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32
832
연말을 앞둔 시기라 방송국 로비 앞에도 커다란 트리 장식이 세워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전구와 나뭇잎 사이사이에 달려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장식들. 그리고 트리 꼭대기의 금색 별이 온몸으로 크리스마스라며 외치고 있는 듯했다.
이미 드라마 촬영은 다 끝나고 편집으로 넘어간 상태였으나 소현은 방송 시작 전에 잠깐 삽입될 짤막한 영상을 찍기 위해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크리스마스니까 눈 밑에 반짝거리는 글리터도 붙여 볼까요? 아이돌 같아서 예쁠 텐데!”
최현정이 한껏 의욕에 부풀어 그리 말하자 뒤에서 의상을 준비하고 있던 방영실이 혀를 찼다.
“무대에 서지도 않는데 웬 아이돌 메이크업이야.”
“그래도 크리스마스잖아요!”
“괜히 다른 배우들이랑 비교돼서 과하다는 말만 들을걸.”
소현이 찍은 드라마는 1월 말쯤에 마지막 회가 방영될 예정이었다.
덕분에 그녀를 비롯한 다른 주연배우들 역시 시청자들에게 전할 크리스마스 인사와 신년 영상을 찍기 위해 각자 시간을 내서 방송국에 출근한 터였다.
“다른 분들은 벌써 다 찍었대요?”
마스카라를 바른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소현이 묻자 방영실이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우리가 아마 거의 마지막일걸. 해외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일찍 하고 간 사람도 있대.”
“연말연시에는 다들 바쁘니까요. 걔 누구더라, 아이돌 하던 애······.”
“은지?”
소현이 같은 소속사에 있는 중견 연예인 덕분에 비중 없는 조연으로 드라마에 투입된 아이돌 출신 신인 배우 이름을 기억해 내자 최현정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걔도 원래 소속되어 있는 걸그룹 스케줄이 엄청 빡빡해서 맨날 촬영장 오면 졸고 그랬잖아요. 해외 투어도 다녀야 하고, 연말엔 온갖 시상식에 불려 다녀야 되니까.”
아이돌도 힘들지, 하고 맞장구를 치던 방영실이 퍼뜩 생각난 것처럼 최현정에게 말했다.
“아무튼 메이크업은 단정하게 해 달래. 이다음엔 또 한복으로 갈아입고 하나 더 찍어야 하잖아.”
“알았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
최현정은 파티용으로 반짝이는 섀도들만 모아 놓은 팔레트를 아쉬운 듯 내려놓고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화장을 해 줬다.
파우더로 얼굴 외곽을 쓸어 내리며 마무리를 지은 최현정은 거울에 비친 소현의 얼굴을 보고 새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렇게 예쁘게 꾸몄는데 나중에 지울 생각을 하니 아깝다. 그죠?”
소현은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어떡해요, 어디 같이 놀러 나갈 사람도 없는데.”
드물게 우울한 목소리에 최현정과 방영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머, 왜? 대표님은 어쩌고?”
구두 사이즈를 확인하던 방영실이 슬쩍 가까이 다가와 물으니 소현이 마침 잘됐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 애인이란 사람이 도통 연락이 안 되니까 그렇죠. 전화하면 바쁘다고 안 받을 때도 많고, 어쩌다 연결이 되면 여긴 낮인데 거긴 밤이라고 하질 않나. 대체 어느 나라에 가 있는 건지 말도 제대로 안 해 주면서 ‘응, 새벽이야.’라고 하면 어떡해요? 당연히 미안해서 그냥 잘 자라고 인사만 하고 끊어 버리게 되잖아요.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까 나도 무작정 전화하기 힘들어지고······. 아, 진짜. 언니들이 생각해도 너무하지 않아요?”
다다다 쏟아 내는 말에 최현정과 방영실은 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응.”
“그러네. 대표님이 잘못했네!”
두 사람의 한 박자 느린 반응을 보고서 소현은 멋쩍은 것처럼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속이 답답했는데 어디 말할 곳도 없고 해서······.”
“으응, 괜찮아. 그동안 많이 쌓였나 봐.”
방영실이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답게 소현을 다독여 주었다.
“그래서 화 많이 난 거예요? 그럼 그렇다고 말하지!”
“근데 오빠는 일하러 간 거잖아요. 일부러 나 따돌리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외롭다고 매달리려니 좀 그래요.”
“어휴, 소현 씨는 너무 참아서 탈이에요.”
항상 직설적으로 말하는 성격인 최현정은 자기라면 도저히 그렇겐 못 한다며 눈썹을 찡그렸다.
“요즘 이런 현모양처 스타일도 없는데. 대표님 진짜 복 받았다니까.”
그러자 방영실이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물었다.
“그럼 소현 씨 이번 크리스마스에 혼자야?”
“네에.”
소현이 볼을 잔뜩 부풀리고 골난 얼굴로 답했다.
“오빠랑 데이트하려고 일부러 매니저 오빠한테 부탁해서 크리스마스에 스케줄 다 비워 놨는데, 몽땅 헛일이었지 뭐예요.”
“어머 세상에.”
방영실이 측은한 눈빛으로 소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소현 씨 우리끼리 하는 파티에 올래요?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소하게 선물 교환하고 놀기로 했거든. 물론 현정이도 올 거고.”
“참, 그랬지!”
좋은 생각이라며 최현정이 활짝 얼굴을 폈다.
“괜히 혼자 울적해 있지 말고 소현 씨도 와요. 클럽에 가서 신나게 춤추고 놀다 보면 스트레스도 확 풀리고 좋잖아요, 응?”
두 사람의 제안에 마음이 끌리긴 했으나 잠시 생각하던 소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맙긴 한데 역시 전 그냥 집에 있을래요. 사람들 많은 곳은 원래 싫어하기도 하고······ 그냥 푹 쉬면서 영화나 보죠, 뭐.”
가끔은 그렇게 소소하면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싶다고 소현이 말하자 두 사람 역시 더 이상 권하지는 못했다.
물론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지만, 혁권도 없는데 혼자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서 놀아 봤자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짧은 촬영을 마친 뒤 스태프들과 인사하고 헤어진 소현은 뒤에서 보자는 도 매니저의 메시지를 보고는 걸어서 방송국 후문 쪽으로 향했다.
정문은 항상 방송국을 드나드는 직원들이나 음악 방송에 출연하는 가수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팬들로 사람이 가득했지만 후문은 의외로 한산했다.
“으, 춥다.”
“먼저 와 있겠다더니 어디 있는 거야.”
야외 주차장에 빼곡한 차들을 바라보며 두 스태프와 함께 도 매니저가 어디에 있을까 눈으로 찾으니 익숙한 밴이 다가왔다.
앞 차창 너머로 보이는 도 매니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자연스럽게 옆문을 열던 소현은 갑작스럽게 굳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상투적인 인사말을 내뱉으며 불쑥 얼굴을 내민 이는 바로 혁권이었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외국이랬는데 대체 언제 한국에 돌아온 건지.
아니, 그보다 오면 온다고 말을 해야 될 거 아닌가.
소현은 본능적으로 제 모양새를 점검하다 다행히 최현정이 메이크업해 준 얼굴 그대로 퇴근했다는 사실을 깨닫곤 안도했다.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찾아오면 어떡해요!”
저도 모르게 뾰족하니 모가 난 말투를 하니 혁권이 싱긋 웃으며 받아넘겼다.
“왜? 우리 소현이는 언제 봐도 제일 예쁜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휴, 됐어요.”
가벼운 칭찬 한마디에 응어리졌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게 느껴졌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쉬운 여자가 됐담.”
소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아직 차에 안 타고 서 있는 게 이상한지 혁권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빨리 타. 추워.”
내밀어진 손을 보는데 손바닥에 작게 생채기가 생긴 게 눈에 띄었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왠지 전보다 거칠어진 것 같고, 제 눈에 안 보이는 데서 고생을 하다 온 것 같아 가슴이 찡해졌다.
“손은 또 왜 이래요? 속상하게.”
차 안으로 들어오니 이미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소현을 감쌌다.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 가슴팍을 파고들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태도에 혁권은 그녀를 감싸 안으며 별것 아니라 했다.
혁권은 한쪽 팔로 소현을 감싸 안은 채 새로 지은 저택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커튼을 친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협탁에 놔둔 스마트폰을 집어서 액정 화면을 켜자 이제 막 아침 6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으음. 뭐 해요?”
단단한 혁권의 가슴에 볼을 붙인 채 잠들어 있던 소현이 몸을 뒤척이면서 깨어났다.
“일어났어?”
“지금 몇 시예요?”
좋아하는 여자라서 그런지 막 일어나 씻지도 않은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 묻는 모습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6시야.”
“으응. 함께 있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어요.”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혁권이 허리를 당겨 안았다.
“조금 더 이렇게 누워 있자.”
“그래도 괜찮아요?”
“응.”
“칫. 이럴 때보면 내가 아니라 오빠가 연예인 같아.”
“무슨 말이야?”
“그만큼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단 거예요.”
“이거 찔리는 걸.”
“그러니까 잘해요. 요즘 세상에 나 같은 춘향이도 없으니까.”
“하하. 그래. 알아서 모시도록 할게.”
살짝 투정을 부리면서 그녀가 몸을 감아 오는 걸 혁권은 부드럽게 안아줬다.
“아,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다.”
“이제 드라마 촬영은 거의 다 끝났지?”
“일주일 정도만 더 찍으면 끝이에요. 보통 이맘때쯤이면 밤샘 촬영을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이번 작품은 거의 사전 제작이나 마찬가지라서 이건 편한 것 같아요.”
“다행이네.”
“참. 다음 달부터 어머니한테 수영을 가르쳐 드리기로 했는데, 들었어요?”
“응? 우리 어머니를 말하는 거야?”
“그럼 누구겠어요.”
“그때 이후로 두 사람이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살짝 놀란 얼굴로 묻자 소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하루에 한 번은 꼬박꼬박 통화를 하는걸요. 어머니하고 얼마나 친하게 지낸다고요.”
“그건 몰랐네.”
편한 상대는 아닐 텐데 먼저 어머니한테 스스럼없이 다가가 딸처럼 살갑게 구는 소현이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오빠는 크리스마스 때도 바쁠 것 같은데 그냥 어머니하고 뮤지컬이나 보러 갈까 보다.”
“뭐야? 그건 반칙이잖아.”
“그러게 있을 때 잘하셔야죠.”
머리를 삐죽 들고는 손가락 하나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던 혁권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읍읍. 아이 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현은 거친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혁권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일본 고베[神戶].
높다란 담장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대저택 입구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한 대 멈추어 섰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우에다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눈빛이 날카로운 사내 한 명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우에다 상, 어서 오십시오.”
작게 머리를 끄덕인 우에다는 약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겐이치 씨는 안에 계신가?”
“예.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그러지.”
앞장서서 안내를 하는 사내를 따라 우에다는 성큼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동차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대문을 넘어가자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양옆으로 웅장하게 늘어서 있는 목조 건물은 방문자로 하여금 저절로 위압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더 들어가자 안채 건물 앞에 일고여덟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 호리호리한 체격에 일본 전통 복장을 한 중년인이 우에다를 맞이했다.
“이거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겐이치 씨.”
우에다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중년인의 정체는 바로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 구미의 보스인 시노다 겐이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