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0
90
경매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속속 안으로 들어왔고 어느새 준비된 자리를 가득 채웠다.
얼마쯤 더 기다리자 무대 한쪽에서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샌더스가 걸어 나왔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렇게 저희 소더비 경매사의 특별 경매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원저 왕세자 전하를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짝짝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찰스 윈저 왕세자는 한쪽 팔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환대에 답했다.
“시간 관계상 더 소개를 해 드리지 못하지만 그 외에도 오늘 경매를 참여해 주신 많은 귀빈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제 경매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샌더스는 무대 왼쪽 끝에 세워진 사회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 말을 이어갔다.
“먼저 첫 번째로 보여 드릴 작품은 냉철한 심리적 회화의 대가인 에드가 드가의 인물화입니다.”
소개의 말과 함께 무대 중앙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좌우로 열리면서 이젤 위에 올려진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아.”
여기저기서 터지는 감탄성을 들으면서 샌더스가 작품 설명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뛰어노는 소녀를 그린 이 작품은 움직이는 인물의 순간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해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드가의 그림 특색이 아주 잘 드러나 있는 그림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관 상태가 아주 좋아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색감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잠시 경매 참가자들이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준 샌더스는 이내 약간 목소리를 키우면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가는 200만 달러입니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번호판이 올라왔다.
“210, 220…… 300만.”
가격이 빠르게 올라갔지만 들어 올린 번호판 숫자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새 400만 달러를 넘기자 샌더스는 한 박자 쉬면서 이야기를 했다.
“역시 명작을 알아보시는 눈들이 있으시군요. 지금부터는 50만 달러씩 입찰가를 올리겠습니다. 450만 달러 있으십니까?”
한화로 40억이 넘는 거액이었으나 경매에 나온 드가의 그림은 충분히 그 정도 가치가 있었고 참석자들도 그만한 재력이 있었기에 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전화로도 입찰이 계속됐다.
그때 귀찮게 따라붙는 경쟁자들을 떼어 놓으려는 듯이 누군가 전화로 입찰가격을 크게 올렸다.
“1천만 달러! 1천만 달러가 나왔습니다. 1,050만 달러 없으십니까?”
갑자기 크게 뛰어 버린 액수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아무리 재력가들이라고 해도 그림 한 점에 천만 달러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절반 이상이 아쉬운 얼굴로 입찰을 포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 명이 남아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
“이거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군요. 전화로 응찰해 주시는 분까지 합쳐서 네 분 모두 1,050만 달러를 부르셨습니다. 다음은 1,100만! 1,100만 달러입니다. 이 가격에 작품을 사실 분은 번호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에도 앞서 응찰했던 사람들이 다시 번호판을 들었고 다시 한 번 전화 참가자가 가격을 크게 높였다.
“1,200! 1,200만 달러를 부르셨습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작가의 몇 배가 뛰어 버린 낙찰가격에 지켜보던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액수가 올라갈 때마다 경매장의 뜨거운 열기에 동화되어 심장이 요동치고 입안은 바짝바짝 말랐다.
그리고 마침내 치열했던 경합의 승리자가 나왔다.
고작(?) 100만 달러 차이였지만 다른 경쟁자들은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보며 사회를 맡은 샌더스가 크게 말했다.
“99번 전화 응찰자께서 1,200만 달러를 부르셨습니다. 다른 분이 번호판을 들지 않으시면 이대로 낙찰되게 됩니다. 안 계십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셋을 세겠습니다. 1,200만, 1,200만,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샌더스가 한 번 더 멈추며 좌중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번호판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손에 든 망치를 치면서 샌더스가 낙찰을 선언했다.
“1,200만! 이번 에드가 드가의 인물화는 1,200만 달러에 99번 응찰자분이 가져가시게 됐습니다.”
짝짝짝.
낙찰이 되자 참석자들이 가볍게 박수를 쳤고 샌더스는 살짝 흥분된 얼굴로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혁권 역시 시작부터 터진 대박에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그대로 일어나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무려 1,200만 달러였다.
작품성도 있고 상태도 좋았지만 경기 침체로 워낙 미술계의 상황이 어려웠기에 600에서 700만 달러 정도로 낙찰가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에 낙찰됐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 이대로 가는 거야.”
분위기가 정리되고 바로 이어서 다음 경매 작품이 나오는 걸 바라보면서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경매가 이어졌고 작품들은 단 한 점의 유찰도 없이 예상을 뛰어넘는 상당한 고가에 낙찰이 됐다.
뜻밖의 흥행에 경매를 주최한 소더비 측도 상당히 놀란 분위기였다.
작품들이 훌륭한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뜨거워진 건 드가의 인물화를 낙찰 받았던 99번 전화 응찰자의 영향이 컸다.
중동의 석유 왕이라도 되는지 매번 엄청난 액수를 배팅해서 낙찰 금액을 크게 올려 버렸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몇몇 참가자들까지 끼어들어 경쟁이 격화되면서 경매가 더욱 달아올랐다.
그렇게 1시간 넘게 정신없이 달려온 경매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목이 살짝 쉰 샌더스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 내고는 무대에 놓인 그림을 한쪽 팔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오늘 경매의 마지막이자 하이라이트인 작품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살짝 지친 기색을 보이던 참가자들이 샌더스의 이야기에 다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무대를 바라봤다.
“바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름난 거장인 마르크 샤갈의 작품입니다!”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샌더스가 더욱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샤갈이 완숙의 경지에 이른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미국의 한 부호가 소유하고 있다가 사라져 그동안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전설 속의 그림입니다. 특히 이 섬세한 붓 터치와 화려한 색감은 샤갈이 아니면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지난번 이곳에서 출품된 샤갈의 작품이 1,600만 달러에 낙찰됐다는 걸 말씀드리면서 시작 가는 1천만 달러로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
혁권은 이번에도 대박을 터트릴 수 있을지 약간 긴장한 얼굴로 경매를 지켜봤다.
맨 뒤로 빼 둔 기대작답게 금방 입찰 가격이 1,300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뜨겁게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쭉쭉 가격이 올라가고 있을 때 길게 끌지 않고 단번에 승부를 내겠다는 듯 누군가 입찰가를 크게 불렀다.
“1,600만 달러, 1,600만 달러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99번 전화 응찰자였다.
단번에 300만 달러를 올려 버리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이거 해도 너무하는군.”
“도대체 누구야?”
“정말 만수르 구단주라도 나선 거야?”
아랍에미리트 왕실의 일원인 만수르는 무려 150억 파운드(한화 25조 원)의 재산을 가진 거부였다.
원유와 국부 펀드를 기반으로 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그는 하위리그에서 맴돌던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해 거의 돈을 쏟아붓다시피 해서 프리미어 리그 빅 클럽으로 탈바꿈시킨 걸로 유명했다.
만수르가 아니냐는 의심을 할 정도로 99번 응찰자의 돈질이 장난 아니었다.
99번 전화 응찰자의 정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혼자서 경매 작품을 독식하려는 듯한 행동에 몇몇 참석자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쯧.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거 너무하는군.”
“그러게 말이야. 벌써 몇 번째야.”
이번에 나온 서른한 점 가운데 절반이 넘는 작품이 99번 응찰자의 손에 들어갔으니 이런 불평이 나올 만도 했다.
사실 혁권도 이렇게 큰돈을 거침없이 쓰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하지만 돈만 제대로 입금시킨다면 누가 됐건 상관이 없었기에 그런 생각을 지우고 낙찰 가격이 얼마나 올라갈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1,600만 달러 없으십니까?”
그러자 99번 응찰자의 독주에 자존심이 상한 몇 명이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
“네 분께서 1,600만 달러를 받으셨습니다. 그럼 바로 이어서 1,650만 달러로 가겠습…… 아!”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샌더스는 탄성을 내뱉었다.
99번 응찰자가 바로 새로운 액수를 제시한 것이다.
“2천만 달러! 99번 응찰자께서 다시 2천만 달러를 부르셨습니다!”
최근 들어 가장 큰 액수에 흥분한 샌더스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젠장.”
“2천만 달러라니…… 미쳤군.”
“으음.”
여기저기서 놀란 탄성과 한숨이 쏟아졌다.
“어떡할 건가?”
나란히 앉은 친구의 물음에 두툼한 시가를 입에 문 중년 신사는 눈가를 찡그린 채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어쩌긴 내가 아무리 샤갈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림 한 점에 2천만 달러를 쓰는 건 무리야.”
“그렇지.”
친구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 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2천만 달러라는 액수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 더 부르실 분 안 계십니까? 마지막입니다. 2천만, 2천만, 2천만, 그럼 샤갈의 그림은 2천만 달러에 99번 응찰자분께서 낙찰받으셨습니다!”
탕탕탕!
샌더스가 손에 쥔 망치를 내려치는 걸로 낙찰액이 확정됐다.
곳곳에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혁권은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그럼 이것으로 오늘 경매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완전히 쉬어 버린 샌더스의 말을 끝으로 뜨거웠던 경매가 막을 내렸다.
아쉬운 마음도 잠시.
참석자들은 각자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과 어울려 속속 경매장을 빠져나갔고, 낙찰된 작품들은 철통같은 보안 속에 다시 수장고로 옮겨졌다.
혁권이 그대로 의자에 앉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아까 안내를 해 줬던 직원이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치프 매니저님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시니 위층으로 올라가시죠.”
“알겠소.”
그냥 무대에서 내려오면 되는데 굳이 자리를 옮기려는 걸 보면 그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배려 같았다.
방금 엄청난 금액에 낙찰된 작품들의 경매를 의뢰한 사람이 그라는 것이 밝혀지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일이 많을 거였기에, 혁권은 순순히 말을 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하킴과 함께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안내된 곳은 샌더스의 사무실이 아니라 VIP 고객과 상담할 때 사용하는 회의실이었다.
VIP를 위한 장소답게 상당히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고 가구는 모두 붉은색이 은은하게 도는 마호가니였다.
거기다 벽면 선반 위에는 골동품으로 보이는 중국 청자가 놓여 있어 품위를 더했다.
호화스러우면서도 천박해 보이지 않는 것이 한눈에도 실내 장식에 꽤 많은 공을 들인 걸 알 수 있었다.
여직원이 가져온 차를 마시면서 얼마쯤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샌더스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운 채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