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protagonist! RAW novel - Chapter 21
21화. >
21화.
1997년 시작된 IMF 경제위기. 대한민국 경제사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로 다루는 이 시기에 수없이 많은 회사가 부도를 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수없이 많은 실업자를 만들었다. 과거 10년 동안의 있었던 경제 호황기 동안 쌓아둔 모든 부가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안호준은 취임사에서 말했다.
“모두가 땀과 눈물, 그리고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고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새롭게 개편된 안호준 정부는 의욕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정부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높은 금리로 중산층은 집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았고, 기업과 공장들은 빚더미에 허덕이다 파산하고 문을 닫았다. 여러 내로라하는 기업들마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그런 시기였다.
파산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돈주머니를 꼭꼭 조여대는 기업들을 독려하기 위한 차원으로, 안호준 대통령은 청와대로 대기업 회장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대통령의 초청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던 회장들은 가기 싫었음에도 억지로 나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오찬장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불편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 채 앉아 있는 회장들은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고 너나 할 것 없이 이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이번 정권은 또 자신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것인지 추측하며 상념에 잠겼다.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오찬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마저 차마 사진기를 들지도 못한 채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 관계자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대통령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하는 기업 회장들 앞으로 안호준 대통령이 나타나자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여러 기업의 회장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허허허. 고생하십니다. 요즘 기업 경영하기 많이 힘들진 않습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님께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신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고 있습니다.”
“그래야죠. 그래야죠. 기업이 성장해야 나라 경제도 성장하고 또 우리 국민들도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법이지요.”
몇몇 회장들과의 형식적인 담소를 나눈 안호준 대통령은 비서의 안내에 따라 앞쪽에 자리한 상석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쭉 둘러본 그는 꽉 차 있는 좌석들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고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기업을 운영하느라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초대에 응해서 자리를 빛내주니 감사합니다. 요즘 시기가 어려운 만큼 앞으로 기업들에서 현명하게 이번 사태를······.”
이런저런 덕담과 함께 말이 길어지자 이준희 회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에잉······. 이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기업 회장들한테 보고서 하나라도 더 읽으라고 하는 게 낫지. 하여간 정치인이란 것들은 여느 것들이나 다 똑같다니까.’
그에게 있어 지금 이 오찬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저 사진 한 장 찍자고 바쁜 회장들을 오라 가라 하는 처사가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제 갓 출범한 살아 숨 쉬는 권력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래서 바쁜 시간을 쪼개 오찬에는 참석했지만, 그의 생각은 여전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끄응······. 머리 아프게 됐어.’
몇 주 전, 그는 민수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그리고 민수가 그에게 한 부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용히 어느 가족의 뒷조사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2년. 2년 동안 제가 줬던 신제품 개발과 양산 준비를 모두 끝내도록 하세요.”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엄청나게 곤란한 조건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술이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거나 확장하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지금 IMF로 국가 전체의 외화가 씨가 말랐어. 환율과 금리가 폭등해 사람들은 지갑을 닫고. 공장에는 재고품이 쌓여가며 수출은 지지부진하지. 자네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진 그룹도 피해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와 사업 확장은 무리야. 자칫하다가는 우리도 유동성 위기를 맞아 파산에 직면할 수 있단 말이네.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두고 해야 하네.”
하지만 그 말에 민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금을 확보해서 아진 그룹의 모든 저력을 퍼부으세요. 만약 돈이 모자란다면 다른 계열사를 처분해서라도 만들어 오세요.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저는 그게 가능한 다른 기업을 알아보겠습니다.”
계약 자체를 파토내 버리겠다는 말에 민수의 협박에 이준희 회장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자네······. 지금 진심인가?”
마치 여차하면 민수를 죽여 입막음이라도 시킬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이준희 회장에게서 피어났지만, 민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회장님에게 말했죠? 저에게, 그리고 완전히 뒤바뀔 이 세상의 미래를 위해서. 아진 그룹 전체를 걸 수 있냐고요.”
민수는 당당한 눈빛으로 이준희 회장을 바라보았다.
“저는, 지금 그 전체를 걸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준희 회장은 그때 민수의 말을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만용에 가까운 억지와도 같았지만, 그는 결국 민수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연구소장이 흥분해서 이성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기술을 들고 온 것도 그렇지만, 전략연구소에서 평가한 최종 보고서에서 본 스마트폰이라는 기기가 만들어갈 이 세상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세상이라······.’
미래 연구소에서 작성한 최종 보고서의 한 구절이 그의 뇌리에 박혔다. 현재 컴퓨터가 가지는 물리적,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어디에서도, 언제든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세상.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신세계를 구축하게 될 특이점. 그것이 바로 민수라는 아이가 가지고 온 스마트폰이라는 설계도에 대한 연구자들의 평가였다. 그리고 그 역시,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상상하면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진짜 미래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군.’
일전에 그가 마치 미래에서 왔다는 뉘앙스로 말할 때 순간 미친놈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에 없을 천재라 하더라도 이렇게 혁신적인 기술을 무슨 글짓기 하듯이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리고 아이 같지 않은 말과 행동들을 보면 차라리 미래에서 왔다는 말이 더 그럴싸했다.
“뭐······. 나로서는 잘된 일이지.”
천운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아주 우연히 발명경진대회에 갔던 직원이 발견한 그의 설계도 하나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아진 산하 미래 연구소에서 민수의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새롭게 특허 등록을 준비하는 기술들만 수백 개가 넘어갔고, 하나하나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게다가 이제 양산에 성공할 차세대 반도체와 이후 만들어 낼 스마트폰은 아마 지금 아진 전자를 지금의 수백 배 규모의 세계적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달콤한 과실은 아마 회장인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흐흐흐······.”
이준희 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자, 오찬장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허허허. 우리 이준희 회장께서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안호준 대통령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이준희 회장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잠깐 잡생각이 나서 웃었을 뿐입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잡생각을 하셨다면 제가 했던 질문은 못 들으셨겠군요.”
“질문이요?”
이준희 회장이 되묻자 안호준 대통령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 IMF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 기업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물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안호준 대통령은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 기업의 회장들을 훑어보았다. 얼굴에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매는 날카롭게 서 있었다.
“일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어떤 기업에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을 해고하고 있다는 보고를 최근에 받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치 그런 기업이 여기에도 있냐는 듯한 추궁이 섞인 말이었다. 그 말에 몇몇 회장들은 찔리는 게 있는지, 노골적으로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안호준 대통령은 그런 그들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는 법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만 살겠다고 모두를 버리는 것 역시 잘못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대기업들의 회장인 만큼 여러분들이 그런 신념을 가지고 모범을 보이면, 대통령으로서 참으로 기쁘고 또 뿌듯할 것입니다.”
그의 노골적인 경고에 오찬 테이블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가식적으로도 미소짓고 있던 회장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몇몇은 적대적인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구겼다.
“대통령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무분별한 차입 경영을 하던 여러 기업이 엄청난 이율의 빚과 이자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극복하면 성장 가능성이 충분한 곳들이 많은데, 지금 이번에 추진하신 고이율 금리 정책을 철회하실 생각은 없는지요.”
누군가의 질문에 안호준 대통령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IMF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기준 금리를 20%까지 올렸다. 현재 시중 제1 은행권 최고 금리가 29.5%에 달할 정도로 살인적인 금리로 부실기업들이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도록 자정작용을 유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빚을 내고 집을 산 서민들까지 대출금 이자에 허덕이다 길바닥에 나앉거나,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던 중소기업들마저 파산해버리는 부작용을 낳아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의 아픈 곳을 때리는 발언에 그는 말을 아꼈다.
“그건 차차 생각해봐야 할 복잡한 문제인 것 같군요. 가장 중요한 것은 방만하게 과도한 빚을 내며 무리하게 경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하던 안호준 대통령은 뭔가 생각난 듯, 이준희 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진 그룹에서 요즘 같은 시기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회장들이 이채에 띈 눈으로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철저하게 비밀로 추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선가 정보가 샌 듯했다. 이준희 회장은 기업 내부 기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내뱉은 안호준 대통령을 불편한 내색을 하며 바라보았다.
“허허허······. 그냥 평상시와 같은 수준일 뿐입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닙니다.”
“그래도 이런 시기에 아진 전자 지분까지 담보로 하면서까지 투자를 감행할 생각을 하시다니요.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차후에 안정된 이후에 진행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만.”
이준희 회장은 그의 말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분노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기업 내부 기밀을 공개하는 것을 모자라 그의 지분까지 담보로 잡았다는 엄청난 약점이자 경쟁사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정보를 내뱉는 대통령의 주둥이를 꼬매고 싶었다.
“허···허···허···. 대통령···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시 한번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래야지요. 모쪼록 현명한 선택 하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리고 안호준 대통령은 이준희 회장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여러 기업의 회장들이 여러 감정을 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심과 호기심을 넘어, 아진 전자에 대한 노골적인 탐욕을 드러내는 눈빛까지. 아마 속으로 아진 전자의 몰락을 꿈꾸며 담보로 잡힌 지분을 어떻게 먹을 수 없나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시선들을 느끼며 이준희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두고 보자······. 네놈들이 내 밑에서 기게 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때는······.’
‘내가 너희들을 모두 먹어 치워주마.’
이준희 회장의 눈이 광기로 번득였다.
끝
ⓒ 군만두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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