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72
972
일주일 뒤.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를 둘러싼 중동 정세는 숨이 가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사우디아라비아 군의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오폭이라는 악재가 겹친 가운데, 이틀간 심사숙고를 거듭하던 백악관은 결국 상원에서 통과된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물론이고 일부 공화당 의원들까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인권 유린 국가에 무기를 팔아서는 안 된다고 크게 반발하며 연방수사국(FBI)을 동원해 카리니 암살 사건을 조사해야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백악관은 이란을 비롯한 다른 중동 국가들도 사우디아라비아가 비난받고 있는 행동을 한 적이 있거나 그런 의심을 사고 있다면서, 굳건한 동맹으로 중동 지역에서 이란과 그 추정 세력의 악의적인 행동을 상대하는 파트너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며 반대 세력의 말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총액 80억 달러 규모의 무기 판매 계약을 즉각 승인하는 것과 동시에 의회가 중간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도록 쿠웨이트에 위치한 APS-5 기지에 비축해 둔 사전배치 전쟁예비물자 일부를 빼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에 넘겨줬다.
이렇게 반출시킨 전쟁예비물자 부족분과 나머지 수출 물량은 미국 국내에 있는 군수공장을 가동해서 즉각 생산에 들어갔다.
백악관의 꼼수에 반대파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재선을 노리고 있는 미국 대통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론조사에서 이번 판매 승인으로 수혜를 입은 군수공장이 위치한 주(州)들에서 지지도가 크게 오르자, 거기에 고무된 대통령은 SNS에 “사우디는 미국 제품의 거대한 바이어다. 그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낸다.”고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런 백악관의 행동에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는 편법을 쓰지 못하도록 더욱 강력한 무기 통제법을 발의할 준비를 하며 양측이 팽팽하게 맞섰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방 세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후티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사나에 대한 폭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이처럼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혁권은 리야드 중심가에 위치한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다바그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큰 문제없이 현지 테스트가 잘 끝났다고 합니다.”
혁권은 살짝 입술만 축이곤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홍차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와 달리 방 안 분위기는 상당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이야기를 들었소. 염려했던 한국형 파워팩도 별다른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고 훌륭한 성능을 보여 줬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오.”
K2 흑표 전차에는 국산 1,500마력 12기통 디젤엔진과 독일에서 제작된 변속기가 합쳐진 혼합 파워팩이 들어갔는데, 프로젝트 수주가 이루어지면 다바그 회장이 국내 업체하고 합작 회사를 세워 현지에서 엔진을 조립 생산할 예정이었다.
“사업평가단 내에서 K2 흑표 전차에 대한 평가가 좋게 나오고 있지만 경쟁 업체들보다 높은 총점을 받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성의 표시를 해 둬야 될 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얼마나 필요할 것 같습니까.”
그러자 다바그 회장은 탁자에 비치되어 있는 메모지를 집어 들어 만년필로 숫자를 휘갈기더니 혁권에게 건넸다.
메모지 위에 적힌 것은 2천만 달러라는 액수였다.
“꽤 크군요.”
약간 놀란 듯한 혁권에 비해 다바그 회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일을 성사시키려면 그 정도는 풀어야 되지 않겠소.”
“하긴, 어설프게 아끼려다가 망치는 것보단 낫겠죠.”
혁권은 메모지를 찢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재떨이에서 까맣게 타들어 가는 종잇조각들을 잠시 쳐다보던 혁권이 이내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있는 다바그 회장을 보며 말했다.
“오늘 안으로 스위스에 열어 놓은 은행 계좌로 3천만 달러를 입금시켜 놓겠습니다.”
다바그 회장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숫자를 잘못 확인한 거 아니요?”
“아닙니다.”
머리를 가볍게 가로저은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경쟁 업체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거기에 안 밀리려면 이쪽도 화끈하게 베팅을 걸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의도를 알아차린 다바그 회장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머리를 끄덕였다.
“후후후. 맞는 말이오. 이번 테스트에서 드러났듯이 어차피 성능을 세 업체가 다 비슷비슷하니 결국 승패는 누가 어떻게 로비를 잘 벌이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애초에 사우디아리비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동 국가들이 무기 도입을 비롯한 대규모 국가사업을 추진할 때 권력 실세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기에,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서는 로비가 아주 중요했다.
슬쩍 혁권을 쳐다본 다바그 회장이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이건 좀 다른 말인데 독일 정부가 본국에 대한 군사무기 판매 금지 조치를 다시금 연장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인권 운동가인 카리니 암살 사건 이후 서방 국가들의 재제에 독일도 동참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군사무기 판매를 금지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과 달리 1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진 한시적인 금지령이었다.
올해 안에 금지령의 효력이 끝나게 되어 있었기에 레오파트2 전차를 만드는 크라우스 마파이 베그만사(KMW)가 차기 전차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경쟁 업체들의 동향에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 혁권이었기에 당연히 독일 정부의 제재 연장에 대해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던 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입니다. 예멘 내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금지령이 연장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용이 대폭 완화되어 공동 제작한 군사 장비일 경우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이 추가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크라우스 마파이 베그만사가 이번 차기 전차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겠지요.”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인권 단체와 다른 국가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제재를 유지하는 척하면서 독일 군수업체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무기를 팔아먹을 수 있는 길을 터 주는 거였다.
이런 걸 생각할 때 어쩌면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입찰 자체를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는 제너럴 다이내믹 랜드 시스템보다 독일 크라우스 마파이 베그만사가 더 강력한 경쟁 상대일 수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민주당이 태도를 바꿔 예외 조항을 빼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리는 모양이오.”
“그게 정말입니까?”
눈을 크게 뜨며 묻자 다바그 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왕궁에서 나온 정보이니 확실할 거요.”
“예상치 못한 변수군요.”
“의석수가 적은 소수 정당이라고 하지만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한 축인 만큼 최악의 경우 사회민주당이 연정 탈퇴를 선언하기라도 하면 곧바로 조기 총선으로 이어질 테니, 무작정 원안을 밀어붙일 수는 없지 않겠소.”
“여러 가지 악재로 지지율이 최악인 상황이니 그렇겠지요.”
지금 조기 총선이 실시된다면 바닥을 기고 있는 지지율처럼 연립정부를 구성한 여당들은 참패를 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새롭게 생겨난 변수가 이번 입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튕겼다.
혁권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자 다바그 회장이 상체를 바로 하며 말을 건넸다.
“양쪽에서 잡음이 들려오니 이것 때문에 왕궁에서 신경이 아주 많이 쓰이는 모양이오. 물론 우리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요.”
“물론 경쟁 업체들이 알아서 나가 떨어져 주면 저희야 좋겠지만, 그렇다고 아직 확실한 일도 아닌데 이것만 기대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빈 살만 왕세자를 직접 만나 보는 건 어떻겠소?”
“왕세자를요?”
“그렇소.”
다바그 회장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왜 그래야 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혁권이 신중한 기색을 띄며 묻자 다바그 회장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말했다.
“만약 미국과 독일에서 무기 수출 금지가 확정된다면 더 이상 입찰을 진행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겠소?”
“······.”
“그러니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시간을 끌 필요 없이 곧장 수의계약으로 사업자 선정 방식을 바꿔 차기 전차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빈 살만 왕세자를 설득해 놓자는 거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던 혁권이 금방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다 괜히 반감을 살 수도 있을 텐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존슨 씨 당신이라면 빈 살만 왕세자를 설득시킬 수 있을 거요.”
“음······.”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낀 혁권은 쉽게 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본 다바그 왕세자가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어차피 두 업체가 손을 떼게 된다면 대안은 코리아 컨소시엄뿐이지 않소?”
“그럼 구태여 이런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다른 변수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요.”
“무슨 말입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자 다바그 회장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알 아시리 장군이 귀띔해 준 말인데 최근 러시아 국영 군수업체인 우랄바곤자보드(UVZ)사가 군부 인사들과 접촉해서 자신들이 만드는 주력 전차를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해 왔다는 거요”
“우랄바곤자보드사가 만드는 주력 전차라면······ 설마 T-14 아르마타를 말하는 겁니까?”
“맞소.”
대답을 들은 혁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러시아의 아르마타 전차는 무인포탑에 2A82-1M 125mm 활강포를 장착해 무지막지한 화력을 가진 괴물이자, 진정한 의미의 4세대 전차였기 때문이다.
미국조차 기존에 보유한 전차로는 1대1로 맞붙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어 대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전차가 경쟁자로 끼어들지도 모른다고 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르마타 전차는 러시아에서도 실전배치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걸 단순 판매도 아니고 공동생산을 하겠다는 겁니까?”
“대당 650만 달러라고 구체적인 가격까지 제시한 걸 보면 그냥 떠보는 건 아닐 거요.”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군요.”
지금 입찰에서 경쟁 중인 세 전차의 평균 가격이 800만 달러인 걸 생각하면 아주 저렴한 가격이었다.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았고 러시아제 무기라는 단점이 있기는 해도, 완전한 4세대 전차에 뛰어난 성능 그리고 가격까지 싸다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식으로 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데다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기에 러시아 전차를 구매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작년에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첨단 대공미사일 시스템인 S-400을 도입하기로 한 전례가 있는 걸 생각한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 것이오.”
“그러니까 회장님 말씀은 우랄바곤자보드사가 중간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미리 못을 박아 놓자 이거군요.”
“기껏 판을 다 깔아 놨는데 남 좋은 일을 시킬 수는 없지 않겠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혁권이 ‘그런데······.’ 하고 운을 띄웠다.
“빈 살만 왕세자를 설득하려면 귀가 솔깃할 제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바그 회장이 바로 말을 받았다.
“아주 좋은 카드가 하나 있소.”
“그게 뭡니까?”
“파워팩 선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K2 흑표 전차 백여 대가 조립을 다 끝내고 파워팩만 장착하면 되는 상태로 공장 야적장에 장기 보관되어 있다고 들었소.”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걸 직도입 물량으로 가져오겠다고 하면 왕세자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소?”
정말 기발한 생각에 혁권이 감탄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남쪽의 예멘은 물론이고 이라크하고 시리아가 이란 쪽에 붙으면서 신경 써야 될 국경이 늘어난 만큼 당장 전력 증강에 불이 떨어진 왕세자와 군부의 가린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 주는 제안이 될 거요.”
입을 다문 채 진지하게 고민하자 다바그 회장은 가만히 홍차를 마시면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줬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혁권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한번 시도해 볼 만한 일 같군요. 우선 보관 중인 전차들을 가져올 수 있는지 한국 쪽하고 조율을 해 보도록 하지요.”
“성사가 된다면 양국 모두한테 좋은 일이 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