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31
831
#야마구치 구미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어찌나 비바람이 거센지 두꺼운 유리창이 덜그럭거리며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탁한 물감을 푼 것처럼 진한 회색으로 변한 하늘은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우울하게 만들어 버릴 것만 같은 빛깔이었으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바다 역시 조금이라도 발을 들이면 금방이라도 휩쓸려 갈 것처럼 성난 기색으로 크게 넘실대었다.
휘이잉, 공기를 할퀴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혁권은 손에 쥔 위스키 잔을 흔들었다.
커다란 얼음 두 개가 서로 맞부딪혀 달그락거렸다.
짙은 호박색 액체를 잠시 입에 머금고 향을 즐긴 혁권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조용한 실내를 깨우듯 벨소리가 울렸다.
계속해서 울리는 벨소리에 그는 몸을 돌려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에 올려 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나요.
샌더슨이 전화를 해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는 담담하게 통화를 했다.
“연락을 할 줄 알았소.”
-그새 일을 아주 크게 벌였더군.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댄 혁권은 온더록스 잔에 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상대가 먼저 날 죽이려고 했으니, 당한 만큼 되돌려줘야 되지 않겠소.”
-배후가 어딘지 알려 줬던 건 이런 걸 원한 것이 아니었어.
그러자 혁권이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얌전한 아가씨처럼 가만히 있길 바란 거라면 그건 그쪽의 실수야.”
-끄으응.
작게 앓는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이번 일에 자신도 약간은 책임이 있어서 그런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넘어갔다.
-좋아. 조금 골치 아프게 됐지만 여기서 끝낸다면 내가 뒷마무리를 해 주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나름 호의를 보이는 거였지만,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도록 하지. 아직 갚아 줘야 될 빛이 더 남아 있거든.”
-이봐. 설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색을 하며 묻는 상대와 달리 그는 아주 차분한 표정이었다.
“어설프게 가지 하나만 잘라 내고 말 거였다면 애초에 손을 대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서 뭘 어쩌려고?
“날 노렸으니까 시게루라고 했던가, 그 자의 목숨 정도는 받아 내야 공평하지 않겠어.”
-미쳤군.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수장을 죽이겠다는 이야기에 샌더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우리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어.
혁권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쩌겠다는 거지?”
-굳이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충고라고 해 두지. 존슨 당신도 그렇지만 일본은 우리의 중요한 우방이라고.
“그럴 거라면 일본 놈들이 먼저 일을 벌이기 전에 막았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날카로운 말투로 지적하자 스마트폰 너머에선 딱히 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샌더슨은 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위에서 그쪽을 예의 주시 하고 있는데 자꾸 문제를 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지 않겠나. 이런 말까지 하긴 싫지만 텍사스에서 하고 있는 사업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어.
완다 그룹과 합작으로 진행하고 있는 아메리칸 에너지까지 거론하면서 압박을 해 오자 혁권의 두 눈이 좁아졌다.
“그건 나하고 완전히 돌아서자는 소리군.”
-그 전에 서로 좋게 일을 마무리 짓자는 거야.
능청맞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을 계속 만들어 봤자 존슨 당신한테도 좋을 것이 없지 않겠어. 그리고 또 혹시 알아, 일본 측하고 손을 잡고 일을 함께하게 될지.
어르고 달래듯 샌더슨이 이번에는 또 은근한 태도로 그를 회유했다.
-뜻을 따라 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주도록 하지.
“뭘 해 주겠다는 거지?”
-수도로 진격해 오는 무세베니 장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칼리바 대통령이 용병을 고용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야.
“그런데.”
-민간군사기업이 쿠데타에 개입하지 못하게 막아 주도록 하지.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그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미국 정부한테도 이득이 되는 일일 텐데.”
-부정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쿠데타가 성공해서 무세베니 장군이 정권을 잡으면 가치가 큰 코발트 광산을 손에 넣게 되니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닐 거야.
“흐음.”
그다지 내키진 않았으나 일본 때문에 CIA하고 척지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일이었다.
혁권은 어쩔 수 없이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고 말했다.
“약속은 확실히 지킬 수 있는 거겠지?”
-우리가 어딘지 잊은 모양이군. CIA가 마음을 먹으면 못할 일이 없어.
귀에 거슬리는지 눈썹을 살짝 찡그렸지만 아주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지. 대신 놈들이 또다시 날 건드린다면 그때는 나도 더 참지 않을 거니까 그리 알고 있도록 해.”
원하는 대답을 들은 샌더슨은 반색을 하며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일본 쪽도 내가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 놓도록 하지.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퉁명스럽게 내뱉은 혁권은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스마트폰을 책상에 던져두고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앉아 여전히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한층 어두워져 이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평상시라면 먼바다에 떠 있을 고깃배의 작은 불빛을 구경할 수 있었겠으나, 오늘 같은 거친 날씨에 배를 띄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혁권은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귀를 기울이며 마시던 위스키 잔을 들어 다시금 입에 가져다 댔다.
자신의 사무실 소파에 앉은 시게루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우에다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아테네에서 우리 요원들을 습격해 암살한 놈이 존슨인가 뭔가 하는 암거래상이라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우에다가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번에 암살을 시도한 것에 대한 보복인 거 같습니다.”
“허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다가 이내 주먹을 쥔 손으로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고작 암거래상 따위가 그딴 짓을 벌이다니 이런 치욕스러운 일이 어디 있어!”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에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머리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시게루가 재차 팔걸이를 내리치며 고함쳤다.
“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감히 그런 일을 벌여! 이게 다 자네 탓이야, 알아?”
억지와도 같은 말이었으나 괜히 여기서 입이라도 벙긋했다간 이보다 더 심한 질책이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한바탕 화를 쏟아 낸 시게루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속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어깨를 크게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CIA는 왜 이번 일에 끼어드는 거야?”
“양측이 오래전부터 은밀한 협력 관계인 모양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시게루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일도 CIA가 연관되어 있는 걸로 보입니다.”
눈을 부릅뜬 시게루가 우에다를 쏘아봤다.
“그럼 쿠데타가 CIA의 작전이라는 소리야!”
“예. 확실하게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분위기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협력자라고 해도 저희한테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해 올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기랄! 정말 일이 더럽게 꼬였군.”
정말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들은 헛발질을 하고 있었던 거였기에 시게루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우에다가 연신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고 여기서 끝내라는 것이 저들의 제안이었습니다.”
“흥. 제안이 아니라 강요겠지.”
“…….”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우에다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시게루가 고개를 들며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콩고민주공화국 상황은 어때?”
“좋지 않습니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칼리바 대통령이 민간군사기업들과 접촉해 용병을 끌어들이려고 노력 중이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혹시 CIA가 개입한 거야?”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자 우에다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증거는 없지만 처음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던 민간군사기업들이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짠 것처럼 전부 계약을 거부한 걸 보면 뒤에서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긴 제아무리 날고뛴다는 민간군사기업들도 미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하긴 어렵겠지.”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들이 전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고 미국 정부하고 크고 작은 계약을 맺고 있으니까 더욱 그럴 겁니다.”
“그럼 용병을 투입하는 건 사실상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겠군.”
“그렇다고 봐야 될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 칼리바 대통령이 정권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쉽지 않을 겁니다. 미쓰비시 물산에서도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킨샤사에 있던 주재원들을 인접한 콩고공화국으로 대피시켰습니다.”
콩고공화국은 1960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로, 국경을 마주 대고 있지만 콩고민주공화국하고 완전히 다른 국가였다.
“현지 공관도 철수했다고 그랬지?”
“예.”
짧게 대답한 우에다는 얼굴을 구기고 있는 시게루를 보며 슬쩍 말을 건넸다.
“상황이 이리되어 버렸으니 이쯤에서 저희도 배를 갈아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게루가 눈썹 끝을 살짝 치켜 올렸다.
“칼리바 대통령을 버리자는 거야?”
“CIA가 손을 댄 이상 칼리바 대통령이 정권을 지켜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인정하긴 싫었지만 우에다의 이야기가 맞았다.
“무세베니 장군이 우리하고 손을 잡으려고 할까?”
“저희가 칼리바 대통령을 지지한 걸 알고 있으니 껄끄럽기는 하겠지만, 뒷돈을 듬뿍 찔러 준다면 관계를 잘 풀어 낼 수 있을 겁니다. 무세베니 장군 역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지하자원을 개발해야 될 테니까 말입니다.”
한쪽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으면서 고민했지만 상황이 무세베니 장군 쪽으로 기울어진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정을 내린 시게루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원하는 광물을 확보할 수 있게 무세베니 장군한테 선을 대도록 해. 이번에는 실수를 하지 말고 제대로 하란 말이야!”
“……예.”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우에다를 쳐다본 시게루는 짧게 혀를 차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존슨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생각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 시게루는 미간을 찡그린 채 담배 필터를 질겅 씹었다.
“듣기로 야마구치 조직[山口組]에 실력이 아주 좋은 킬러가 있다던데…….”
말뜻을 알아차린 우에다가 눈을 크게 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일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일을 맡기려는 거 아냐.”
“CIA가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우려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지만 시게루는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시치미를 떼면 저들도 우리하고 관계를 생각해서 크게 문제를 삼지는 않을 거야.”
좀처럼 불안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우에다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지시를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