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22
622
“이야기를 듣고 조금 알아보니 상대가 예전에 태일물산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더군요. 지금은 제법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말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고 운이 따랐다고 해도 몇 년 사이에 혼자서 그렇게 사업을 키우기는 어렵지요.”
“그렇다면?”
머리를 들며 쳐다보자 박상빈이 상체를 똑바로 세운 채 말했다.
“국정원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김인철은 콧방귀를 뀌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태일물산에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국정원이 끼어 있는 만큼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그게 도련님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으음.”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김인철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박상빈 실장은 내심 혀를 찼다.
그러고는 김인철을 보면서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두지 못하시겠다면 회장님한테 보고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몸을 굳힌 김인철이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일이 커지기 전에 그만두시라는 겁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였기에 차마 화를 내지 못한 채 김인철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박상빈 실장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이번에는 부드럽게 그를 다독이면서 설득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으신데 이런 사소한 문제에 발목이 잡히셔야 되겠습니까. 회장님 성격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도련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마지막 말에 김인철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하찮은 놈 하나 때문에 후계자 싸움에서 완전히 밀려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태일그룹을 자신의 손에 넣은 다음 손을 봐 줘도 늦지 않을 터였다.
김인철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박 실장님 이야기대로 할 테니까 대신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박상빈 실장은 그제야 누그러진 눈매로 마치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겨우 훈육시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도련님의 시간을 많이 뺏어 버린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그럼 이만 가 보겠다며 박상빈 실장이 일어나자 김인철도 몸을 세웠다.
“아니, 괜찮습니다. 아직 부족한 몸이니 박 실장님께 많이 배워야죠.”
“회장님께서 도련님이 이전보다 부쩍 성숙해진 것 같다고 하시더니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뒤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그 말을 들은 김인철의 한쪽 입가가 비죽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박상빈 실장은 이미 방을 나간 뒤라 그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만약 보았다면 겉모습은 단순히 위장일 뿐 속은 예전과 그대로라는 걸 단번에 깨달았을 것이었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 김인철은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업무를 보려는 것처럼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끝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하나, 둘, 셋까지 세었을 무렵 갑작스럽게 그의 팔이 크게 휘둘러졌다.
“젠장!”
김인철의 손에서 벗어난 만년필이 바닥을 거칠게 뒹굴었다.
그러고도 성이 안 풀리는 듯 책상에 있던 마우스며 온갖 집기들을 다 던져 대던 그는 팔꿈치에 맞고 떨어진 장식용 화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헐떡이면서 분을 억눌렀다.
알몸으로 흰 수건을 허리에 두른 채 혁권은 하얀 수증기로 가득 찬 한증막 안에 백성균하고 앉아 있었다.
가끔씩 이렇게 땀을 쫙 빼 주면 몸이 가뿐해졌기에 예전부터 사우나를 즐겨 찾았다.
한쪽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두 번 정도 뒤집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역시 흰 수건 하나만을 걸친 하킴이 안으로 들어왔다.
“보스.”
편백나무로 만든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혁권이 얼굴에 덮어 둔 수건을 걷어 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됐어?”
“주위에 얼쩡거리던 놈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확실한 거야?”
앞에 선 하킴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예.”
“그래도 약속은 확실하게 지켰군. 대정 서비스에 대해서 알아봤어?”
“노형석이라고 강력계 형사 반장이었다가 뇌물을 받고 해고된 인물이 차린 회사로 직원은 10명쯤 됩니다. 알고 보니 이번 말고도 김인철한테 돈을 받고 자주 이런저런 일들을 대신 처리해 주고 있었습니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혁권이 눈을 번들거리면서 말했다.
“언제 또 엉뚱한 짓을 할지 모르니까 사람을 붙여서 계속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어느새 모래시계가 다 된 걸 본 혁권은 양손으로 무릎을 짚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나가 볼까.”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호텔 사우나를 나온 혁권은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로 향했다.
대표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마자 마중을 나왔던 정동식 이사가 잔뜩 들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잘 오셨습니다.”
“표정을 보니까 춘절 연휴 기간 관객 집계가 끝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관객이 들어오면 거의 실시간으로 집계가 되는 한국하고 달리 중국은 스크린 숫자도 몇 배나 될 뿐만 아니라, 지역이 너무 광범위했기에 춘절 연휴가 끝난지 이틀이 되는 오늘에서야 결과가 나왔다.
“관람객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궁금하군. 정 이사 표정을 보니까 결과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지?”
그러자 정동식 이사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관객 집계표를 혁권한테 내밀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정도가 아닙니다. 제대로 대박이 터졌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들어왔기에 그러는 거야?”
“자그마치 4,500만 명을 훌쩍 넘겼습니다.”
“……!”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한국에서 검증이 된 작품인 데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연휴 기간으로 개봉 일정이 잡혔기에 어느 정도 흥행은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의 성적이었다.
얼른 한쪽 손을 뻗어 완다 시네마에서 보낸 관객 집계표를 확인해 본 혁권은 낮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정말이군.”
날짜와 각 지역별 상영관으로 나눠 상세하게 기록된 집계표 제일 하단에 적혀 있는 관객 총합계는 무려 4,500만 7,800명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휴 막바지에 일정이 미루어졌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개봉하지 않았더라면 5,000만 명도 충분히 넘길 수 있었을 거라며 완다 시네마 측에서 아쉬워했습니다.”
1~2천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중국 시장의 규모에 혁권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놀라실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혁권이 시선을 들어 쳐다보자 정동식 이사가 진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지만 우리한테 배분될 수익액이 대략 1천억 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하나로 이렇게나 많은 수익을 올리다니 정말 입이 떡 하고 벌어질 일이었다.
더군다나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에 배당될 액수가 이 정도면 흥행 총수익이 얼마일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익이 가능했던 건 영화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판권만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판권 구입비를 제외하고는 들어간 돈이 없으니 고스란히 다 수익이 되는 거였다.
거기에 거대한 중국 시장의 위력과 중국인들의 구매력이 가장 높아진다는 춘절 연휴 기간에 개봉한 것도 크게 한몫을 했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건 당연한 전제 조건이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고 첫 번째로 내놓은 작품에서 이런 성과를 내놨다면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혁권은 얼굴 가득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동식 이사를 봤다.
“훌륭하군. 수고가 많았어.”
“제가 무슨 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대표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일을 진행했을 뿐입니다.”
“얼마 전까지 직접 현지에서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했지 않았나. 이번 성공은 정 이사의 공이 아주 커.”
칭찬에 정동식 이사의 어깨가 절로 펴졌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첫 단추를 잘 꿰었으니 앞으로 중국 쪽 사업은 한결 쉬워지겠군.”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면서 말하자 정동식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고속열차’의 흥행 소식을 들은 국내 영화 제작사들이 앞을 다퉈 저희 회사에 판권 판매와 제작 참여를 문의해 올 뿐만 아니라, 완다 시네마도 다음에 개봉할 영화를 빨리 결정하면서 계속 재촉하고 있습니다.”
“제작 참여라…….”
투자에 실패할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제작 단계에서부터 참여한다면 수익을 좀 더 극대화시키는 건 물론이고 아직은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은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시선을 받은 정동식 이사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판권을 구입해 중국 시장에 배급하는 것도 좋지만 멀리 내다본다면 직접 영화 제작에 참여해서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이득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받아 낼 수 있는 것만 해도, 좋은 배역에 저희 회사 배우들을 우선적으로 꽂아 넣어 얼굴을 알릴 수 있을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혁권이 말을 이었다.
“괜찮은 작품은 있나?”
“네. 조금 더 신중하게 검토를 해 봐야 되겠지만 제안이 온 것들 가운데 좋은 작품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럼 나보다는 정 이사가 보는 안목이 나을 테니까 제일 괜찮은 걸로 하나를 뽑아서 일을 진행시켜 봐.”
신뢰를 보이면서 영화 제작 참여에 대한 전권을 주자 정동식 이사는 머리를 숙이며 의욕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참 그리고 좋은 결과가 나온 만큼 ‘고속열차’에 대한 수익 정산이 끝나면 직원들한테 보너스를 두둑이 지급하도록 해.”
혁권의 지시에 정동식 이사가 반색을 했다.
“직원들이 아주 기뻐할 겁니다.”
미소를 지은 채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 혁권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고속열차’ DVD 발매는 언제쯤으로 계획하고 있지?”
“이미 1차분 10만 장은 생산을 다 끝내고 이번 주 안으로 중국에 보낼 예정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기에 DVD 수량을 최소한으로 조절했는데, 그래도 한국에서 판매된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흥행이 대성공을 거뒀으니 1차분은 충분히 다 소화시킬 수 있겠군.”
“현지에 있는 인터내셔널 미디어 네트워크의 조사에 의하면 카피판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40~50만 장은 너끈히 소화해 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4,500만이나 되는 관객이 들어왔다고 해도 14억 명이 훌쩍 넘어가는 중국의 인구수를 감안한다면 ‘고속열차’를 본 사람보다는 못 본 쪽이 더 많았기에, 결코 허황된 장밋빛 전망을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극성인 불법 카피판을 감안해서 보수적인 예측을 한 거였다.
“그러면 DVD를 포함한 2차 판권에서도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겠군.”
“영화관 수익만큼은 아니지만 그럴 겁니다.”
“흥행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물량을 풀고 중국 공안당국에 선을 넣어서 불법 카피판 단속에 신경을 써 달라고 해. 필요하면 천민열 부국장이나 장덕천 부장한테 부탁을 해도 좋고.”
중국 국내에서 불법 카피판이 극성인 이유는 저작권 개념이 거의 없는 데다 경찰에 해당하는 공안公安이 신고를 받더라도 적극적으로 단속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공안에서 단속을 해 준다면 피해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엉덩이가 무거운 공안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테지만, 꽌시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였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