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30
830
아테네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 쇼핑센터 지하 주차장에 벤츠 마이바흐 방탄 차량 한 대가 앞뒤로 짙게 선팅이 된 쉐보레 서버밴 경호 차량에 둘러싸인 채 들어왔다.
천천히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페인트로 A7이라고 크게 적힌 기둥 옆에 잠깐 멈추어 섰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기둥과 기둥 사이, 그림자가 져 어두운 구석 틈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는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자동차 가까이로 다가와 지극히 자연스럽게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미끄러지듯 다시 출발한 벤츠 승용차는 경호 차량과 함께 곧장 좌회전을 해서 비탈길을 올라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거리에는 남녀노소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 사이를 헤치고 나온 차량 행렬은 큰길로 들어섰다.
광장에 세워진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차창 너머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가운데,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혁권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명단은 가지고 왔소?”
“네.”
작게 머리를 끄덕인 사내는 코트 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하나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서 펼치자 10여 명쯤 되는 사람의 이름과 신상명세가 상당히 자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바로 그리스에서 은밀히 활동하고 있는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요원 명단이었다.
옆에 앉은 사내는 국정원 블랙 요원으로 서울에 있는 심인성 과장의 지시를 받고 이걸 전달해 주기 위해 접촉을 가진 거였다.
종이를 살펴본 혁권은 시선을 들어 사내를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 것 같소.”
어깨를 으쓱이며 사내가 대답했다.
“유럽의 관문이라 불릴 정도로 해상 교역량이 많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기에, 일본 정부가 그만큼 아주 중요하게 관리한다는 뜻이 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혁권이 눈을 번뜩이면서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만약 이들이 전부 제거된다면 일본 정부에 상당한 타격이 되겠군.”
사내는 그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한순간 정보 수집 활동이 마비되는 거니 분명 그렇겠지요.”
“흠.”
혁권이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가 무언지 짐작한 사내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쪽에서 명단을 받았다는 건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오.”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종이를 다시 접어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작은 USB 메모리를 하나 사내한테 넘겨줬다.
“약속한 물건이오.”
안에는 UN 제재를 피해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몰래 북한산 무기를 밀수출하고 있는 인물과 회사들에서 대한 자료가 들어 있었다.
원하는 정보를 받는 넘겨주기로 심인성 과장하고 거래를 한 거였는데,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되겠지요?”
“의심스러우면 지금 바로 확인을 해 보시오.”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여유롭게 말을 받자 사내는 머리를 가볍게 가로젓고는 USB 메모리를 집어넣었다.
“아닙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괜찮소.”
혁권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로 뒷좌석 팔걸이를 열어 반으로 접힌 두툼한 서류 봉투를 하나 꺼내 건넸다.
“받으시오”
예상치 못한 물건에 사내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뭡니까?”
그러자 혁권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돈이오. 현금으로 준비했으니까 쓰는 데 불편한 일은 없을 거요.”
“······.”
사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안 주셔도 됩니다.”
거절에 혁권이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면서 봉투를 가죽으로 된 팔걸이에 올려놨다.
“다른 의도 없이 그냥 해외에 나와서 나라를 위해 고생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주는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소.”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가 슬그머니 봉투를 집어 드는 걸 보며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바로 했다.
“여기서 잠깐 세워.”
“예.”
운전대를 잡은 부하가 짧게 대답을 하고는 속도를 천천히 줄여 인도 옆에 승용차를 멈춰 세웠다.
“기회가 있으면 또 보도록 합시다.”
살짝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한 사내는 그대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승용차가 다시 움직이자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듯이 기댄 혁권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하킴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돌아가면 함단한테 바로 명단을 넘겨주고 지시한 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된 가게와 거리를 오가는 많은 인파들이 차창 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봐. 오카다, 퇴근 시간도 다 됐는데 근처 술집에서 한잔하고 들어가는 게 어때?”
맞은편 있던 동료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팔을 윗도리에 집어넣으면서 묻자 오카다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가고 싶은데 아직 일이 남아서 안 되겠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먼저 갈 테니까 내일 보자고.”
“그래.”
동료와 함께 현지인 직원들도 모두 퇴근하고 넓은 사무실에 혼자만 남게 되자 오카다의 표정이 일순 차갑게 변했다.
그러고는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서 숨겨 둔 윈도 창을 열고 하던 일을 계속했는데, 모니터에는 그리스 정부의 핵심 인사들에 대한 동향과 최근 정치 상황을 조사한 것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해운회사 직원이 작성하고 있을 만한 문건이 절대 아니었다.
오카다의 진짜 신분은 일본 해운사 직원으로 위장해 그리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내각정보조사실 블랙요원이었다.
얼마 뒤, 작업을 전부 끝낸 오카다는 이중 암호를 걸어 저장하고는 인터넷 비밀 계정으로 파일을 전송했다.
제대로 전송이 이루어진 걸 확인하고는 증거가 남지 않도록 문서 파일은 물론이고 인터넷 기록까지 깨끗하게 다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자리를 정리하고 문단속까지 한 뒤에 사무실을 나왔다.
한쪽 손에 서류 가방을 든 오카다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반대편 복도 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같은 층에 있는 다른 사무실 사람들도 벌써 다 퇴근하고 없는지 문이 닫혀 있고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잠시 기다리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빈 엘리베이터에 혼자 올라탄 오카다는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 1층 버튼을 누르고 한쪽 구석에 섰다.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하자 어느새 밤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추어 서더니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힐끔 사내들을 쳐다본 오카다는 이내 신경을 끄고 고개를 바로 했다.
드르르륵.
이내 문이 다시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두 사내가 눈짓을 주고받고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품속에서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뽑아 들었다.
“······!”
오카다가 눈을 크게 치켜뜨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푸슉! 푸슉!
“크윽.”
총탄이 오카다의 가슴을 관통하면서 은색 철판으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 벽면이 온통 시뻘건 피로 더럽혀졌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오카다는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며 앞에 선 사내들을 봤다.
“콜록. 네, 네놈들은 도대체 누구야?”
그러자 검은색 가죽점퍼를 입은 사내가 오카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널 죽이러 온 저승사자야.”
오카다가 얼굴을 구기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총성이 엘리베이터 안에 울렸다.
푸슉!
몸을 들썩인 오카다는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축 늘어졌다.
때마침 지하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멈추면서 문이 좌우로 열리자 두 사람은 권총을 집어넣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피투성이가 된 오카다의 시신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탔다.
“어떻게 됐어?”
조수석에 앉아 있던 라미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묻자 가죽 점퍼를 입은 사내가 시선을 마주한 채 대답했다.
“처리했습니다.”
“수고했어.”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부하의 어깨를 가볍게 치자 바로 가속페달을 밟아 승용차를 출발시켰다.
건물을 빠져나와서 큰길로 들어서자 라미는 앞에 있는 글러브 박스에서 두툼한 종이봉투를 꺼내 두 사내한테 줬다.
“위조 여권하고 돈이야. 10만 유로니까 당분간 지내는 데 부족하지 않을 거야.”
종이봉투를 건네받은 사내들을 보며 라미가 말을 이었다.
“안에 표도 넣어 뒀으니까. 이대로 곧장 기차역으로 가서 루마니아로 넘어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던 거였기에 별다른 기색 없이 담담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 뒤 기차역에 도착하자 두 사내는 승용차에서 내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동안 오카다뿐만 아니라 혁권이 입수한 명단에 있던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요원 11명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피살을 당했다.
도쿄 내각정보조사실.
갑자기 한꺼번에 날아든 비보悲報에 내각정보조사실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아테네에 나가 있는 우리 쪽 요원들이 전부 다 피살됐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시게루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책상 앞에 선 우에다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곤혹스러운 얼굴로 어렵게 입을 뗐다.
“그게 저도 방금 소식을 들은 거라······ 현재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
대답을 듣자 더욱 화가 난 시게루는 재차 손바닥을 내려치면서 우에다를 다그쳤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한심해서 정말!”
“······.”
한바탕 화를 쏟아 내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 시게루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야?”
“예?”
“일을 저지른 배후가 어디일 것 같냐고. 이게 우연일 리는 없잖아!”
당장 답을 내놓으라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물음에 우에다의 표정이 한없이 흐려졌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딱히 저희에게 이런 도발을 해 올 만한 곳이 없는데······.”
“그래도 사건이 터졌잖아. 그럼 분명 일을 꾸민 놈들이 있단 뜻이고!”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사를 할 계획입니다.”
“쯧.”
그리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현재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시게루는 짧게 혀를 찼다.
하나둘도 아니고 무려 10여 명이 넘는 숫자를 한날 동시에 습격해서 죽이다니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지금쯤이면 다른 정보기관들에도 소문이 퍼져 비웃음거리가 됐을 테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자칫 앞으로 내각정보조사실이 만만하게 생각돼 툭하면 건드리는 샌드백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시게루는 어금니를 악물며 말했다.
“어떻게든 배후가 어딘지 찾아내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우에다가 얼른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려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혼자 남은 시게루는 제길, 하고 낮은 소리로 주먹을 쥐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번득였다.
설마 그놈이?
사진으로 본 혁권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놈이 대범해도 이런 일을 저지를 배짱이 있을 리가 없다.
한 번도 혁권을 실제로 만나 본 적이 없는 시게루는, 한낱 조무래기에 불과한 놈을 범인으로 떠올리다니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고 생각하며 이내 가능성을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