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of the Alter Lands RAW novel - Chapter 70
70화. 검의 장인, 빌어먹을 노인 (2)
게헤른 체르발토.
과거에는 유명한 기사였다는 대장장이.
그런 과거가 있어서인지, 이 안에 널려 있는 것들은 대부분 병장기였다.
번개처럼 구부러진 사모.
두 개의 날이 안쪽으로 바짝 서 있는 기형검.
심지어 복합궁과 발리스타까지.
온갖 종류의 무기가 곳곳에, 말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보기엔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들 같은데.
이상한 느낌에 자세히 쳐다보니 녹이 슨 것도, 한쪽이 굽은 것도 있었다.
수리가 필요한 물건들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밖에도 수많은 병장기가 바닥에 널려 있다.
다리를 헛디뎌 넘어졌다가는 팔 한쪽이 날아갈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하다.
한참을 구경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도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동시에 주변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가득한 곳.
도는 용광로 안에 들어 있었다.
용광로 바깥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장소.
지금과는 달리 병장기가 널려 있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다.
—슬슬 됐나.
갑자기 용광로 앞에 나타난 노인이 쥔 집게가 도를 잡아챈 후, 그대로 찬물에 담근다.
치치칙!
수증기가 사방으로 퍼지고, 아름다운 도의 모습이 드러난다.
만들어진 도를 잠시 이리저리 살피던 노인이 미련 없이 휙 내던졌다.
—쓰레기로군.
무생물인 도마저 상처를 받을 만한 잔인한 표현이다.
장인은 미련 없이 다시 금속을 용광로에 집어넣는다.
그게 이 도의 기억 전부였다.
한마디로 만들어지자마자 이 상태로 바닥을 굴러다녔다는 뜻.
그런데도, 먼지도 녹도 없이 매끈한 도신을 드러냈다.
휙, 휙.
나도 모르게 도를 휘둘러 봤다.
이게 쓰레기라면 미디움 소드는 철광 수준이다.
나름 이름있는 장인이 제작한 물건인데도.
“누가 내 물건에 손을 대라고 했지?”
쇠를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나는 급히 동작을 멈췄다.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도를 내 뒤로 슬그머니 감추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야말로 야차 같은 모습의 노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도의 기억 속에서 본 노인이군.’
벽에 붙은 지하 통로에서 머리를 내민 노인은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그런데… 머리가 계속 위로 올라간다.
이거 오우거야, 사람이야?
키가 2m 20cm 정도는 되어 보인다.
어깨는 떡 벌어져 있고, 맨살에 조끼를 입고 있다.
갈라진 근육은 온통 화상 자국투성이.
이런 육체를 지닌 자라면 어떤 영주든 보자마자 기사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곧 은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른쪽 팔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대장장이를 하고 있는 거지?
집게와 망치를 동시에 다룰 수 있어야 제련을 할 텐데.
내 시선을 눈치챈 노인이 피식 웃었다.
“별걸 다 궁금해하는군.”
그때, 뒤늦게 노인을 발견한 하엘린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게헤른 님.”
“빚쟁이 아가씨가 오셨군. 마법 불꽃을 지핀 건 고맙지만, 빚을 탕감해 줄 생각은 없다.”
“이자만 좀 깎아 주시면 돼요.”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치고는 둘 사이에 채무 관계가 성립했다는 게 웃기다.
“그리고 어차피 받을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마법 불꽃 앞으로 다가간 게헤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저런 강철 같은 노인도 하엘린의 막장스러움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네가 전당포에 맡긴 물건이 실패작이 아니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기에 네 아버지의 면을 봐서 넘어간 것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그 보석검은 이른 시일 안으로 되돌려 드릴 테니까.”
…그러니까 돈 되는 장식용 검을 훔쳐다가 전당포에 맡긴 거구나.
정상적인 채무 관계가 성립한 게 아니라.
외모만 봐도 대단한 꼰대 같은 영감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이다니?
하엘린 페이지는 생각보다 더 대범한 성격이 분명했다.
“그 성실한 카조토 페이지에게서 너 같은 아이가 나왔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구나.”
심지어 게헤른 체르발토는 오래전에 하엘린을 포기한 눈치였다.
그동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에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번에는 정말이라니까요.”
하엘린은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아니, 좀 부담스럽다고.
이 여자는 까도 까도 양파 같은 존재다.
엄청난 장인이라고 추켜세워 놓은 채권자에게, 그 작업장을 몰래 털었던 과거를 숨겼던 거냐.
어느 쪽이 더 대단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 아무튼, 이번에는 또 왜 온 거냐?”
“그게… 아. 저번에 그 결계 장치의 부속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그 말에 용광로를 뒤적이던 노인이 몸을 휙 돌렸다.
“이 자가 그 도면을 그린 인물이라고?”
“네. 만나 보고 싶으시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데려왔죠.”
게헤른 체르발토는 그제야 내게 흥미가 생긴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참 위에서 날 내려보던 노인이 고개를 휘휘 돌렸다.
한쪽에 놓여 있던 돌을 하나만 남은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린다.
엄청난 괴력.
쿵. 쿵. 쿵.
돌 세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놓였다.
“앉아라.”
“이게 의자였어요?”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의자를 옮기다가 허리가 나갈 것 같은데.
쿵쿵대는 소리를 들어 보니 하나당 60kg는 되어 보인다.
그걸 한 손으로… 엄청난 악력과 근력이다.
“좋아. 이야기를 해 보지. 오랜만에 흥미가 생기는 녀석이 찾아왔군.”
노인은 대뜸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도면은 진짜 네가 직접 그린 거냐? 제도법을 익힌 건가.”
“음… 제가 그린 건 맞습니다. 제도법은 배우지 않았지만, 도면을 볼 줄은 압니다. 그걸 흉내 낸 거지요.”
이 세계의 제도법을 배운 건 아니지만, 전생에 수없이 설계했던 게 바로 기계장치의 도면이다.
그런 내가 작은 기어 따위를 그려 내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비록 조금 복잡한 구조라 해도.
전생의 복합 정밀기계나 로봇 따위에 비교하면 장난감 같은 장치들이니까.
“그랬군. 그래서 약간 미숙한 거였어.”
미숙한 게 아니라 방식이 다른 것뿐이다.
노인, 게헤른은 의문이 풀린 얼굴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기어를 수리했다고 들었는데, 어떤 방식을 택했지?”
“음… 하엘린 님의 도움을 받아 녹인 후 이어 붙였습니다. 겉을 한 번 더 코팅해서 임시로 강도를 높였죠.”
“그걸 즉석에서 생각해낸 건가?”
“예? 뭐, 그렇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가 내 답변에 거친 웃음을 터트렸다.
“하엘린. 네가 말하길, 기어의 수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들었다.”
“네? 맞아요. 결계의 유지를 위해 최대한 빨리 교체해야 하니까요.”
하엘린이 왜 또 묻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는 건. 잠깐 본 것만으로 기어의 두께와 길이, 강도의 파악을 끝냈다는 소리지.”
아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게다가 부러진 부분을 이어 붙이면 필연적으로 울퉁불퉁해지고, 얇아지기 마련이다. 그걸 계산해서 껍데기를 다시 한번 씌워 강도를 보강한 거고.”
그야 물체의 기억을 보는 물리적인 시간은 매우 짧지만, 내 인식 속에서는 한없이 긴 시간.
견적을 뽑기에 충분한 여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랬는데도 대체품으로 교체하기 전까지 아무 이상 없이 장치가 유지되었다고 했어.”
“맞아요. 사실 굳이 바꿔야 하느냐는 생각도 들었으니까요.”
“이미 한 번 고장이 난 부위니 더 튼튼하게 제작해야 한다는 것도 옳은 생각이지. 그건 이놈이 자기 일에 책임감을 보였다는 증거다.”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나를 보고 대뜸 물었다.
“너는 기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 반응에 하엘린이 깜짝 놀란다.
“설마, 검을 만들어 주시려고요?”
검을 만들어 준다고?
이렇게 쉽게?
솔직히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 중 아무거나 하나 내준다 해도 감격에 겨울 것 같은데.
“일어나 봐라.”
벌떡 일어선 게헤른이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내 몸을 게헤른이 이리저리 만져 본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근골은 나쁘지 않군, 사이즈가 조금 아쉬운 감은 있지만.”
뭐야, 이 양반은.
당신에 비하면 웬만한 기사는 다 아쉬운 사이즈라고.
아무튼, 하엘린에게 돈을 빌려줄 정도로 괴짜니 도저히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다.
“그 이 빠진 검을 휘둘러 봐라.”
게헤른이 내 미디움 소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장인은 장인인가.
검집에 든 검의 날이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 어떻게 안 거지.
황당한 가운데,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며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공짜로 검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쇼라도 다 할 수 있다!
내가 선보인 건 로터스의 검으로 익힌 왕국 검술이었다.
상당히 과격한 내 검술을 대단한 장인의 앞에서 보이기는 조금 그랬으니까.
게헤른 체르발토는 날 보고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형편없는 검이군.”
“그러니까 검을 구하러 온 거죠.”
“아니, 그게 아니야. 정정하지. 형편없는 검술이다.”
그는 굉장히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약간 자존심이 구겨졌다.
새벽 기사단의 단장인 사무엘 카나투도 내게 똑같은 말을 했었으니까.
나름대로 꾸준히 수련하긴 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제법 매서운 기세가 느껴지긴 하는군.”
그가 날 유심히 보더니 픽 웃었다.
“딱 보니 비전 검술에 의존하는 녀석이로군.”
“…부정할 수는 없군요.”
“그런가. 다행이구나.”
“예?”
게헤른이 갑자기 몸을 돌려 용광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모루가 있었다.
옆에 기댄 큰 망치를 그가 툭 걷어찼다.
빙글.
회전만으로도 무게를 짐작할 수 있는 망치가 내 앞으로 휘리릭 돌며 날아왔다.
망치를 잡고 보니 예상이 맞았다.
이것 또한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무겁다.
이런 걸 한 손으로 사용한다고?
“휘둘러 봐라.”
“…이 망치를 말입니까?”
“그래. 이 모루를 정확히 노리고.”
나는 오기로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
망치의 기억에 비친 게헤른의 자세 그대로 망치를 강하게 내리쳤다.
쾅!
망치 머리의 무게가 상당해서인지 제법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게헤른이 모루 위에 놓인 망치를 한참 쳐다보더니, 내게 물었다.
“…망치질을 배운 적이 있나?”
“없습니다.”
전생에는 많이 썼다.
기계과는 사실 노가다 과거든.
물론 이 정도로 커다란 망치는 써본 적은커녕 본 적도 없지만.
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엘린, 네가 드디어 쓸모 있는 짓을 해냈구나.”
“네?”
전직 기사, 현직 대장장이인 게헤른이 시원스레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게헤른 체르발토의 신뢰도가 상승했습니다.] [ (10) → (50) ]“이 젊은이는 어마어마한 장인의 재능을 가졌다.”
“…예?”
내가 장인이 될 자질을 가졌다고?
갑자기 이게 웬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기계공학 석사에 박사는 취직해서 파트타임 수료로 만족하긴 했지만.
20년 넘는 사무, 현장 경력을 갖췄고 기술사까지 땄단 말이다!
이 정도면 장인이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인가?
뭐, 분야는 다르지만.
어쨌든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다.
* * *
카민이 울컥한 사이.
게헤른은 진정 그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경지에 오른 전사라면 칼질 한 번만 봐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대장장이도 마찬가지다.
한 번의 망치질이면 상대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다.
게헤른은 기사로서도 대장장이로서도 일류.
당연히 두 가지 모두 가능한 일이었다.
‘저런 몸으로 내 망치를 어려움 없이 들다니.’
국왕의 40번째 생일, 근 10년 만에 수도에 방문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