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53
653
상석에 앉은 오차돈 사장은 살짝 굳은 얼굴로 ‘자금 운용 계획서’라고 적힌 눈앞의 서류를 내려다봤다.
넓은 회의실 안에는 태일정유 주요 임원들이 모두 참석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새로 이사로 선임된 김인철 역시 왼편에 자리해 있었다.
매출 호조로 5분기 연속 흑자가 거의 확정적이라서 그런지 회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해서 매출액 1조 600억 원에 영업이익은 7,300억 원을 넘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전년 대비 20% 이상 매출액이 상승한 겁니다.”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실적에 회의 참석자들의 표정에 화색이 감돌았다.
“분기 매출이 1조를 돌파하다니 태일정유 창사 이래 최고 실적 아닙니까?”
“이거 벌써부터 연말 실적 발표가 기대되는군요.”
“주가도 크게 오르겠습니다.”
실적이 좋으면 그만큼 많은 인센티브를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자리를 계속 보존할 수 있었기에 임원들이 기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느긋한 얼굴로 앉아 있는 김인철을 힐끗 한번 쳐다본 오차돈 사장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흐흠. 회사채 발행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시선을 받은 박창근 재무이사는 오차돈 사장을 마주 바라보면서 바로 대답했다.
“태일증권과 함께 공모 준비를 모두 다 끝마치고 다음 주부터 청약을 받기 시작할 예정입니다.”
“발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소?”
“5분기 연속 흑자가 확정적인 데다 정제 마진 상승과 비정유 부분의 수익이 큰 폭으로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이 투자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목표 금액인 1,060억원을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금리는 얼마로 결정됐소.”
“시장 상황을 고려해서 3.75%로 확정했습니다.”
이미 논의가 된 사안이었기에 오차돈 사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진짜 본론을 꺼냈다.
“시장 반응이 좋다고 하니 회사채 발행 액수를 조금 더 늘렸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얼마나 말씀이십니까?”
“2천 억 정도를 생각하고 있소.”
“그러면 거의 2배가 아닙니까?”
“어려울 것 같소?”
“그건 아닙니다만 괜히 시장에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투자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자 오차돈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계획 중인 에틸렌 생산 공장 신축에 쓰일 자금이오.”
이야기를 들은 박창근 재무 이사는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호재가 될 수 있으니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회사채 발행 액수를 2천억 원으로 늘리도록 합시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말을 하시오.”
주위를 둘러보자 참석자들은 서로 목소리를 낮춰 의견을 교환하기만 할 뿐 딱히 반대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공장 부지를 추가로 매입할 돈이 필요했었는데, 회사채를 발행해서 들어오는 자금 일부를 거기다 쓰고 나머지는 예정대로 건설에 빌려주면 되겠군요.”
박창근 재무이사의 말에 오차돈 사장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회사채를 발행해서 확보하는 자금은 전부 추진 중인 공장 증설에 쓰일 거요.”
“예? 그게 무슨······.”
순간 박창근 재무이사뿐만 아니라 참석자들 대부분이 의아한 표정으로 오차돈 사장을 바라봤다.
오차돈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김인철을 봤다.
마치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김인철은 느긋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 앉아 있었다.
“나프타 공장뿐만 아니라 에틸렌 생산 시설까지 새로 세우려면 1조 원이 넘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데 이자까지 물어 가면서 확보한 자금을 다른 계열사에 빌려줄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럼 태일건설에 차입해 주기로 약속한 돈은 어쩌시려는 겁니까?”
임원 가운데 한 명이 묻자 오차돈 사장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건설 쪽에 양해를 구하고 없었던 일로 할 생각이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참석자들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크게 술렁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태일건설 지원은 단순한 계열사 간의 협력이 아니라 김종원 회장의 장남인 김성균 사장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처음부터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차입을 해 준다고 했다가 이야기를 뒤집는 건 김성균 사장과 척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담당 임원인 박창근 재무이사가 우려스러운 얼굴로 묻자 오차돈 사장 대신 지금까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인철이 끼어들면서 입을 열었다.
“전 사장님의 말씀에 찬성입니다.”
“······!”
입가에 미소까지 지은 김인철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참석자들을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아무리 계열사를 돕는 것도 좋지만 회사채까지 발행해서 자금을 우회해 빌려주는 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배임背任 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배임이라니, 그건 너무 지나친 억측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참석자들이 발끈하면서 말을 쏟아 냈지만 김인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세상에 완전무결한 건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같은 그룹 계열사가 아니었다면 태일건설에 이런 조건으로 1천억 원이나 되는 거액을 빌려주려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흠흠.”
“그건······.”
날카로운 지적에 다들 괜히 헛기침만 할 뿐 아무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몇몇 눈치가 빠른 이들은 이번 일의 배후에 김종원 회장의 막내아들인 김인철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더욱 몸을 사렸다.
그러자 오차돈 사장이 다시 나서면서 확인하듯 물었다.
“이 안건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시오.”
“······.”
회의실 안이 잠시 소란스러워졌지만 서로 수군거리기만 할 뿐 손을 들어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본 오차돈 사장은 약간 경직된 얼굴로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다들 이의가 없는 걸로 알고 새로 발행하는 회사채로 확보되는 재원은 모두 공장 설비 증설에 투입하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결국 김인철의 뜻대로 모든 일이 진행된 셈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김인철은 속으로 득의만만한 미소를 감추며 자리가 빌 때까지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회의실이 텅 비어 버리자 서류를 챙기는 척하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오차돈 사장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셨군요.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오차돈 사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김인철과 끝까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자신이 내린 결정이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마음속으로 갈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위험한 도박에 손을 대 버렸어.’
오차돈은 후회와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말씀대로 했으니 지난번에 하셨던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후회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한 김인철은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오차돈 사장을 놔두고 회의실을 나섰다.
극장을 나온 두 사람은 가까운 카페에서 잠시 쉬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참 좋더라. 이탈리아 풍경이 너무 예쁘지 않았어요?”
“그래? 솔직히 나는 사람 얼굴보다 배경을 더 많이 비춰 줘서 처음엔 자연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어.”
“뭐예요, 그게.”
영상미가 뛰어나다고 해서 화제가 된 영화였는데 솔직히 혁권에게는 크게 재밌는 부분이 없었다.
내용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데 엔딩이 결국엔 이별로 끝나는 것이라서 데이트용 영화로는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소현은 정반대로 그런 부분이 좋았는지 카페까지 오는 내내 눈이 너무 호강을 했다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늙으면 나도 저런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어요. 정원에는 예쁜 꽃도 가꾸고.”
“주택은 관리하기 힘들어.”
“에이, 아까부터 자꾸 초 치는 소리만 할래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소현이 볼을 부풀리면서 차가운 레몬에이드를 쭉 빨아 먹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극장에 와서 좋았죠?”
그동안은 소현이 계속 촬영 스케줄에 시달리느라 힘들었고, 혁권도 여러모로 바빴기 때문에 몇 번 시간을 내서 만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느긋하게 나와서 걸어 다니는 데이트는 거의 몇 달 만인 듯했다.
“날씨도 좋고~ 따뜻하고~.”
소현은 팔에 턱을 괴고 앉아 바깥 유리창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커피숍은 3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심가 한복판이라서 사람 구경을 하기에 완벽한 위치였다.
한낮에 나른하게 늘어진 고양이처럼 쏟아지는 햇볕을 마음껏 쬐고 있던 소현은 그러고 보니, 하면서 말을 꺼내는 혁권을 돌아보았다.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돼?”
“별다른 스케줄은 없어요, 나 요즘 한가한 거 알면서.”
“그럼 친구 결혼식이 있는데 같이 가자.”
그러자 소현이 눈을 반짝 빛내고 관심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친구 누구? 벌써 결혼하다니 좀 빠른 거 아녜요.”
“이르기는 딱 적당하지. 소현이한테는 아직 소개 안 시켜 줬는데······ 말은 몇 번 했을걸. 유기백이라는 녀석이야.”
“유기백······ 아, 생각났다!”
잠시 머릿속을 더듬던 소현이 금방 이름을 떠올린 듯 알겠다면서 놀라했다.
“오빠가 자주 말하던 친구잖아요. 회사 다닐 때 입사 동기랬던가?”
“응, 맞아.”
“그렇구나, 벌써 결혼하는구나.”
아직 20대 초반이라 주변에 결혼한 사람이 많이 없는 소현은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 왔다.
“오래 사귀었대요? 5월에는 예식장 잡기 힘들다던데 어떻게 자리가 났나 봐요. 참, 그리고 신부는 몇 살인지도 궁금한데······.”
혁권은 웃으면서 천천히 물음에 대꾸했다.
“결혼할 인연이었는지 금방 거기까지 진도가 나갔다 하더라고. 나도 따로 인사한 적은 없어서 이름도 청첩장 받으면서 처음 알았다니까.”
“어쨌든 알았어요. 그런데 오빠 예전 회사 친구면 아는 사람들도 많이 오겠죠?”
“아무래도.”
그러자 소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말했다.
“오늘 나온 김에 백화점 가서 쇼핑 좀 해야겠어요.”
“갑자기 왜?”
“오빠 아는 사람들 많다면서요. 여자 친구로 가는 건데 당연히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죠!”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가 봤자 인사하고 축의금 내면 끝인데 뭘.”
보통 예식장 뷔페는 질이 거기서 거기인지라 굳이 밥까지 얻어 먹고 갈 이유도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사람들이 신경 안 쓰는 것 같아도 다 알아본다니까요.”
소현은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쇼핑 리스트를 작성했다.
“일단 봄이니까 좀 화사한 색의 원피스를 하나 사고······ 으음, 하객들 평균이 30대면 차라리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게 더 나으려나. 어쨌든 원피스랑 거기에 맞는 구두, 그리고 가방이랑 액세서리까지 맞춰야 하는데. 아, 목걸이랑 귀걸이는 혁권 오빠가 사 준 걸로 해야겠다.”
목걸이에 다이아몬드가 있어서 화려한 편이었으니 가급적 목이 돋보일 수 있도록 네크라인이 파인 디자인을 골라야겠다며 단숨에 줄줄 이야기해 대는 것을 보고 혁권이 놀리듯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 결혼식에 가는 것보다 쇼핑할 정당한 이유가 생겨서 더 신난 거지?”
“에헤헤, 어떻게 알았어요.”
“나 참.”
혁권은 다 마신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슬슬 움직일까, 하면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책임져야지.”
“어, 어디 가요?”
“백화점에. 계산은 내가 해 줄 테니까 마음대로 다 골라 봐.”
“와아! 오빠 최고!”
활짝 핀 꽃보다 더 밝게 웃어 보인 소현이 그의 팔에 바짝 달라붙었다.
“내가 진짜진짜 좋아하는 거 알죠?”
“하여간 이럴 때만 애교가 넘쳐나지.”
혁권은 장난스럽게 소현의 코끝을 잡았다가 금방 놓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