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63
963
서울 김포공항 전용기 전용 터미널.
정오가 막 지난 시각 중절모에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박형윤 회장이 지팡이를 짚은 채 비서인 문명균과 함께 활주로가 보이는 전용 터미널 건물 창가에 서 있었다.
벌써 1시간째 초조한 얼굴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문명균이 걱정스레 말했다.
“회장님, 계속 그렇게 서 계시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잠깐이라도 앉으시지요.”
하지만 문명균이 몇 번이나 그렇게 권해도 박형윤 회장은 고집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닐세. 비행기가 오는 걸 가장 먼저 보고 싶어서 그래.”
“공항에 근접하면 바로 연락이 올 겁니다.”
“그래도 나 혼자 어떻게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겠나. 자식이 그 고생을 하고 오는데······.”
박형윤은 북한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을 아들을 생각하며 지팡이를 짚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부턴 내가 아들의 힘이 되어 줘야지. 그동안 아비 노릇을 제대로 못 한 걸 다 갚아 줄 생각이라네.”
다만, 하고 박형윤이 말끝을 흐렸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박형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들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게 걱정이라네. 나야 갓난쟁이 때 한번 안아도 보고, 사진으로나마 얼굴을 봤지만 그쪽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모를 거 아닌가?”
아무리 부모 자식지간이라고 해도 떨어져 산 세월이 무려 70년이다.
그동안 브로커를 통해 편지도 주고받고 가끔 통화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을 맞대 본 적이 없으니, 아들 입장에선 아버지라는 말을 들어도 낯설 것이다.
게다가 손자 손녀들은 또 어떤가.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란 존재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면 반가움보다 경계하고 어색한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헤어져 있을 땐 그렇게 보고만 싶더니 막상 만나게 되는 때가 다가오자 갑자기 머리를 치켜드는 근심 걱정에 점점 더 불안해졌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 하지 않습니까. 얼굴을 보면 분명 통하는 것이 있을 겁니다.”
“진짜 그리 생각하나?”
“예. 회장님께서 그렇게 노력하셨는데 당연하지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대답하는 문명균을 보고 그제야 박형윤도 조금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때 밑에 두고 부리는 경호원 한 명이 다가와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곧 전용기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박형윤의 얼굴에 긴장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회장님.”
“가 보세나.”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지만 박형윤은 피하지 않겠다는 듯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었으나 위쪽에 손을 써서 주기장까지 나온 박형윤은 문명균의 부축을 받으며 떨리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일분일초가 마치 1년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가운데 얼마쯤 있었을까, 캐나다 붐바디어사에서 만든 최신형 글로벌 6000 비즈니스 제트기가 은색 동체를 뽐내면서 천천히 주기장으로 들어왔다.
바로 혁권이 소유한 전용기였다.
주황색 형광 조끼를 입은 지상 유도 요원의 신호를 받아 안전한 위치까지 이동한 전용기는 이내 브레이크를 걸고 멈춰 서서는 시끄럽게 울리는 엔진을 끄고 완전히 정지했다.
위이이잉.
문이 열리며 계단이 아래로 내려지자 백성균과 수행원들이 먼저 밖으로 나오고 나서 선글라스를 낀 혁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이 많았소.”
땅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는 박형윤을 보며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멀리서 아들 가족이 온다는데 가만히 집구석에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이해합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으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아들 가족들은 왜 아직 안 보이는 거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까 봐 박형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모두 다 안전하게 함께 왔으니 안심하십시오. 이제 곧 나올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병주와 가족들이 두려움 반 설렘 반인 얼굴로 조심스럽게 전용기 밖으로 나왔다.
중국을 떠나기 전에 호텔에서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그동안 수용소에서 이래저래 고생이 심했기에 초췌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몰라보게 푹 파인 뺨과 깡마른 몸집을 보고서도 박형윤은 단번에 제 자식임을 알아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다가섰다.
“병주야!”
낯선 곳에 와 불안한지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박병주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놀란 듯 입을 벌리더니 이내 흔들리는 눈동자로 박형윤을 마주했다.
“아, 아버지······?”
확인하는 듯한 물음에 박형윤이 머리를 세차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네 아비다.”
두 팔을 벌려 그렇게 대답하자 박병주는 그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라온 듯 얼굴을 울듯이 일그러뜨리고는 손바닥으로 흘러넘치는 울음을 감췄다.
“아버지.”
“오냐.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잘 왔다,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어느새 장성해서 일가를 이루고 자신만큼이나 나이가 든 아들의 손을 마주 잡은 박형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다 늙어 주름진 제 손바닥 못지않게 아들도 온갖 험한 일을 다 해 본 사람처럼 거칠거칠하고 자잘한 흉터에다 보기 흉하게 관절까지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자니, 속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아버지 덕분이에요.”
헤어져 살았던 세월이 길었으니 이미 다 죽었다 생각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끈덕지게 자신을 찾아 준 아버지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만약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북한으로 송환돼 총살을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들의 마른 등을 박형윤이 조용히 토닥였다.
그렇게 서로 얼싸안고 해후의 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뒤늦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가족들을 떠올리고 일단 울음을 그쳤다.
“저, 이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박병주가 키가 작고 야무지게 생긴 여자를 앞으로 데려오며 박형윤에게 소개시켰다.
척박한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하는 여인네들이 으레 그렇듯, 딱 봐도 사내만큼이나 눈매가 매섭고 강단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경계심을 풀지 않고 주변을 살피던 박병주의 아내는 난생처음 보는 시아버지를 앞에 두고 아직까지는 많이 어색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처음 뵙겠어요.”
얼핏 들으면 싸움을 거는 것 같이 투박한 북한 억양이었으나 말투가 그럴 뿐, 실제로는 무척이나 만나서 반가운 표정이었다.
사납게 생긴 눈매도 웃으면 살짝 휘어지는 것이 나름대로의 애교가 느껴져 박형윤은 며느리에게도 수고했다며 손을 토닥여 주었다.
“얘들아, 너희도 와서 할아버님께 인사드리렴.”
박병주의 아내가 손짓하며 부르자 뒤에서 쭈뼛거리던 두 아들 딸이 눈치를 보다가 슬쩍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손자는 여자치곤 키가 크고 늘씬했던 죽은 아내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박병주보다 한 뼘은 더 큰 덩치를 하고 있었으나, 제대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탓에 콩나물처럼 심하게 말라 있었다.
그리고 제 오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손녀는 난생처음 보는 커다랗고 비까번쩍한 건물과 최신 설비들로 가득한 공항 주변의 환경이 신기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박형윤과 눈을 마주치고는 부끄러운 듯 빨개진 귀를 하고서 목을 움츠리는 것이었다.
“둘 다 잘 자랐구나. 대견하다, 대견해.”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이런저런 걱정을 해 댔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다 기우였던 모양이다.
감동적인 해후를 가만히 지켜보던 혁권은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눌 이야기가 많겠지만 이제 막 한국에 온 만큼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이쯤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그러자 박형윤이 기쁨에 붉게 상기 된 얼굴로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말했다.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군. 미안하오.”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온 만남이니 그러실 수 있지요.”
“이해해 줘서 고맙소. 그리고 내 평생의 소원을 풀어 준 걸 절대 잊지 않겠소.”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중간에 꽤 골치 아픈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난번에 이어서 또다시 명동 사채 시장의 거물인 박형윤에게 큰 빚을 지워 놨으니까 필요할 때 언제고 한 번은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테니 그로서도 이득이었다.
잠시 뒤 혁권은 일행들과 함께 걸어서 따로 마련되어 있는 전용기 전용 터미널로 들어가 입국 수속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박형윤의 저택으로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탈북자 신분이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정원에서 일정한 조사와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이곳 생활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인 데다가 박형윤 회장이라는 확실한 보증인이 있었기에, 그리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심인성 과장을 통해 미리 연락해 둔 대로 김포공항에 있는 국정원 분실 요원들에게 박병주 가족을 인계한 혁권은 아쉬워하는 박형윤 회장하고 헤어져 시내로 들어갔다.
며칠 뒤.
혁권은 솔 루시두스 한국 지사 관리부장인 홍선호를 대동하고 경기도 판교에 내려왔다.
“저기 보이는 개천에서 이쪽 능선까지가 이번에 명의를 이전받으신 땅입니다.”
홍선호가 한쪽 팔을 들어서 가리키는 지역을 천천히 살펴본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 일의 대가로 넘겨받은 토지는 경부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판교 시내와 바로 마주 보고 있는 노른자위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인접해 있는 인터체인지를 이용해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데다가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지형이라 나중에 개발이 아주 용이했다.
그리고 그냥 황량한 상태로 놔둔 놀리는 땅이 아니라 수천 그루의 과일 나무들이 빼곡하게 심어져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많지는 않지만 꽤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전부 다 해서 30만 평으로 공시지가로 따지면 170억 원가량 됩니다.”
“실거래 가격은 더 비싸겠군.”
“요즘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거래 가격이 조금 떨어졌지만, 그래도 당장 매물로 내놓는다면 적어도 260억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긴 이만한 입지 조건이라면 충분히 그만한 값어치가 있지.”
“맞는 말씀입니다. 용도 변경이 이루어지면 바로 서너 배는 가격이 더 뛰어 오를 겁니다.”
“그렇겠지.”
수도권 노른자위 지역에 이만한 크기의 땅을 미련 없이 바로 내놓을 수 있다니 역시 명동 사채 시장의 거물다웠다.
주위를 계속 둘러보던 혁권은 농장 한쪽에 있는 2층 양옥집을 하나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건 뭐지?”
혁권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고는 홍선호 부장이 바로 대답했다.
“농장과 함께 명의 이전이 된 건물인데 원래 주인이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고 합니다.”
“별장이라고?”
“네. 대지가 500평에 건평이 1, 2층을 합쳐서 200평 정도 되는데, 방이 7개에 화장실은 4개가 있습니다.”
“상당히 크군.”
“제가 내부를 살펴봤는데 수입산 자재를 써서 아주 고급스럽게 꾸며졌을 뿐만 아니라 관리도 잘되어 있었습니다.”
사전에 별장이 끼여 있다는 말이 없었기에 그는 살짝 놀라면서도 기대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둘러봐야겠군.”
“차를 이용하면 금방입니다.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한쪽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혁권은 야트막한 언덕을 내려가 별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멀어지는 차량의 뒤편, 높은 곳에 있는 수풀 사이에 숨어 커다란 망원렌즈를 들고 멀리서 혁권의 행동을 몰래 찍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