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64
764
#사막 횡단
너무 뜻밖의 이야기라 혁권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만수르 회장을 보며 말했다.
“제가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농담이 아니라는 듯 만수르 회장은 정색을 하고 그를 쳐다봤다.
“날 봐서라도 일을 맡아 주게.”
난감해하던 혁권은 이내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대신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네.”
“물론입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만수르 회장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부패와 악습 청산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이번 일로 왕세자가 진짜로 노리고 있는 건 구금된 유력 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규모의 재산이네. 이들을 압박해서 강제적으로 재산을 내놓게 만들어 부족한 재정을 메우려는 거지.”
그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재정이 부족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석유 패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세일 오일 업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우디아리비아를 중심으로 한 OPEC(석유수출국기구)이 대규모 증산을 통해 국제 원유 가격을 한순간에 폭락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국제 유가를 원가보다 낮게 떨어뜨리면서 원하던 대로 세일 오일 업계에 큰 타격을 줬지만, 고유가 때 늘어난 재정 지출을 효율적으로 줄이지 못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산유국 대부분이 천문학적인 재정 손실을 입고 말았다.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거기다가 왕정 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누르기 위한 선심 정책을 펴는 데 막대한 재정을 지출하고,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국제사회로 복귀한 이란과 중동 맹주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면서 다시금 국고가 크게 축났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부국이라도 수입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지출이 수년간 계속되자 재정이 휘정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서 수백억 달러 규모의 국채를 사상 처음으로 발행했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라면 왕세자하고 타협을 하겠지만 요구가 너무 과한 모양일세.”
“왕세자 측에서 원하는 것이 얼마이기에 그렇습니까?”
“가진 재산의 8할을 달라고 했다더군.”
혁권이 미간을 찡그렸다.
“확실히 수용하기 힘든 요구이긴 하군요.”
“고문을 가하거나 처우가 나쁜 건 아니지만 언제 석방된다는 기약 없이 벌써 넉 달 넘게 구금되어 있다 보니 조금씩 한계가 오는 모양이야. 실제로 꽤 많은 숫자가 압박에 굴복해 요구대로 재산을 내놓고 풀려나기도 했고.”
아무리 호화 호텔에서 불편 없이 지내는 거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마음껏 살아온 이들한테는 제한된 공간에, 언제가 끝이라는 희망도 없이 계속 갇혀 있어야 되는 건 상당한 정신적 압박이 될 터였다.
거기다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왕세자가 언제까지 신사적으로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한몫했다.
최악의 경우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재산을 전부 강제로 몰수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빈알둘만 회장과 다른 친우들도 왕세자하고 협상을 할 생각인 것 같더군. 하지만 그 전에 몰래 은닉해 둔 재산을 국외로 반출시키려고 하는데 그걸 자네가 해 줬으면 하네.”
“가지고 나오려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데 그러는 겁니까?”
“얼추 50억 달러 정도 되는 모양이야.”
“······!”
액수를 들은 혁권은 눈을 크게 떴다.
한화로 5조 7천억 원이 넘는 거액이었으니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걸 다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럼······?”
“국채와 금괴 같은 현물이 절반쯤 되고 나머지가 현금일세.”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만수르 회장과 달리 혁권은 내심 침음을 내뱉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50억 달러나 되는 거액이면 부피가 얼마나 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리 재산 일부를 은닉해 놨을 정도면 왕세자 측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는 건데, 어쩌자고 외국이 아닌 위험한 사우디아라비아 국내에 놔둔 겁니까?”
“그 사람들이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겠나. 하지만 왕세자가 먼저 선수를 쳐서 주변에 감시를 붙이는 바람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그만 일을 당하고 만 걸세.”
한마디로 운이 없었던 거였다.
혁권이 머리를 절래 흔드는 걸 보며 만수르 회장이 한쪽에 서 있던 자드란 비서실장에게 손짓을 했다.
“그걸 가져오게.”
“예.”
자드란 비서실장은 실례하겠다는 듯 두 사람에게 허리를 살짝 굽혀 보이곤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자드란 비서실장이 저택의 고용인들과 함께 돌아왔다.
“조심해서 운반하게.”
엄한 얼굴로 자드란 비서실장이 재차 주의를 주자 고용인들은 흡사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다루는 것처럼 신중하게 물건을 옮겼다.
하얀 천이 덮여 있으나 드러나는 윤곽으로 볼 때 무슨 그림이나 액자 같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젤Easel에 각각 물건을 하나씩 올려놓고 고용인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혁권이 물었다.
“이게 뭡니까?”
“아부다비 미술관에 대해서 자네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원유와 천연가스가 고갈된 이후를 대비해서 아부다비를 국제적인 문화, 관광 도시로 만들기 위해 왕실에서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브르 아부다비 미술관이었다.
이름에 나와 있는 대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협약을 맺어 30년간 브랜드와 소장품 대여 그리고 전시 노하우를 전수받기로 했는데, 여기에 들어간 돈이 9억 7,400만 유로, 한화로 1조 3천억 원에 달했다.
그야말로 오일 머니의 힘을 그대로 보여 준 일이었다.
이곳에 전시할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그가 런던 미술품 경매장이 가져온 카다피 컬렉션을 만수르 회장이 구매하면서 서로 인연을 맺게 됐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빈압둘만 회장과 다른 친우들이 아부다비 미술관에 임시로 대여해서 전시 중이던 작품들 가운데 두 개일세. 일을 맡아 준다면 이걸 주겠다고 하더군.”
만수르 회장이 시선을 주자 어느새 손에 흰 장갑을 낀 자드란 비서실장이 액자에 씌워진 천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액자에 넣어진 서양화 두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화 살바토르 문디요. 그리고 옆에 있는 건 피카소의 작품이오.”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방금 거론된 화가들의 작품이 경매에서 상당한 거액에 거래된다는 건 혁권도 알고 있었다.
“살바토르 문디는 빈알둘만 회장이 몇 년 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5,030만 달러에 낙찰 받은 작품이고 피카소 그림 역시 시장에 내놓으면 수천만 달러를 호가할 거요.”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그는 숨을 죽인 채 새삼스러운 눈길로 두 그림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혁권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회장님이 가지신 힘이라면 충분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몰래 은닉 재산을 가져올 수 있을 텐데, 이런 고가의 미술품을 줘 가면서 굳이 저한테 일을 시키려는 이유가 뭡니까?”
시선을 받은 만수르 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조금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 하지만 나니까 더 나설 수가 없는 걸세.”
“······?”
“아랍에미리트 부총리이자 아부다비 왕자인 내가 이 일에 개입했다는 걸 만약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서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말뜻을 알아차린 혁권이 얼굴을 굳혔다.
“그 즉시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악화되겠군요.”
“그걸로 끝난다면 다행이지. 자칫 잘못하면 이걸 꼬투리로 해서 무력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네.”
“양국 다 아랍연맹의 일원인 데다 예멘에 군대까지 함께 파견해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설마 하는 혁권과 달리 만수르 회장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후티 반군을 상대할 세력으로 하디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우린 남부과도위원회(STC)을 밀고 있기 때문에 이걸로 서로 감정이 쌓여 있는 상황이라 왕세자가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네.”
애초 예멘 내전 개입은 시아파인 이란이 지원하는 후티 반군을 제압해서 중동의 맹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랍에미리트가 엉뚱하게 남부과도위원회에 막대한 군비를 지원하면서 고춧가루를 뿌리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예멘과 시리아 내전 양쪽에 개입을 하고도 어마어마한 군비만 소모하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망신만 당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아랍에미리트를 공격하는 건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그런 혁권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만수르 회장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문제가 있는데 IS 놈들이 은닉 재산을 노리고 있다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친우들의 측근 가운데 IS에 협조하는 인물이 있었네. 누군지 잡아내기는 했지만 이미 은닉 재산에 대한 정보를 넘긴 뒤였어.”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에 혁권은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었다.
“수십억 달러의 자금이 옮겨질 거라는 걸 알았으니 유전 지대를 잃고 자금이 부족해진 IS가 가만히 있지 않겠군요.”
“그럴 걸세.”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눈을 피하고 악랄한 IS를 상대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국외로 반출시켜야 된다니 대가로 준다는 그림 두 점이 결코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보니 사지死地로 가는 일이었군요.”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자네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혁권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수르 회장과의 관계와 보상으로 제시한 두 거장의 그림이 눈에 걸렸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그가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만수르 회장은 딱히 재촉하지도 않고 느긋하게 생각해 보라는 듯 혼자서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차가 식은 것을 깨닫고 다시 밑으로 내려놓자 자드란 비서실장이 눈치 빠르게 따뜻한 것으로 바꿔 주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만수르 회장이 차를 반쯤 마셨을 때쯤 혁권이 고개를 들었다.
“저한텐 너무 어려운 결정이군요.”
“그래서 생각할 시간을 줬지 않나. 만약 일을 맡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 때문에 불이익을 주진 않겠네.”
한입으로 두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니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처럼 되지는 않을 거였다.
상대의 시선을 마주 쳐다보면서 혁권이 차분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일을 맡지요.”
“하하하. 고맙네. 이번에 도움을 준 건 잊지 않겠네.”
원하던 대답을 들은 만수르 회장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대신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지 말해 보게.”
“가져오는 은닉 재산 가운데 5천만 달러를 제 몫으로 주십시오.”
“흐음.”
만수르 회장이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는 가운데 혁권의 말이 이어졌다.
“위험부담이 큰 만큼 데리고 갈 부하들한테 그 정도 보상을 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네.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 리야드에 연락해서 돌아오는 대답을 알려 주도록 하지.”
“그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