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00)
‘가영’ 역의 이설과 ‘서중’ 역의 최대웅.
사실 극중 『삼세번』의 양대 주연인 둘이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건 어언 5화를 넘겨서였다.
물론 그 전까지도 서로 얼굴을 살피거나 짧은 말을 주고받은 적은 있었다.
그렇다 해도 빠르면 1화, 늦어도 2, 3화에는 안면을 익히는 보통의 드라마와 비교해볼 때는 꽤나 늦은 속도였다.
「주문 받겠습니다.」
「······.」
「아, 죄, 죄송해요. 주문이었죠? 아메리카노 주세요.」
허둥지둥 당황하는 여주인공.
그걸 본 카페 주인이자 남주인공은 아메리카노 한 잔, 하고 짐짓 대수롭잖은 표정으로 영수증에 체크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덧붙인다.
「요즘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죄송해요. 조금 피곤해서요.」
「관리 잘 하십시오. 단골이신 분이 자주 오셔야 저도 먹고 살지요, 하하.」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주인공은 흘끗 안색을 살핀다.
사실 그는 경찰로 근무하다가 일신의 사정으로 일찍 퇴직해 카페를 차렸다는 뒷사정이 있다. 그런 그의 경험상 저런 표정의 뒤에는 보통 사건이 있었다.
더 이상 경찰이 아님에도 호기심이 인 그는 조심스레 사건에 접근해보기로 한다.
[···그림에 그린 것 같은 스타트구만.]김철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서 그 영문 모를 급사가 이어진다는 거냐.]“바로 그겁니다, 선배님.”
내가 활짝 웃었다.
남주인공은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생각해 조사에 착수하며 사건의 진상을 쫓는다. 그런 와중 여주인공과도 점차 친밀한 관계가 되어간다.
그렇게 진상이 코앞에 다가왔나 싶던 와중, 반전이 등장한다.
“사실 사건의 진상 같은 건 없었던 겁니다.”
[···다들 그냥 죽었단 말이지?]“예.”
[반전이 아니라 스토리의 구성법에 시비를 거는 수준의 내용이군.]당연히 이 황당한 사태에 멀쩡한 추리가 가능할 리가 없다. 남주인공은 번번이 헛다리를 짚으며, 그를 놀리듯 급사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 황당한 장면에 막장도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내 심모원려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나 그 와중에 막장도가 내려가더라도 후속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죽어나갔을 무렵, 끝내 유산을 독차지하려는 생존자가 일을 벌입니다.”
[뭘 어떻게?]“누명을 씌워 신고를 하는 것이죠. 경찰은 주인공 둘을 용의자로 체포해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남주인공을 심문하는 건 동기 시절 몰래 뒷돈이나 받아먹던 쓰레기 같은 인물, 심지어 남주인공에게 열등감마저 품고 있던 녀석입니다.”
이후의 전개는 네 살 배기도 알 수 있을 거다.
극은 그대로 이른바 발암물로 전개를 바꾼다. 어떻게 조금 나아지나 하다가 다시 속을 뒤집어놓는 전개가 반복된다.
여기에는 내가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다. 그야말로 김경숙 작가의 장기 중의 장기니까.
물론 그 배역은 이번에 채용한 개그맨 출신 조역이 맡을 것이며 친구로는 그 샤이를 끼워넣어야 한다. 시청자들이 분위기에 침잠되지조차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활용되고 있다.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계책이지 않습니까?”
[···언제나 듣기엔 괜찮아보인다만.]“이번엔 다릅니다, 선배님.”
내가 훗, 하고 거만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저희는 어디까지나 한두 개의 씬으로 막장도를 올리는데 치중해왔습니다. 그래서 이설 같은 녀석한테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야말로 코앞까지밖에 보지 못하는 동전 던지기에만 매달려온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그런 실패를 철저하게 되짚어보기로 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은 극의 결말까지를 모두 수중에 넣고 그 전체적인 흐름을 컨트롤하는 겁니다. 안 풀렸을 때의 대책도 충실히 갖추고요.”
[황당한 전개로 한 방, 이어지는 발암 전개로 두 방, 마지막 결말로 세 방을 내리 때린다라······.]“어떻습니까?”
김철 선배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선배는 최근 들어 내 막장 스타일에 있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하지만 내 완벽한 계획에 김경숙 작가가 보내온 시놉시스로 실체화된 전망은 선배의 마음을 조금 움직인 모양이었다.
이어진 목소리는 꽤 밝았다.
[아직 확신은 안 가지만··· 이거라면 될 지도 모르겠군.]“선배님이라면 알아주시시라 믿었습니다.”
내가 씩 웃었다.
그간의 실패를 완벽하게 메울 수 있는 대전략이니 당연하겠지.
“막장만을 추구해온지 3년차.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온 것이겠지요.”
[음.]사기충천한 나와 선배는 촬영장으로 향하며 수군수군 음모를 꾸몄다.
“그랬지요······.”
[최대웅이도 만만한 놈이 아니고. 일단 그 녀석들을 중요한 씬에 가뒀다가는 뭔 축제를 벌일지 아무도 모른다.]배우라기보단 흉포한 육식동물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표현은 둘째치더라도 방향성에는 나 역시 동감이었다.
“노파심이긴 하지만 역시 비중을 좀 줄여서라도 그 둘과 일어날 사건을 분리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가능하겠냐?]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뭔 소리야 들을지도 모르지만 뭐, 결국 피디랑 작가가 대빵인 법이지요.”
[녀석, 악당이구만.]“하하, 선배님만 하겠습니까?”
그렇게 늘 하는 헛소리를 하면서도 나로서는 조금 불안한 느낌이 있었다.
이설은 둘째치더라도 최대웅은 본래 자신이 납득이 되지 않으면 감독에게 쉬이 쌍소리를 내뱉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영역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터라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이 넘겨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배역의 조정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웅에 대비해 철저하게 질답을 준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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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예?”
“······?”
뜻밖의 대답에 최대웅과 나는 서로 멍하니 마주보았다.
나는 최대웅의 온화한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최대웅은 스스로 말해놓고 뭘 황당해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물었다.
“그, 비중이 많이 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암만 그래도 이 스토리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을 수는 없었다.
“암요. 저뿐만 아니라 저기 여주인공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삼킨 말을 읽어낸 듯 최대웅이 껄껄 웃었다.
“조역에 힘 실어서 퀄리티 높인다는데 어떤 배우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하.”
“······.”
퀄리티?
그 조역들이 개그 보고 웃다 죽고 드라마 보고 복장이 터져서 죽는데?
나는 최대웅이 반어법으로 비꼬나 싶어 슬쩍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살피건대 그런 표정은 아니었다.
“뭐, 설이와는 저번에 조금 의견을 교환하고 납득했습니다.”
“으음.”
딴에는 잘 된 일이었지만 나는 그 태연자약한 태도가 영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설이는 뭐야. 언제부터 걜 그렇게 편하게 불렀어.
적대에 가깝던 사이에서 갑작스레 친근해진 모양새에 나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김철 선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신경 쓰이냐?]‘당연하지요.’
내가 콧김을 뿜었다.
‘지아랑 설이 남편은 제가 납득할 만한 위인이 아니면 안 됩니다. 저런 아저씨가 웬 말입니까.’
[···그러냐.]김철 선배는 안도한 듯한, 반대로 복장이 터지는 듯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최대웅의 속셈이 뭔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겠지.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드러낼 수도 없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 음, 좋습니다. 그럼 먼저 시동생의 사망 씬부터 가도록 하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최대웅이 씩 웃었다.
“정말 기대되는군요.”
“······.”
대체 뭐가?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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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원광훈 사장에게 꾸지람을 듣고 쫓겨난 측근 비서는 곧장 곽태영 감독에게 연락을 취했다. 곽태영은 사흘 뒤 정도면 얼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해왔다.
그렇게 며칠 뒤 만난 곽태영은 몹시 피곤해보였다.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것이······.”
말을 이으려던 비서는 눈에 진하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에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그,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일도 일이지만 안사람이······.”
“예?”
“아뇨, 아닙니다.”
곽태영은 얼른 고개를 젓고는 애써 안색을 바로했다.
비서는 눈치를 보아가며 이현석이 남몰래 연예투데이에 비판 기사를 의뢰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곽태영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거참, 이 감독답다면 이 감독답기도 하고······.”
“사장님께서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하고 계십니다.”
“글쎄요, 자기 드라마를 욕하는 데 무슨 의도가 있겠습니까. 그냥 요즘 이설 씨 인기로 드라마 자체가 같이 뜨니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 거겠지요.”
PD들 사이에서는 흔히 드라마의 흥행을 결정하는 1순위는 작가요, 2순위는 배우라는 말이 퍼져 있다. 바꿔 말하자면 그 둘이 제대로라면 만드는 건 누가 만들어도 똑같다는 자조인 셈이다.
하지만 이현석은 그간 그런 이야기에 신나게 어깃장을 놓아왔다.
“벌칸 시리즈의 두 작품은 이현석 감독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나오지 않았을 물건이었습니다. 비슷한 이치로 지금 낀 거품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닐까요?”
“···그렇군요.”
비서로서도 납득할 만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을 원광훈에게 들고 가봤자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는 확신도 함께 들었다.
쉬이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는 이어 품에서 원고를 하나 꺼냈다.
“저, 괜찮으시다면 이걸 한 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뭡니까, 이건?”
“『삼세번』의 이후 대본이라고 합니다.”
반사적으로 읽어나가던 곽태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저한테 그런 얕은 수를 쓰라고······.”
“아뇨, 그게 아닙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가지고 온 겁니다. 잠깐 봐주십사 해서요.”
“······.”
“아마 뭔가 잘못된··· 아니, 이전에 폐기된 것 같은 내용인데······.”
비서가 갖은 말로 둘러댄 끝에 곽태영은 마지못해 다시금 원고를 넘겼다.
하지만 이어진 내용에는 그도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첫 사망씬에서 멈칫하던 곽태영은 이어진 죽음에서는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그리고 이후 전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예, 사장님께서도 놀라셨습니다.”
“그렇겠지요. 이 내용이 확실하다면.”
비서는 역시 곽태영도 원광훈 사장과 비슷한 반응이구나 싶어 맥이 풀렸다. 그가 한숨 섞어 입을 여는 순간 곽태영의 말이 겹쳤다.
“정말이지 이현석 피디가 제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또 놀라운 물건이 하나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예?”
“······예?”
저쪽에 이어 이쪽에서도 두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