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24
824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 초[永田町].
내각정보조사실 수장인 시게루가 바짝 긴장한 채 다다미방 방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총리관저였기 때문이었는데 눈앞에는 기모노를 입은 에이사쿠 총리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자세로 찻잔에 입을 대고 있었다.
이 방에 불려 온 지도 벌써 5분이 넘게 지나가고 있었건만, 총리는 맞은편에 있는 시게루에겐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여유롭게 차를 즐길 뿐이었다.
마치 일부러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좌를 하고 앉은 다리가 슬슬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시게루가 몰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찰나 갑자기 총리가 불쑥 말을 던졌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건 잘 처리했겠지?”
온화한 말투에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해 보이는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한기가 돌았다.
그 이유는 시게루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 혹은 도구로만 여기고 있는 듯한 차가운 시선.
정치에 몸 담은 이후부터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 경험했으며 어려운 상황도 여러번 헤쳐 나온 경험이 있는 시게루였으나 총리의 이런 눈빛만은 견디기 힘들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긴 소매 옷을 입은 덕분에 그 모양새가 에이사쿠 총리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시게루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후쿠시마 원전과 관련된 악의적인 인터넷 글들은 모두 지우거나 검색어 상단에 노출되지 않도록 은밀히 손을 썼습니다.”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일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몇 달 뒤면 실시될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 역사상 최악의 인재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이슈로 떠오르는 건 여당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에이사쿠 총리는 자신이 경제산업성 장관으로 있을 때 후쿠시마 원전의 운영 기한 연장을 직접 승인해준 원죄가 있었기에 더욱 이 일이 거론되는 것에 민감했다.
“인터넷이 문제야. 예전에는 신문을 통해 정제된 발언과 기사 들이 실려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제 마음대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떠들어 대니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나라가 혼탁해지는 거야.”
“맞는 말씀입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시게루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 에이사쿠 총리는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참의원 선거가 끝나면 내각에 한자리를 내줄 테니 입각入閣할 준비를 해 놓도록 하게.”
입각이라는 말에 시게루는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걸 애써 참으면서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해 총리님을 보필토록 하겠습니다.”
충성 맹세를 하는 시게루의 모습에 에이사쿠 총리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 나가 보도록 해.”
“예.”
밖으로 나온 시게루는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직권을 남용해 몰래 온갖 더럽고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며 에이사쿠 총리의 뒤치다꺼리를 해 준 이유가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생겼으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다음 재보궐 선거 때 참의원 공천 정도를 해 줄 거라 예상했는데, 입각이라니 이건 단숨에 권력 핵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다.
잔뜩 고무된 얼굴로 총리 관저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상의 안쪽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벨이 울렸다.
우우웅.
스마트폰을 꺼낸 시게루는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풀어져 있던 얼굴을 바로 바꿨다.
관저에 들어와 에이사쿠 총리와 독대를 하기 전에 무세베니 장군하고 손을 잡은 암거래상을 처리하는 작전을 벌인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콩고 민주공화국의 희귀 자원을 확보하는 건 내각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이었기에 시게루도 진행 상황을 각별히 챙기고 있었다.
“일은 잘 끝났나.”
-그, 그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계획대로 작전이 끝났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시게루는 말까지 더듬으면서 당황스러워하는 우에다의 목소리에 눈썹을 좁히며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문제라니!”
스마트폰을 움켜쥔 시게루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계획대로 목표가 모습을 드러내자 바로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다그치듯 묻자 우에다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결과를 이야기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대의 저항이 너무 거세······ 작전이 실패했습니다.
“뭐야!”
시게루의 얼굴이 대번에 와락 구겨졌다.
“기습을 해 놓고도 오히려 당했다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한쪽에 서 있던 총리 공관 경호원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시게루는 답답한지 목에 맨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그럼 목표를 제거하지 못한 거야!”
-······예.
“정말 미치겠군.”
눈치를 살피면서 잠깐 머뭇거리다 우에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교전 중에 킬러들과 함께 블랙 요원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시게루가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을 벌였다는 것이 드러나진 않겠지?”
무력까지 쓴 비밀 작전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짓이라는 걸 들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일부러 저희하고 연관이 없는 킬러를 썼고 희생된 블랙 요원도 신분이 철저하게 세탁되어 있으니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시게루가 인상을 쓰면서 말을 거칠게 쏘아붙였다.
“애초에 일을 똑바로 처리했으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잖아!”
-죄송합니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쯧.”
짧게 혀를 찬 시게루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참으면서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남은 인원들은 어떻게 됐어?”
-예정된 계획대로 어선을 타고 탈출 중입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잠시 생각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기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하도록 해.”
우에다는 말뜻을 바로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즉시 플랜 B를 실행시켜.”
-예.
“또 일을 망치지 말고 똑바로 처리하란 말이야.”
-······네.
“두번 기회는 없으니까. 명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차갑게 말을 내뱉은 시게루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총리 관저를 나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같은 시각.
혁권은 아테네를 떠나 루마니아 갈리치로 향하는 비즈니스 제트기 안에 탑승해 있었다.
외부에 사실이 그대로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국회의원인 케카스를 비롯해 그동안 관리를 해 온 여러 실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헬리콥터 착륙장에서 있었던 습격을 단순한 마피아들 간의 세력싸움으로 꾸미고 사건을 축소시켰다.
그렇다고 해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데다가 남은 킬러들이 더 있을 수 있었기에 예정을 앞당겨서 곧장 그리스를 벗어나기로 했다.
살갗이 심하기 찢어진 오른쪽 관자놀이 부분은 두툼한 거즈를 붙여 놓았는데, 정해진 시간마다 소독을 해 주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임시로 스튜어디스가 처치를 맡았다.
“아프진 않으세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스튜어디스가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깔끔하게 상처 부위를 정리해 주고는 깨끗한 거즈와 밴드를 꺼내 마무리를 지었다.
의외로 익숙한 손놀림이다 싶었는데 비행기 스튜어디스들은 의무적으로 응급처치 교육도 받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내곤 속으로 납득했다.
“다 됐습니다.”
구급상자를 들고 스튜어디스가 자리를 뜨자 하킴이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그래.”
이번엔 정말로 위험했다.
때마침 선박의 뱃고동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혹은 갈매기 떼가 날아오르든 말든 관심을 두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혁권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연이 겹친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이지, 아니면 어디 이름 모를 병원의 영안실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보스, 당분간은 불편하셔도 경호 인력을 2배로 늘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는 입술 사이로 짓씹듯이 내뱉었다.
“중요한 건 이번 일을 주도한 놈들이 어느 쪽인지 알아내는 거지.”
눈동자에 분노가 이글거렸는데 조금만 운이 없었다면 목숨을 잃어버릴 뻔한 데다가 이번 습격으로 열 명이 넘는 부하들이 죽거나 다쳤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위스키를 벌컥 마시고는 거칠게 내려놓은 혁권은 마주앉아 있는 하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뭐 좀 나온 것이 있어?”
시선을 받은 하킴은 차분히 대답했다.
“현장에서 사살된 습격자들 가운데 몇 명의 신원이 확인됐는데, 돈을 받고 움직이는 킬러였습니다. 주로 동유럽 출신들이었지만 국적과 나이 등이 다양해서 서로 연관성을 없어 보입니다.”
냉전이 끝나고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경제가 무너지자 무수히 많은 군과 정보기관 출신자들이 해고를 당해 거리로 내몰리면서 용병으로 활약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출신을 가지고 어떤 조직을 특정하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그 말은 모사드나 MI6뿐만 아니라 다른 마피아 조직들이 이권을 노리고 벌인 짓일 수도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압둘라흐만과 만수르 회장 같은 우군도 있었으나, 사업을 확장시키고 그가 점차 거물이 되어 가면서 필연적으로 많은 적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낮게 침음성을 흘리는 혁권을 보며 하킴이 말을 이었다.
“쓸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동원해서 조사를 하고 있으니 곧 배후가 누군지 밝혀낼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혁권이 칼날 같은 말투로 쏘아붙였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걸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힌 혁권은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다른 걸로 화제를 바꿨다.
“수송기는 이틀 뒤에 오기로 되어 있다고 그랬지?”
“네. 이반이 조종하는 기체까지 합쳐서 모두 8대를 한꺼번에 띄울 계획입니다.”
“문제가 없게 잘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에라리온에서 태영준 과장이 직접 두 개 팀을 이끌고 와서 출발 전에 합류할 예정입니다.”
“잘됐군.”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굳어 있던 표정을 살짝 펴며 반색했다.
무세베니 장군이 지휘하는 남부군이 도착 지점인 콜웨지 공항을 확보해 놓기로 되어 있었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만큼 막연히 상대만 믿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원 특수부대 출신으로 군사작전에 능한 태영준과 경비 팀 대원들이 함께 간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