원을 네 명이나 더 뽑았을 정도입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정 실장, 자네 생각은 어때?”
의견을 물어볼 거라 예상을 못 했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정빛나 실장은 이내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경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손님들이 몰리면서 현재 있는 매장이 비좁은 느낌이 들 때가 있으니, 이쯤에서 2호점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명품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매장 관리가 필수적이었기에 혁권은 정빛나 실장의 이야기에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들을 듣고 보니까 이제 매장을 늘릴 때가 된 것 같군. 이 일은 김 전무가 책임을 지고 동화그룹하고 협상을 하되 저쪽에서 먼저 제의를 해 온 거니까 최대한 좋은 조건을 받아 내도록 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머리를 숙인 김덕현 전무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