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83
683
#WIN-WIN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로 아테네에 있는 함단이 보낸 서류를 살펴보던 혁권은 백성균의 보고에 이맛살을 찌푸리면 고개를 들었다.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배후에 김인철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이걸 좀 보시죠.”
백성균이 안주머니에서 꺼내 탁자에 늘어놓은 사진에는 차민성 대리가 정현구를 만나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자는…….”
혁권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계시겠지만 김인철의 측근으로 수행비서 역할을 하는 차민성입니다.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놈들의 아지트를 드나드는 걸 운 좋게 포착했는데, 서로 대하는 태도를 볼 때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쯧. 그래도 명색이 재벌 3세인데 뒤에서 이런 일에 손을 대다니…….”
“그리 쉽게 보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야?”
시선을 받은 백성균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저들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도박 사이트에서 매달 움직이는 판돈이 무려 100억 대가 넘는다고 합니다.”
“……!”
생각지도 못한 액수에 혁권은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그게 정말이야?”
“예. 물론 100억을 전부 가지지는 않겠지만 이걸로 챙기는 수익이 상당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럼 이게 김인철의 숨겨진 돈줄이라는 뜻이군.”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이런 식으로 비자금을 만들 줄이야.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걸.”
혁권은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모를 어투로 중얼거렸다.
“정현구라는 놈이 도박 사이트 운영을 맡고 죽은 노형석은 중국에 있는 북한 해커들을 통해 프로그램 개발이나 보수를 의뢰하는 일을 한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노형석의 노트북에 불법 도박 사이트 프로그램이 남아 있었던 거군.”
모든 것이 명확해지자 혁권은 소파 등받이에 어깨를 기댄 채 잠시 고심을 하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주 대리한테 연락해서 당장 이리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백성균이 물러나자 그는 한쪽 손을 들어 깔끔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얼마 뒤, 호출을 받은 주성철이 백성균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어서 와. 바쁜데 오라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괜찮습니다.”
“그쪽에 앉아.”
혁권이 턱으로 빈자리를 가리키자 주성철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소파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불려 와서 그런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지난번에 노트북에서 찾아낸 인터넷 도박 프로그램 말이야, 자네가 있던 해커 부대에서 제작한 거라고 그랬지?”
“네.”
“그럼 말이야, 그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구동되고 있는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해킹할 수도 있겠군.”
기대 섞인 물음에 주성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보통 121부대에서 의뢰를 받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디도스 공격이나 필요한 개인 정보를 빼내는 데 용이하도록 몰래 뒷구멍을 만들어 두거나 저희만의 작동 코드를 심어 두곤 하니까, 그걸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해킹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잘됐군. 그럼 돌아가는 즉시 해킹을 시도해 보도록 해.”
“방호벽을 뚫고 나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언제든지 프로그램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도록 사이트를 장악해 두고 내부 정보를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파악해 둬. 특히 자금 흐름을 말이야.”
“맡겨 두십시오.”
주성철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대방이 절대 눈치채선 안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킹의 기본이니까요.”
‘게다가 그건 제 전공이지 않습니까?’ 하면서 주성철은 믿음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날 오후.
톤코릴리 철광산 지분 매각을 위해 프리타운을 떠나 북경으로 날아간 김덕현 전무한테서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차이나 몰리브덴하고 이야기를 해 봤나?”
-네. 그쪽 경영진을 만나 우리 측 요구를 전달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반응이 어때?”
-그리 좋지 않습니다.
혁권의 물음에 답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어두웠다.
어지간해서는 대놓고 그리 말하지 않을 텐데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역시 협상이 쉽지 않을 거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크게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제시한 것보다 20억 달러나 더 달라는 거였기에 차이나 몰리브덴 입장에서도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럴 테지.”
-문제는 매입 금액도 그렇지만 광산 지분을 70%나 사들일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최대 38억 달러에 지분은 60%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광산 운영권을 쥘 지분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군.”
-바로 보셨습니다.
차이나 몰리브덴의 요구대로 한다면 매각할 지분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액수에서도 상당한 손해를 봐야 했기에 그는 눈가를 찌푸렸다.
“철강 산업 구조 조정 때문에 다급한 처지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지분을 한꺼번에 많이 처분하려고 들자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태도를 바꿔 오히려 여유를 부리고 있습니다.
“끄으응.”
짧게 앓는 소리를 내뱉은 혁권은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다른 메이저 광산 업체들과 접촉을 해 보는 건 어때?”
돌아오는 대답이 회의적이었다.
-이야기를 해 봐야 되겠지만 아마도 차이나 몰리브덴보다 높은 액수를 받아 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무리 메이저 업체라고 해도 철광석 가격이 오르고 있는 걸 감안하더라도 수십억 달러짜리 M&A는 선뜻 나서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지분을 70%나 인수해야 됐기에 매입 가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지분 60%를 38억 달러에 판다면 우리가 손해잖아.”
시에라리온 정부를 설득시킨다고 해도 분명 10% 지분만큼 공평하게 돈을 배분해 주길 원할 것이기에 이쪽 몫에서 더 떼어 줘야 할 터였다.
그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잠시 말없이 머릿속을 정리한 혁권은 이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좀 더 협상을 해 보고 별다른 진전이 없으면 그만 철수하도록 해.”
그러자 김덕현 전무가 약간 당황한 반응을 보이면서 물었다.
-지분 매각을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조건이 너무 안 좋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럼 왜……?
“막말로 지분 매각이 안 되면 우리가 광산을 운영하면 되는 건데, 굳이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잖아. 급한 건 상대편이니까,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지자고.”
-그렇기는 합니다만…….
미련을 보이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협상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그냥 내 말대로 해.”
좋은 기회가 이대로 무산될까 봐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혁권의 뜻이 워낙 확고한 데다 김덕현 전무가 봐도 조건이 너무 나빴기에 지시를 받아들였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혁권은 소파에 몸을 묻고 낮게 혀를 찼다.
급할수록 돌아가랬다고 조급함을 버리고 여유를 가지기로 했지만 갑자기 끼어들어 지분 매각 협상을 어렵게 만든 시에라리온 정부의 행동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콘셉트는 웨딩드레스인데, 저번처럼 신인 여배우들 특집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아예 단독 샷만 열 장 정도 넣어 주신답니다.”
매니저인 도형석이 미리 잡지 에디터에게 들은 정보를 알려 주었다.
“거기다 지면 인터뷰도 들어갈 예정이라 시간은 좀 걸릴 테지만 메인 표지를 장식하는 거니까 잘해 보자고요. 어쨌든 사진 촬영은 소현 씨 전문이기도 하고.”
‘믿습니다.’ 하는 눈빛으로 도형석이 쳐다보자 소현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서울 외곽으로 꽤 많이 나가네요. 아직 멀었어요?”
“아, 이제 30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매니저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아직 여유롭다고 말했다.
“잡지 에디터는 콘셉트가 웨딩이니까 성당이나 스튜디오가 어떨까 했는데, 사진작가님이 그건 너무 진부하다고 거절하셨대요. 자기가 봐 둔 장소가 있는데 무조건 거기서 찍어야 사진이 잘 나올 거라며 고집했다네요.”
“어쨌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 확실하네요. 우리 점점 외진 곳으로 가고 있는 건 알죠?”
옆자리에 앉은 최현정이 초록색으로 가득한 바깥 풍경을 보면서 말했다.
서울에서 막 벗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빌딩이나 아파트 들이 많았는데 점점 도로를 달릴수록 산과 밭 들이 늘어났다.
휴게소를 지난 지도 꽤 되었으므로 슬슬 거의 다 와 가지 않을까, 싶은 시점에 도형석이 밴을 세웠다.
“와!”
이동하는 동안 좀이 얼마나 쑤셨는지 제일 먼저 차에서 내린 최현정이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산 중턱쯤 되는 높이까지 올라오자 돌연 탁 트인 평지가 나타났다.
양옆으로는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초록색 이파리를 가득 매단 채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어디선가 제멋대로 날아와 싹을 틔운 꽃들이 화사한 색감을 더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으므로 더욱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뽐내는 풍경이었기에, 소현은 왜 사진작가가 꼭 여기서 화보를 찍어야 한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현 씨 도착하셨습니다!”
미리 와서 촬영 준비를 돕고 있던 스태프 하나가 막 밴에서 내리는 소현 일행을 보고 외쳤다.
그러자 남자치고는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사내가 다가와 먼저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조명 설치가 덜 끝났으니까 그동안 의상 피팅이랑 메이크업부터 먼저 하시죠.”
“네. 그런데 이렇게 멋진 곳이 있었다니 깜짝 놀랐어요.”
“하하, 저도 답사를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꽃 농장이 있는데, 거기서 꽃씨가 날아온 모양이에요. 원래는 아무도 쓰는 일이 없어 비워 둔 공터가 어느새 멋진 야생 화원으로 변했다고 하더군요.”
소현은 사진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촬영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웨딩드레스면 치맛단이 기니까 옷이 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약식으로 간단하게 변형된 미니 드레스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와아, 죄다 명품들이네. 엘리 사브랑 지방시, 디올, 알렉산더 맥퀸까지 있어요!”
“세상에 레이스 엄청 섬세한 것 좀 봐.”
이걸 손으로 한 땀 한 땀 뜨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것처럼 스타일리스트인 방영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 달려 있는 진주 장식도 전부 수작업이겠지?”
“흐아, 어마어마하다, 진짜.”
두 사람이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감탄사만 연신 내뱉는 동안 잡지사 쪽에서 온 메이크업과 의상 협찬을 맡은 스타일리스트가 함께 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세요!”
“감사합니다.”
소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이내 바쁜 촬영 준비에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