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21
621
북한산 인근 백숙집.
평일인 데다 큰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손님이 거의 없어 조용했다.
자갈이 깔린 앞마당에는 허름한 가게하고 어울리지 않는 최고급 벤츠 승용차와 캐딜락 밴이 세워져 있었다.
산 근처에 있어 사람을 보고도 딱히 피하지 않는 새들이 이따금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조용한 내실에 앉아있던 두 사람이 식사를 다 마친 듯 수저를 놓았다.
그러고는 주인이 입가심을 하라고 가져다준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혁권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제 식사도 다 끝냈으니 슬슬 왜 날 보자고 했는지 용건을 이야기해 보시죠.”
“안 그래도 말을 꺼내려고 했소.”
휴지로 입가를 닦아 낸 심인성 과장은 옆에 놔둔 윗도리에서 담뱃갑을 꺼내면서 말했다.
“한 대 피우겠소?”
자꾸 시간을 끄는 것 같아 살짝 짜증이 났지만 혁권은 일단 참고는 앞으로 내민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빼내 입에 물었다.
하얀 담배 연기를 한번 깊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으면서 심인성 과장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최근 그쪽에 귀찮은 파리 하나가 붙었다는 걸 알고 있소?”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수상한 놈들이 김 사장 주위를 계속 캐고 다니기에 조사를 해 봤더니 대정 서비스라는 용역 업체 직원들이었소.”
용역 업체라는 말에 순간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혁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을 맡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소?”
혁권은 대답 대신 얼른 말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가르쳐 줄 거면서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김인철이오.”
“……!”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군지 잘 알고 있을 거요.”
이름을 듣는 순간 혁권은 눈가를 찡그렸다.
지난날 불편했던 기억을 잊고 살려고 했는데 또다시 자신을 건드리다니 정말 김인철 아니, 태일그룹 오너 일가하고는 악연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심인성 과장이 입에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도 명색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 그룹인데 일이 커져서 서로 좋을 것이 없지 않겠소. 그러니 이번 일은 나한테 맡기시오.”
“싫다면 어쩔 거요?”
그러자 심인성 과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 그룹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거요. 손을 쓰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맙시다.”
“…….”
“내 선에서 조용히 묻어 버릴 수 있는 걸 왜 김 사장한테 이야기를 했겠소.”
“그래서 가만히 있어라?”
“김 사장이 호락호락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정관계에 깊숙이 인맥을 깔아 두고 있는 태일그룹의 힘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거요.”
어느새 방 안을 가득 채운 담배 연기 사이로 혁권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눈빛이 스쳤다 금방 사라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대한민국 안에서 태일그룹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혁권도 예전의 힘없는 샐러리맨이 아니었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걸 걸고 싸운다면 결과가 어찌 될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김인철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지만 이미 충분히 복수를 해서 감정이 많이 흐려져 있었기에 구태여 또다시 태일그룹하고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새 필터 부분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고는 혁권이 먼저 무겁게 이어지던 침묵을 깼다.
“좋습니다.”
“그럼…….”
“하지만 이 뒤로 다시 한 번 김인철이 내 주위를 얼쩡거린다면, 그땐 심 과장도 날 말리진 못할 겁니다.”
“그걸로 충분하오.”
심인성은 이미 차갑게 식은 녹차를 단번에 비워 버리곤 이만 일어나자며 옆에 놔둔 윗도리를 들고 먼저 나갔다.
그보다 한 발짝 늦게 혁권이 가게 밖으로 나오니 이미 심인성은 제 차에 탄 상태였다.
혁권은 차 뒤꽁무니를 곁눈으로 흘끗 바라보곤 하킴이 열어 준 문 사이로 몸을 미끄러트려 뒷좌석에 올라탔다.
최고급 세단답게 미끄러지듯 벤츠가 움직이자 타이어가 바닥에 깔린 자갈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뒷좌석 가죽 시트에 파묻듯이 몸을 기대고 있던 혁권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킴.”
“예, 보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하킴이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그를 바라봤다.
“김인철이 그동안 사람을 시켜서 내 뒷조사를 하고 있었다는데, 알고 있었나?”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지 하킴의 얼굴에 살짝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긴 사실을 알았다면 바로 자신한테 보고를 했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먼저 파악을 하고 있었어야 됐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하킴이 머리를 숙이자 그는 짧게 혀를 차면서 따끔하게 질책했다.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코앞까지 접근해 얼쩡거리는 건 잡아냈어야지.”
“죄송합니다.”
명백한 잘못이었기에 하킴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말귀를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한 혁권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두 번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길 바라네.”
“예.”
“일단 국정원에서 상황을 정리한다고 했지만, 놈이 또 뒤로 일을 벌일 수도 있으니 따로 감시를 할 사람을 붙여 놔.”
“알겠습니다.”
김인철로 인해서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대답하는 하킴의 목소리에서 이를 악문 듯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내 경호에 다른 일까지 처리하려면 아무래도 인원이 부족할 테니까, 이번 기회에 자네가 부릴 수 있는 부하들을 더 늘리도록 해.”
“실력 좋은 놈들로 뽑아 놓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맡은 일이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기에 하킴은 군말없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혁권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봤다.
비라도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룹 회장인 아버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한동안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던 김인철은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지?”
“네, 부사장님.”
차민성이 막 서명을 끝낸 결재 서류를 받아 들면서 대답하자 김인철은 짜증이 묻어나는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군. 이딴 지루한 업무나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다니, 제기랄.”
타고난 천성이 놀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그는 아무리 제 이익이 따르는 일이라도 책상 앞에 붙어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더군다나 핵심 계열사도 아니고 그룹에서 떨어지는 일거리를 받아서 수익을 올리는 회사에 유배를 와 있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회장님께서 부사장님을 언제까지 태일기획에 놔두지는 않으실 테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십시오. 그럼 분명 좋은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고작 이딴 곳에서 썩으려고 미국으로 쫓겨 가 있는 동안 숨도 쉬지 않고 바짝 엎드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데 두 형들은 각각 정유와 건설을 맡아 입지를 확실히 다져 가고 있으니 이대로 후계자 경쟁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건 아닌지 자꾸 조바심이 들었다.
“젠장. 술이나 한 잔 마시러 가야 되겠군. 준꼬에 갈 거니까 차 대기시켜.”
“알겠습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책상 한쪽에 있던 인터폰 벨이 울리면서 여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사장님, 본사 박상빈 비서실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뜻밖의 방문에 김인철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들어오시라고 해.”
-네.
“박 실장이 여긴 왜 온 거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아버지인 김종원 회장의 지시를 받고 온 건 아닌지 김인철이 살짝 긴장할 때 문이 열리면서 박상빈 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박상빈 실장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항상 단정하고 빈틈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30년 넘게 깐깐한 김종원 회장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며 그룹의 실세 중 하나가 된 것일 터였다.
김인철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박상빈 실장을 반겼다.
“박 실장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늦은 시간인데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계셨군요.”
“이것저것 살펴보고 처리할 업무가 많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시면 회장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마치 감시를 하듯 날카롭게 사무실을 훑어보는 모습에 김인철은 기분이 나빴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머리를 가볍게 내젓자 김인철도 더 권하지 않고 몸을 뒤로 비스듬히 기대면서 말했다.
“제 얼굴을 보려고 들르신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박상빈이 고개를 돌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차민성을 봤다.
“잠깐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아. 예.”
김인철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는 걸 본 차민성은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부사장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김인철이 탐색하듯 상대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그렇게 무게를 잡고 계시니 이거 괜히 긴장이 되는군요.”
시선을 들어 김인철을 잠시 바라보던 박상빈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정 서비스라고 알고 계시지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인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즘 거길 통해서 누구 뒤를 캐고 있다던데, 당장 그만두십시오.”
부탁도 아니고 명령을 하는 듯한 말투에 김인철이 발끈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해도 그런 개인적인 일까지 간섭할 권한은 없을 텐데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이러는 겁니다.”
“…….”
정색을 한 채 박상빈이 말을 이었다.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국정원에서 경고를 해 온 겁니다.”
“갑자기 국정원이 왜……?”
난데없이 국정원이라니 머리가 복잡해진 김인철은 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에 박상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큰 실수를 두 번이나 저질러 놓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신이 모시는 분의 아들 중 하나였기에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를 했다.
“자신들하고 관련되어 있는 인물이니 쓸데없이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그놈이…….”
김인철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기 밑에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던 혁권이었는데, 국정원이 박상빈 실장을 통해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까지 해 올 정도로 거물이 되었다니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단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이 머릿속 깊숙이 박혀 있었기에 발톱의 때보다 못하게 생각했던 혁권이 자신도 쉽사리 어찌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