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9
89
그렇게 한 30분쯤 지났을 때 옥스퍼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 교수라고 소개를 받았던 중년인이 두 사람한테 다가와 감정 결과를 알려줬다.
“다 끝났습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약간 긴장한 얼굴로 샌더스가 묻자 중년인은 한쪽 손을 들어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면서 대답했다.
“우선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서른 점 모두 진품입니다.”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자 샌더스는 얼굴을 활짝 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예. 특히 에드가 드가Edgar De Gas의 인물화는 저도 처음 보는 것으로 값어치가 아주 높은 작품입니다.”
“그래요.”
설명을 들은 샌더스는 눈을 반짝였고, 혁권도 기쁜 마음에 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다른 작품들도 하나같이 희귀본에 완성도가 아주 뛰어난 것들입니다. 거기다 보관 상태도 아주 좋더군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샌더스는 가볍게 손뼉을 치고는 감정사들을 둘러봤다.
짝.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그러자 감정사들이 썰물 빠지듯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준비가 다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경매를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최고액을 받아 내 드리도록 하지요.”
샌더스가 한쪽 손을 내밀면서 하는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악수를 했다.
“기대하겠습니다.”
며칠 뒤 세계 각국에 있는 VIP들한테 소더비 경매 회사에서 제작한 특별 경매 초대장이 배달됐다.
그리고 마침내 경매가 열리기로 한 날.
삐삐삐삐.
“으음.”
혁권은 커다랗고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팔을 옆으로 뻗어 더듬거렸다.
아직도 계속 요란한 알람 소리를 내고 있는 시계의 버튼을 눌러 조용히 시키자 다시금 평화로운 고요함이 돌아왔다.
좀처럼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해 보니 8시 30분이라는 숫자가 희미한 어둠 속에 선연히 떠올라 있었다.
잠기운에 취해 한참을 미적거리다 간신히 침대에서 빠져나온 혁권은 슬리퍼를 신고 비척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에 머리를 감고, 옅은 허브향이 풍기는 샤워 젤로 간단하게 몸을 씻고 나온 그는 두툼한 가운으로 몸을 휘감은 채 제일 먼저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진하게 우린 원두커피의 향을 즐기며 창가 옆 작은 테이블에 앉아 한 입 머금으니 그제야 멍하니 흐려져 있던 정신이 단숨에 깨어나는 듯 활력이 감돌았다.
‘여기다 영자 신문까지 들고 있으면 완벽하겠군.’
소위 말하는 커피 광고에 딱 어울리는 구도가 아닌가.
외국을 돌아다니는 것도, 호텔에 체류하는 것도 혁권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나 이처럼 이른 아침에 좋은 원두커피를 느긋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약간 호사스러운 기분이 들긴 했다.
보통 일반 객실에는 기껏 해 봐야 전기 포트 정도밖에 없지만, 특이하게도 혁권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는 원두와 커피머신을 투숙객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 곳이라 이런 멋스러운 아침 풍경이 가능한 것이다.
커피를 홀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옷장 앞에 걸어 놓은 정장 앞에 서서 흐음, 하고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 경매장에는 전 세계에서 돈 좀 있다 하는 인사들이 죄다 몰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혁권도 분위기를 맞춰야 되지 않을까 싶어 마련한 옷이었다.
런던에는 몇 대를 이어 가게를 경영하는 고급 부티크나 남성 정장을 전문으로 하는 재단사가 많아 기왕 온 김에 하나 맞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빳빳하게 잘 다림질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그고, 특히 소매와 목깃 부분은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흠이 없는지 잘 확인했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차콜 그레이 컬러의 재킷과 바지 벨트 그리고 구두까지 다 갖춰 입고 나니 혁권 본인이 보기에도 몰라볼 만큼 세련돼 보였다.
똑똑.
“들어와.”
어차피 이 시간에 객실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하킴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 돌아온 대답에 손목시계를 보면서 안으로 들어온 하킴은 거울 앞에 선 혁권을 보고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때. 꽤 봐줄 만하지?”
이 정도면 어디 가도 빠지진 않을 정도 아니냐며 자랑하듯 팔을 벌려 맞이하는 혁권의 말에 하킴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매일 보는 얼굴이었으니 정장 차림을 봐도 별다를 건 없겠지 하고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솔직히 여자면 모를까 남자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일은 거의 없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하킴은 좋은 의미로 혁권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맞춤 정장을 입고 다닌 사람처럼 턱시도가 매우 잘 어울리는 데다 몸 선을 그대로 살려 주는 옷을 걸치니 잔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골격에 허리를 곧게 세운 혁권의 바른 자세가 더욱 돋보였다.
거기다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드러낸 이마는 시원스러운 인상을 더해 주었고 약간 살이 빠져 골격이 잘 드러난 각진 턱에서는 귀족적인 풍모까지 흐르는 듯했다.
“멋지십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감탄하니, 뻔뻔하게 나 어떠냐고 묻던 혁권이 오히려 머쓱해했다.
“자네도 멋져. 정장 차림은 거의 못 봤는데 이제 보니 무척 잘 어울리는군.”
“그렇습니까?”
하킴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혁권이 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 위에 서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사회 고위층 인사 같은 느낌을 풍긴다면, 하킴은 떡 벌어진 어깨에 큰 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와 무뚝뚝한 표정까지 합쳐져 잘 훈련된 사냥개를 연상케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도베르만이 인간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슬슬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혁권은 마지막으로 가죽 시계를 손목에 차며 대답했다.
아침부터 계속 켜 놓은 TV에서는 어느덧 뉴스가 거의 다 끝나고 아리따운 기상 캐스터가 오늘의 날씨를 알려 주고 있었다.
-날씨는 쾌청.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음.
-놀러 나가기 좋은 날씨입니다. 런던 시민들은 가까운 공원에서 일광욕을 즐겨 주세요.
“좋아. 가 볼까.”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 내려온 혁권이 호텔 정문을 나서자 미리 빌려 놓은 고급 세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가자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백인 기사가 차 문을 열어 줬다.
잠시 뒤 혁권을 뒷좌석에 태운 세단은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울리면서 호텔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섰다.
이미 러시아워Rush hour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교통 체증으로 악명이 높은 도시답게 도로가 꽉 막힌 채 차들이 기어서 갔다.
빵빵.
시끄럽게 울려 대는 클랙슨 소리를 들으면서 차창 밖을 내다보던 혁권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흠.”
시계는 어느새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경매 시작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혁권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김 사장님, HSBC(The Hongkong and Shanghai Banking Corporation Limited)의 조나단입니다.
“안 그래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좀 더 빨리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는 몸을 푹신한 가죽 시트에 기대면서 말했다.
“의뢰를 맡긴 건 어떻게 됐습니까?”
-잘 처리됐습니다. 맡기신 채권 모두 기한이 지난 것들이라 어렵지 않게 상환받을 수 있었습니다. 총금액이 이자를 포함해서 560만 달러입니다.
혁권은 런던까지 온 김에 운 좋게 주운(?) 미국 재무 부채권을 처분하기로 하고 HSBC 은행에 대행을 맡겼었다.
-전액을 다 지난번에 말씀하시니 스위스 은행 계좌로 이채시킬까요?
잠시 생각을 한 혁권은 이내 핸드폰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절반은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스위스 은행 계좌로 보내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될까요?”
-물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즉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또 은행 업무를 보실 건 없으십니까?
“당장은 이걸로 됐어요.”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이걸로 필요할 때 언제든지 빼내 쓸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하며 혁권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사이 세단은 정체 구간을 빠져나와 중심가에 위치한 소더비 경매장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입구에 멈춰선 세단에서 내리자 마중을 나와 있던 경매장 직원이 웃는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서 오십시오. 경매 준비 때문에 치프 매니저께서 바쁘셔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샌더스한테 대접을 받는 것보다 경매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게 더 이득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혁권은 하킴과 함께 직원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깁니다.”
직원이 안내한 경매장은 상당히 넓은 크기의 홀이었다.
오래된 소더비 경매소의 역사를 보여 주듯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장식에 머리 위로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아직 경매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벌써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비싸 보이는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경매가 아니라 마치 사교 클럽이라도 온 듯 차와 다과를 즐기면서 서로 대화를 나눴다.
실내를 스윽 훑어본 혁권은 직원을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소?”
그러자 직원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답했다.
“이번 경매는 특별히 VIP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인원이 적은 겁니다. 그리고 저길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수 고객분들이 전화로 경매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직원이 가리킨 곳을 보자 경매장 한쪽에 열 명가량의 여직원들이 전화기가 놓인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경매가 시작되면 현장 상황을 각자 맡은 고객한테 전화로 알려 주고 대신 돈을 베팅해 주는 거였다.
그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자 직원은 앞쪽 자리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짙은 적갈색을 띠는 마호가니 의자에 앉자 직원이 말을 이었다.
“전 저쪽에 서 있을 테니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알겠소.”
“그럼.”
직원이 물러가자 혁권은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 위에 올린 채 아까 들어오면서 받았던 팸플릿을 펼쳤다.
열 장 분량의 팸플릿에는 그가 내놓은 작품 서른한 점이 사진과 함께 간략한 설명이 첨부되어 실려 있었다.
대충 내용을 훑어보고 있을 때 유명한 사람이라도 왔는지 분위기가 술렁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경매장 입구를 쳐다본 그는 뜻밖의 인물이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채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찰스 윈저 왕세자였다.
비운의 여주인공인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인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이자 영국 왕위 제1계승자였다.
공식 칭호는 웨일스 공이었다.
설마하니 저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혁권은 내심 오늘 경매에 VIP들만 초대됐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실내에 있는 사람들 중에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봤던 유명인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것도 방금 들어온 찰스 왕세자처럼 지위가 높거나 사회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사들이라 더욱 경매의 격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