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92
992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에 나선 상황이었기에 꼬리를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 자식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가 됐지만 이제 와서 그래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초초해하고 있을 때, 노크와 함께 여직원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왜 함부로 들어와!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갑자기 성난 호통을 들은 여직원은 주눅이 든 얼굴로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뭐? 누구.”
여직원이 뭐라 말하려는데 바깥에서 이 소동을 다 듣고 있었던 듯 심인성 과장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 이거 미안합니다. 바쁜데 방해를 한 것 같군요.”
전병주 차장 검사는 심인성 과장을 보고선 흠칫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금방 표정을 가다듬은 뒤 파리라도 내쫓는 것처럼 여직원더러 나가 보라고 손짓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다시는 얼굴 볼 일이 없기로 한 것 같은데,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이래저래 물어볼 게 있어서요.”
가슴이 뜨끔했으나 전병주 차장 검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나한테 말이오?”
“일단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소파로 가서 앉은 심인성 과장은 실내를 스윽 한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이거 사무실을 제법 잘 꾸며 놓았군요. 난 이런 데 영 소질이 없어서 보는 사람마다 좀 치우라는 말밖에 못 듣고 사는데, 부럽습니다.”
칭찬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전병주 차장 검사는 노골적으로 반기지 않는 태도를 드러내며 거만하게 한쪽 다리를 꼬았다.
“피차 만나서 기분 좋을 사이는 아니니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해 보시오.”
“뭐, 그러도록 하지요.”
어깨를 으쓱인 심인성 과장은 이내 정색을 한 채 앞에 앉아 있는 전병주 차장 검사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이틀 전에 벌어진 사건을 알고 있을 겁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전병주 차장검사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무슨 사건을 말하는 거요?”
“영일대학병원에서 벌어진 총격전 말입니다. 온 나라가 이것 때문에 떠들썩한데 설마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아. 그거라면 뉴스를 들어서 알고 있소.”
“뉴스라······ 그게 전부입니까?”
“그럼 뭐가 더 있겠소?”
“사건을 벌인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들이 노린 상대가 바로 김혁권 사장이었습니다.”
눈썹을 치켜 올리며 전병주 차장검사가 언성을 높였다.
“설마 지금 그 사건에 내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닙니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전병주 차장검사와 달리 심인성 과장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대를 추궁했다.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현장 근처에서 갑자기 경찰이 예정에 없던 불심검문을 실시했더군요. 거기서 김 사장을 수행하던 경호원들 절반이 붙들리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매복해 있던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들한테 당했고 말입니다.”
“······.”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경찰에 불심검문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검사님이더군요.”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줄곧 태연한 척을 하고 있던 전병주 차장검사의 얼굴에 잔물결이 퍼져 나갔다.
물론 금방 사라진 흔들림이었지만 심인성 과장의 예리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빈틈없이 포착했다.
“그건 수배범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제보가 있어서 경찰에 지시를 내렸던 거요.”
“수배범이라······. 그게 누굽니까?”
추궁하는 말투에 전병주 검사가 사뭇 불쾌한 것처럼 반박했다.
“꼭 내가 심문당하고 있는 것 같군.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요?”
그러자 심인성 과장이 입가에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정도 이상으로 흥분하시는군요. 저는 그저 물어본 것뿐인데 말입니다. 검사님이야말로 어딘가 켕기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니신지······.”
노골적으로 찔러 들어오니 전병주 검사가 순식간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벌떡 일어났다.
“무례하기 짝이 없군!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으니 당장 나가 주시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심인성 과장은 묵직하게 말을 내뱉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그대로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줄곧 노려보던 전병주 차장검사는 문이 닫히자마자 테이블에 있던 재떨이를 들고 던지려다 겨우 화를 눌러 참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격한 감정이 목에서 울컥 솟아올랐지만 지금 난리를 피우면 심인성 과장한테 더욱 확신만 안겨 주는 꼴이 될 터였다.
“김인철 이 개자식!”
그 새끼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해하더니 꼴이 뭐냔 말이다.
이제 자신까지 발목이 잡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생겼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복도로 나가자 최기혁이 옆에 붙어서 걸어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땠습니까?”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이번 사건하고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해.”
“역시 예상이 맞았군요.”
입맛을 다신 최기혁은 심인성 과장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특수부 차장 검사라 섣불리 건드리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검찰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요.”
최기혁이 아쉬운 티를 내자 심인성 과장은 흥, 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손을 대긴 껄끄럽지. 하지만 꼭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럼······.”
“우리 말고도 눈에 불을 켜고 이번 일에 덤벼들 사람이 있잖아.”
말뜻을 알아차린 최기혁이 눈을 크게 뜨며 심인성 과장을 봤다.
“김 사장한테 정보를 흘릴 생각이십니까?”
“그쪽은 우리처럼 이것저것 생각할 게 없잖아.”
“하긴 그렇군요.”
혁권 역시 검사를 건드리는 건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최악의 경우 일이 잘못되면 그냥 외국으로 나가 버리면 됐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이는 최기혁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 차장검사에 대해서 알려 줘. 물론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이건 우리 둘만 아는 거야.”
“염려 마십시오.”
부산 동구 초량동 텍사스 거리.
오래된 부산의 대표적인 국제 환락가답게 자정이 다 된 늦은 밤이었지만,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들어선 유흥업소들이 화려한 네온사인을 밝힌 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거리에는 한국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러시아 선원들과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지나다녔다.
“여깁니다.”
마장동 올림픽파 행동대장인 윤정식의 말에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있던 백성균이 고개를 들어 앞에 보이는 건물을 바라봤다.
거의 80년대쯤에 세워진 듯한 낡은 건물이었는데, 1층과 2층은 빛이 바랜 술집 간판이 달려 있었고 3층은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안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쓰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찾으시는 놈들이 어제부터 내려와 3층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확실한 거겠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혁권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제일 먼저 지시한 것이 바로 자신을 습격한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들을 찾으라는 거였다.
사건이 벌어진 직후 곧장 종적을 감춘 놈들의 행적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방갑수를 통해서 부산과 인천 지역에 있는 밀항 조직들을 살펴보다가 운 좋게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모두 네 놈이 숨어 있는데, 이틀 뒤에 러시아 선적 화물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날 예정이랍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백성균이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한기가 느껴지는 눈동자로 말했다.
“안에는 우리가 들어갈 테니, 너희들은 방해하는 놈들이 없도록 바깥을 지키고 있어.”
“예.”
대답을 들으며 백성균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번호를 눌렀다.
-어떻게 됐어?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혁권이 다그치듯 물었다.
“찾았습니다.”
-놈들이 분명한 거겠지?
“여기서 밀항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튀려는 모양입니다.”
-쥐새끼 같은 놈들 한 명도 놓치지 말도록 해.
“예, 보스.”
-목숨 줄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거칠게 손을 써도 돼.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을 귀에서 뗀 백성균은 지체 없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시작하자.”
승합차 두 대에서 우르르 내린 건장한 부하들이 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백성균의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꿉꿉한 냄새가 나는 계단을 올라 3층 복도에 도착하니 밖에서 상상했던 만큼이나 지저분한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페인트칠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 회색 시멘트가 드러나 보이는 벽면엔 누구 것인지 모를 발자국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뿌연 복도 창문 밑엔 배달 업소 전단지가 몇 개씩이나 붙여 있었다.
백성균은 동그란 손잡이가 달려있는 철문 앞에 서서 허리 뒤춤에 꽂아 두었던 3단봉을 꺼내 펼치고 부하에게 눈짓했다.
슬쩍 옆으로 비켜서자 머리를 짧게 자른 부하가 한쪽 팔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자전거 차임벨처럼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린 후, 문 너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야?”
걸걸한 목소리에 투박하기 짝이 없는 러시아어였다.
“배달 왔습니다.”
부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하자 안에서 다시 어눌한 한국어가 되돌아왔다.
“배달? 시킨 게 없는데.”
“여기가 맞는데요.”
“아니니까 꺼져.”
“씨팔. 지금 배달시켜 놓고 배 째는 거예요?”
“뭐야! 이 새끼가 정말.”
일부러 신경을 긁자 상대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를 소리를 치더니 이내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푸는 쇳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경첩에 녹이 슬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한 뼘 정도 벌어지자 얼굴이 드러난 마피아 조직원의 머리를 백성균이 들고 있던 3단봉으로 있는 힘껏 내려쳤다.
빠각!
“아악!”
그러고는 구둣발로 가슴팍을 냅다 차 버리자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백성균과 부하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자 술을 마시거나 카드를 치고 있던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놈들이야!”
다예프가 사납게 눈을 부라리면서 소리치자 백성균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놈들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다.”
“이런 미친 새끼들.”
욕설을 내뱉으며 다예프가 권총을 꺼내려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과 동시에 백성균이 껑충 뛰어 올라 손에 쥔 3단봉을 휘둘렀다.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실내에 가득 울리며 관자놀이를 제대로 얻어맞은 다예프는 뒤에 있던 소파와 함께 뒤엉켜 볼썽사납게 바닥에 넘어졌다.
그걸 신호로 양옆에 있던 부하들이 성난 파도처럼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가 마피아 조직원들을 덮쳤다.
“뒈져라!”
“커헉.”
“으윽!”
와장창!
널찍한 실내는 한순간에 비명과 고함 그리고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퍽! 퍽!
쓰러진 다에프를 3단봉으로 수차례 내려쳐 피투성이로 만든 백성균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면서 다른 상대를 찾아 주위를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