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27
727
팜플릿에는 배수량 130톤 규모의 소형 잠수함에 대한 자세한 제원과 설명이 아랍어로 적혀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이름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았지만 첨부된 사진에 찍혀 있는 건 분명히 북한의 연어급 잠수함이 틀림없었다.
핵과 탄도미사일을 공동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란에 똑같은 연어급 잠수함을 수출한 적이 있긴 했어도 설마하니 소말리아 해적들한테 판매할 생각을 할 거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잠수함 한 척당 2,700만 유로(한화로 356억 원)에 운용 방법을 따로 교육해 주고 필요하다면 어뢰까지 판매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제안을 했다는군.”
단순히 구매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아니라 이건 아주 작정을 하고 잠수함을 팔려는 거였기에 혁권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설마 잠수함이 팔린 건 아니겠지요?”
“가격이 비싼 만큼 선뜻 매입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 하지만 잠수함이 있다면 다국적군의 감시를 피해 물속에 몰래 숨어 있다가 돈이 되는 대형 유조선이나 상선을 습격해 나포할 수 있으니 소말리아 해적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지 않겠나?”
“그렇군요.”
가격이 비싸기는 했지만 해적질을 제대로 한 번만 성공시키면 수천만 유로의 돈을 받아 낼 수 있는 걸 생각하면 구매가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거친 바다에 달랑 보트 하나만 타고 나가는 것보다 안전한 데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국적군의 감시까지 피할 수 있고 모선母船으로 이용해 한꺼번에 여러 번의 해적질을 할 수도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런 걸 고려하면 정말로 북한 잠수함을 구매하는 해적이 나올지도 몰랐다.
빠르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고개를 들어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압둘라흐만을 보며 입을 뗐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구먼.”
“이 팜플릿을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압둘라흐만은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 봤자 쓸데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게.”
“고맙습니다.”
그가 손을 까딱이자 뒤편에 서 있던 백성균이 얼른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탁자에 놓인 팜플릿을 챙겼다.
“자, 그럼 골치 아픈 이야기는 이쯤하고 저녁 식사나 하러 가세. 함께 마시려고 89년산 도멘드 라 로마네 꽁띠도 준비해 놨네.”
“이거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데요.”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전문 요리사가 정성들여 만든 저녁을 먹고는 최고급 와인을 나눠 마시면서 밤늦게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압둘라흐만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호텔로 돌아온 혁권은 아테네에 있는 함단한테 위성 전화를 걸었다.
-북한제 잠수함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중국인 브로커를 앞세워서 소말리아 해적들한테 소형 잠수함을 판매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있는데, 사실인지 은밀히 확인해 보고 가능하다면 루트도 파악해 봐.”
-알겠습니다.
압둘라흐만이 준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기에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아. 그리고 볼로스호가 원유 선적을 다 끝내고 잠시 뒤에 하르그섬을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볼로스호는 이번 거래를 위해서 임대한 ULCC급 초대형 유조선들 가운데 한 척의 이름이었다.
“그러면 이제 원유 선적이 다 끝난 건가?”
-네. 볼로스호가 마지막 배였습니다.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고 해도 언제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몰랐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혁권의 얼굴에 그때서야 조금 안도한 기색이 떠올랐다.
-처음 출발한 시 프린세스호와 유조선 3척은 이미 오만 만을 빠져나와 아라비아해를 지나는 중이니까 일주일 뒤에는 목적지인 울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원유를 전부 다 DK 정유에 넘길 때까지 계속 긴장을 풀지 말고 거래가 모두 끝나면 미리 지시해 둔 대로 스텐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페이퍼 컴퍼니를 모두 없애 버리도록 해.”
-이미 준비를 다 끝내 놨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좋아. 중간에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예.
위성 전화기를 귀에서 뗀 혁권은 한쪽에 서 있는 백성균에게 시선을 주며 지시를 내렸다.
“한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비행기를 준비시켜.”
“옛, 보스.”
물자를 한 차례 더 이란에 공급해 줘야 했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평화협정 문제는 처음 이란 정부를 설득해 주는 걸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 끝냈기에,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날 오후 혁권은 부하들과 함께 대기 중이던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두바이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얕은 잠에 빠진 그를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으음, 하고 작게 신음을 흘린 혁권이 한쪽 눈만 떠서 옆을 바라보니 백성균이 위성 전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주무시고 계신데 죄송합니다, 보스.”
“급한 연락이야?”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깨우지 않을 것을 알기에 혁권이 찌뿌둥한 몸을 뒤척이며 뒤로 눕혔던 좌석을 제자리로 돌렸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에게서 온 전화입니다.”
“이리 줘.”
혁권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바꿨습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혹시나 미국하고 진행 중이던 평화협정 조율이 틀어진 건 아닌지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르그섬 저유고에 쌓여 있는 원유를 조금 더 빼내야 될 것 같은데, 그쪽에서 맡아 줄 수 있겠소? 대금은 이번처럼 현물로 대신하는 조건이오.
뜻밖의 제안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혁권은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평화협정을 시작하기로 한 겁니까?”
-후후후. 그렇소. 군사기지를 국경에서 50킬로미터 뒤로 물리는 대신 민병대의 시리아 주둔을 묵인하고 원유 수출 금지를 한 달간 유예시키기로 미국 정부와 합의를 했소.
“그랬군요. 합의가 잘됐다니 다행입니다.”
-이번 거래를 준비하다가 모사드로부터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소.
“약간의 충돌이 있었죠.”
혁권은 마치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는 투로 대답했다.
-악명 높은 모사드 킬러들을 박살 내 놓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니 역시 배포가 크구먼. 그것도 그렇지만 습격까지 당해 놓고도 차질 없이 거래를 진행시키다니 정말 대단하오.
“문제가 생긴다면 그거야말로 모사드가 의도한 대로 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신용을 지키는 것이 거래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눈엣가시 같은 모사드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여 줬기 때문인지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목소리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제안을 하는 거요. 어떻게, 할 의향이 있소?
이번처럼 수억 달러씩 차익을 남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쪽이 꽤 유리한 조건이었기에 일종의 특혜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먼저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대가 알아서 챙겨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해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뿐이지요.”
-그럼 거래를 받아들인 걸로 알고 구체적인 내용은 주한 이란 대사관을 통해 알려 주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오더를 추가로 따낸 것도 기뻤지만 이렇게 따로 배려를 해 줄 정도로 이란의 군부 실세인 술레이마니 사령관하고 친분을 맺게 된 거야말로 가장 큰 성과였다.
다음 날 새벽, 서울에 도착한 혁권은 피로를 다 풀기도 전에 찾아온 지석영 변호사를 맞이했다.
“지금 기소유예라고 했소?”
까슬해진 피부를 한 손으로 쓸어내린 혁권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쳐다보자 맞은편 소파에 앉은 지석영 변호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정리하기로 검찰 수뇌부에서 결정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마약 투약에 밀수까지 한 중범죄인 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찰도 무조건 기소를 할 거라고 하지 않았소?”
“분명 분위기가 그랬는데 아무래도 김성균 사장 측에서 청와대와 정치권에 손을 쓴 모양입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지석영 변호사의 설명을 계속 들었다.
“초범인 데다 피의자가 죄를 대부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할 뿐만 아니라 구속이 되면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반영했다고 하는데, 그건 명분일 뿐이고 검찰 내부에서 은밀히 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윗선에서 적당히 마무리를 지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마약 투약은 그렇다고 쳐도 밀수는 쉽사리 덮기 어려울 텐데.”
“밀수에 대해서는 혐의를 부인하며 직원 개인의 일탈이라고 선을 긋고 해당 직원 역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자백을 하는 바람에 죄목에서 빠졌습니다.”
“그걸 믿어 줬단 거요?”
지석영 변호사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원래 이야기란 끼워 맞추기 나름 아닙니까?”
“이번엔 빠져나오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일반인이었다면 적어도 10년 형부터 때리고 시작했을 사건인데 말이야. 역시 태일그룹의 힘이 대단하군.”
“김종원 회장 때부터 이어져 오는 끈끈한 인맥이 아직까지는 작동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물론 뒷돈도 많이 들어갔겠지만 말입니다.”
이만한 사건을 무마시키려면 아마 정치권은 물론이고 검찰과 언론에까지 막대한 비자금이 건네졌을 터였다.
아예 기소가 안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재판까지 가더라도 실형이 선고되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에 혁권은 금방 상황을 받아들였다.
“김인철이 끝까지 물고 늘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물러선 모양이군.”
“위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한 이상 지저분하게 일을 끌고 가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이미 이번 일로 김인철이 얻을 수 있는 건 대부분 챙긴 상황이기도 하고요.”
“하긴.”
지석영 변호사의 말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사법 처리를 피하기는 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김성균 사장은 상당히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어도 말 그대로 범죄 혐의가 충분히 확인됐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검사가 기소를 하지 않고 용서해 주는 거였기에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무리하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낸 데다 도덕적으로 흠집이 난 상황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해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는 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가능한 한 외부 노출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근신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거기다가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박상빈 비서실장을 잃은 건 김성균 사장 입장에서는 정말 한쪽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듯한 충격이었다.
이에 반해 김인철은 열세를 만회하고 그룹 내에 기반을 다질 중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제로 김성균 사장 측이 어떻게든 사법 처리를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김인철은 물밑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빠르게 키워 나가고 있었다.
“바로 발표하면 여론이 시끄러워질 테니까 먼저 검찰에서 쥐고 있는 다른 사건들을 터트려서 이목을 흐리고 난 뒤에 슬그머니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질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혁권이 코웃음을 쳤다.
“항상 해 왔던 수법이로군. 흔해 빠졌지만 그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지.”
지석영 변호사 역시 동의하는 얼굴로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