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87
687
산둥제철과의 지분매각 협상이 모두 마무리되자 혁권은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다음 날 북경을 떠나기로 했다.
체크아웃 시간인 10시보다 조금 일찍 호텔을 나서서 곧장 공항으로 향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혁권의 발목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보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도통 움직이질 않는 앞차를 보면서 운전대를 잡은 수행원이 곤혹스러운 투로 말했다.
“교통체증이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군.”
“그러게 말입니다. 앞에 무슨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차라리 그랬으면 이해라도 하련만, 단순히 도로에 있는 차가 너무 많아서 막히는 것이었기에 더욱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른 중국인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지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우면서 느긋하게 음악까지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오토바이로 자동차 틈새를 빠져나가려던 사람과 시비라도 붙으면 여기저기서 응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 대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만으로도 괴로운데 비가 그치자 또다시 심해진 미세먼지와 황사 때문에 하늘까지 온통 누런색이니 이래서야 어디 사람이 살겠나 싶을 정도였다.
“서울도 공기가 안 좋다고 난리인데 여긴 더하군요.”
옆에서 김덕현 전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급속한 경제 발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닌지······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김덕현 전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래? 알겠네. 나중에 다시 전화하지.”
짧은 통화를 마친 김덕현 전무는 혁권을 돌아보고 말했다.
“대표님, 홍콩에 있는 은행 계좌로 산둥제철에서 보낸 지분 매각 대금이 모두 입금됐다고 합니다.”
약간 들떠 보이는 얼굴에 그는 여유 가득한 태도로 입을 뗐다.
“얼마가 들어왔나?”
“US 달러로 23억 5천만 달러입니다.”
“채권은 이번 주 안으로 발행해서 보내 주기로 되어 있지?”
김덕현 전무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설명을 했다.
“그렇습니다. 채권까지 전부 건네받으면 지분 매각 계약이 전부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수고했어.”
혁권의 말에 김덕현 전무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얼른 한쪽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전 그저 옆에서 보좌만 했지 이번 매각 협상은 대표님께서 거의 다 하신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나야 지시만 내렸고 어려운 일들은 김 전무가 다 처리했지 않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너인 혁권이 노력을 알아주자 김덕현 전무는 가슴 한쪽이 뿌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에라리온 정부 몫은 바로 이체해 주도록 해. 특히 코로마 대통령한테 가는 돈은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게 잘 처리하라고 당부해 놔.”
“깔끔하게 처리해 놓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독재자와 관련된 구린 돈이었기에 외부로 노출돼서 좋을 것이 없었다.
“남은 돈 가운데 10억 달러는 따로 쓸데가 있으니까 그대로 놔두고, 나머지는 회사 법인 계좌로 옮겨서 운영 자금으로 쓰도록 해.”
김덕현 전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10억 달러를 전부 다 회사 자금으로 쓰라는 말씀이십니까?”
솔루시두스에서 매각 협상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 톤코릴리 철광산 지분은 시에라리온 정부가 혁권 개인한테 넘긴 거였다.
물론 솔루시두스 역시 혁권의 개인 회사였기에 둘 사이의 경계가 애매하기는 해도 어찌 됐건 소유권은 그에게 있었다.
그 때문에 당연히 매각 대금 역시 혁권의 주머니로 다 들어가는 것이 맞았고, 실제로 개인 계좌로 입금을 받았다.
액수도 큰 데다 철광산 지분을 처분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었기에, 매각 대금 일부를 솔루시두스에 다시 투자할 거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이걸로 그동안 계획만 세워 놨던 프로젝트들을 어디 한번 마음껏 진행시켜 봐.”
단순히 회사 자본금을 늘리는 것을 넘어 원하는 대로 돈을 쓸 수 있는 재량권까지 주겠다고 하자 김덕현 전무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귀로 분명히 듣고도 못 믿겠다는 듯 다시 묻는 김덕현 전무의 모습에 혁권이 훗 웃어 보였다.
“내가 자넬 영입하려고 했을 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해 보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주겠다고. 자네 재능을 썩히지 않도록 말이야.”
“······!”
김덕현 전무는 입을 벌린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히 그리 말씀하시긴 했습니다만······ 설마 이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그는 점차 흥분되는 듯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만약 그때 혁권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퇴직한 다른 사람들처럼 바둑을 두거나 등산이나 하면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고 꽤 높은 자리까지 올랐던 덕분에 크게 사치를 부리지 않는 이상 돈 걱정은 안 해도 됐을 테지만, 그래도 활기를 잃고 무기력하게 지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게 쓸쓸히 중년의 끝을 보낼 뻔했으나 지금은 솔루시두스에 들어오는 행운을 잡아 예전보다 더욱 활기차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처음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머릿속에 담고 있던 일들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해 주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덕현 전무는 새삼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실감하며 기쁜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토록 하겠습니다.”
“더도 말고 딱 톤코릴리 철광산만큼만 대박을 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농담 섞인 혁권의 말에 김덕현 전무는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꼭 그러겠습니다.”
그사이 정체가 풀리자 조금씩 속력을 내기 시작한 승용차는 공항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어요?”
김종원 회장의 부인인 이명순이 왼편 소파에 앉은 박상빈 비서실장을 보며 물었다.
자택이었기에 비교적 통이 넓은 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편한 차림새였으나, 커다란 금 귀걸이와 보석이 박힌 반지 등 평소에 하고 다니는 장신구는 그대로 끼고 있었다.
그나마 옅어진 화장만이 집 안에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처럼 보였다.
“마음이 편하시진 않겠지만 그룹을 하루빨리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사모님.”
“하나······.”
이명순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박상빈 비서실장이 앞으로 몸을 당겨 앉으면서 재차 설득했다.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한 겁니다. 이대로 보고만 계신다면 경영권을 두고 형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아.”
그녀는 고민에 찬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영권 문제는 차명 계좌와 지분을 빼 준 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큰도련님이 다시 주도권을 되찾아 올 수는 있겠지만, 상황을 확실히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사모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박상빈 비서실장이 정색을 한 채 설득하고 있는 건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태일가스의 계열 분리였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태일가스를 태일그룹에서 떼어 내 별도의 기업으로 독립시켜 삼남인 김인철의 몫으로 넘겨주자는 거였다.
태일가스는 인천과 강원 지역에서 가스 제조, 배관 공급을 독점해 연매출 1조 원을 올리는 상당한 알짜배기 회사였다.
회복이 어려운 상태인 김종원 회장의 사후를 대비해 미리 상속 지분을 정리해 놓는다는 명분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태일가스를 김인철한테 떠안겨 태일그룹에서 완전히 내보내려는 의도였다.
이렇게 계열 분리가 되어 버리면 아무리 김종원 회장의 아들이라도 외부인이었기에 그룹 내부 경영에 개입하기가 어려웠다.
김인철과 중도파 임원들의 힘을 빼는 것과 동시에 장남인 김성균 사장 중심으로 후계구도를 확정지으려는 박상빈 비서실장의 노림수였다.
“둘 사이가 그렇게 안 좋은 건가요?”
이명순의 물음에 박상빈 비서실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이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
그녀 역시 유력한 재벌 가문의 자식이었기에 박상빈 비서실장의 말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야말로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재벌가의 경영권 다툼이었다.
왕좌에 앉지 못하면 그 순간 오너 일가란 허울뿐인 이름만 가진 채 승자의 아량에 기대서 살아야 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이명순을 보며 박상빈 비서실장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법이 그나마 형제 사이에 피를 덜 흘리면서 그룹 내부를 정리하고 경영권을 안정시키는 겁니다.”
거듭된 설득에 이명순은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둘 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이건만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니.
이명순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알았어요. 박 실장님 말대로 하죠.”
그러자 박상빈 비서실장은 기뻐하는 대신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식한테 큰 좌절을 줘야 되는 입장이 되어 버린 이명순의 앞에서 제 뜻대로 되었다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이명순은 손끝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살살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시 정리해서 다음에 볼 때 얘기하도록 하죠. 지금은 제가 몸이 별로 좋지 않군요.”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이명순에게 박상빈 비서실장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회사에 출근해 양복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고는 자신의 책상에 앉은 김인철은 뒤따라 들어온 차민성 대리가 전해 준 소식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본가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간 거야?”
“그것까지는 파악을 못 했습니다만 박상빈 비서실장님이 다녀가고 나서 사모님께서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계속 신경에 거슬리는 짓만 하는군.”
눈을 사납게 치켜뜬 채 이를 부드득 갈던 김인철은 고개를 들어 책상 앞에 서 있는 차민성 대리를 보며 말했다.
“이 변호사 일은 어떻게 됐어?”
“본사 법무팀과 비서실 인원 일부를 차출해 별도의 팀을 꾸리고 잠실에 사무실을 하나 빌렸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차명 계좌에 들어 있는 비자금이 얼마나 된다고 했지?”
깍지를 낀 김인철이 몸을 뒤로 기대면서 묻자 차민성 대리가 얼른 대답했다.
“파악된 것만 4,600억이 조금 넘습니다.”
숨겨 둔 비자금도 많았지만 더 골치 아픈 건 차명으로 된 주식들이었다.
아직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했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겨우 맞춰 놓은 균형이 큰형 쪽으로 쏠려 버릴지도 몰랐다.
그리되기 전에 빨리 대응책을 찾아 내야했다.
“뒤를 캐 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그렇지 않아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쓸 만한 걸 하나 찾아냈습니다.”
“그게 뭐야?”
상체를 바로하며 김인철이 관심을 보였다.
“강남클럽 새끼 마담 출신을 세컨드로 두고 있었습니다.”
“공직에 있다면 모를까 그걸 가지고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거야.”
심드렁한 반응에 차민성 대리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둘 사이에 혼외자까지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혼외자라고?”
“예. 올해로 세 살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결혼을 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본처 사이에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잠시 생각을 한 김인철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쪽을 좀 더 파고들어 봐. 괜찮은 게 나올지도 모르겠군.”
“알겠습니다.”
차민성 대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을 때 김인철의 책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작게 울렸다.
“음?”
스마트폰을 들어 상대방의 이름을 확인한 그는 별일도 다 있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그만 나가 봐.”
예, 하고 차민성 대리가 조용히 사무실을 나가자 김인철은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어머니?”
머릿속으론 방금 전 차민성 대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리 말하자 이명순이 곧장 답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면 본가로 좀 오거라.
“하실 말씀이라도?”
-그건 와서 이야기를 해 주도록 하마.
“······네. 퇴근하면 바로 가겠습니다.”
-그럼 바쁠 테니 이만 끊으마.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김인철은 어쩐지 평상시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