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9
19화.
19화
호텔 중식당 룸에서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고 나가자 서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이면 세림으로 가지. 호텔이 내 상관은 아니지만 말야, 잘되면 좋잖아.”
“충성하는 직원이네.”
“뭐 꼭 그렇지는 않아. 오늘도 일찍 나왔잖아 ”
요리 두 가지가 나올 때까지 서진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회사에서 느려 터진 인간들 때문에 속이 뒤집힌다는 이야기에서 이렇게 비싼 집에 척척 드나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축복받은 백수다, 아니 백수를 가장한 왕자인가, 결국 결론은 왕자란 원래 백수 아닌가 하는 말까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식사로 나온 초우면을 앞에 두고 서진이 하나 남은 마요네즈 소스 새우튀김을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한혁이 서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보네. 왜 데리고 갔는지, 왜 아버지에게 가기 힘들었는지.”
“아, 배가 너어무 고파서. 먹느라 정신이 없었지 뭐야.”
한혁의 입에서 풋 하는 웃음이 터졌다. 대꾸도 제대로 없는데 종알종알 떠들던 그 많은 말들은 다 뭐란 말인지.
서진은 앞에 놓인 맑은 재스민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느긋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 배도 슬슬 부르고 하니 물어볼게. 아버지 산소에는 처음이야 나는 왜 데리고 갔어 ”
“그냥.”
“하, 참. 이 사람이! 그렇게 답해 줄 거 왜 물으라 한대 ”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아무렇게나 초우면을 들어 올렸다.
아우, 이거 안 끊어지네. 원래 이런 건가 씹는 맛을 더하기 위해 아랫부분을 딱딱하게 튀긴 듯 만들어 놓은 초우면에 애먼 화풀이를 하며 겨우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 사람의 오점이라고 믿었으니까.”
“…….”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 초우면인지 그의 눈길인지 알 수 없다. 무안하게도 사래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혁이 급히 다가와 물을 건넸지만 기침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 ”
가만히 등을 쓸어 준다. 아프도록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 괜찮아.”
아직도 목에 뭐가 걸려 있는 걸까. 꺼글꺼글 불편한 기분이었다.
“따뜻한 차를 좀 마실래 ”
친절한 오빠처럼 말하더니 한혁은 룸 한쪽, 워머 위의 티팟으로 가려는 듯 등을 돌렸다. 서둘러 한혁의 손을 잡았지만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가지 마.”
“응 ”
“쪽팔리는 거 말고는 괜찮아.”
한혁이 웃기 시작하자 그 웃음에 겨울날 창문처럼 가슴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한혁이 아이를 다루듯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외모는 비슷한데 말이야. 어떻게 생긴 것과 하는 짓은 이렇게나 다른지.”
“뭐. 누구랑 비슷하다구…….”
“어머니.”
“이런, 플레이보이.”
“응 ”
“내가 믿을 거 같아, 너같이 잘생긴 남자 엄마랑 내가 닮았다는 걸 그거 여자 수십 명한테 써먹은 말 아냐 ”
서진은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한배에서 났으나 생김은 자신과 전혀 다른 서연과 서훈을 떠올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갸웃하였다. 진심으로 닮았다는 걸까, 아니야. 여자 홀리는 선수가 틀림없다……. 두서없이 스치던 생각들이 한혁의 말소리에 일순 정지하였다.
“친모가 아니니까. 어머니가 아니라 큰어머니라 불러야 했지.”
평온하고 덤덤하게 한혁이 설명을 이었다.
“아버지한테 가기가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큰어머니 닮은 너를 데리고 가고 싶었나 봐. 아주 예전에는 무척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거든.”
무어라 말을 건네야 하는데 붙여 놓은 듯 서진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남자의 공허한 시선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저…… 나는.”
서진의 얼굴에 곤혹감이 가득하다. 너무 많은 말을 했다. 모조리 필요 없는 말. 서진의 얼굴은 익숙하다. 너무 익숙하여 끔찍한, 거부의 표정이었다. 연화가 애써 감추려 하던 거부, 두려움, 당혹감.
왜 나에게 이렇게 다가오니.
나는 아직 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한혁은 서진의 어깨에 두었던 손을 거둬 깨끗하게 돌아섰다. 서진이 급히 일어서는지 의자와 얇은 카펫 바닥이 둔탁한 마찰음을 일으켰지만 한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정확한 속도로 걸어가 룸 한쪽에 걸어 둔 양복 윗도리를 내렸다. 거칠게 암홀로 손을 밀어 넣고 있을 때 양복 한쪽 끝이 편안하게 올려졌다. 재킷 한편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단호하게 털어 냈다.
“미안해. 당황스럽게 해서.”
그대로 걸어가 문을 열려는 참이었다. 서진이 한혁을 붙잡았다.
“왜.”
“나 좀 쳐다봐.”
“싫어. 할 말 있으면 해.”
서진은 그의 뒤에서 말없이 왼팔을 잡고 서 있었다. 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놔.”
“한 번만 돌아서 줘. 이렇게 잡는 것도 힘든데 내가 앞을 막아설 용기는 도저히 안 나네.”
한혁은 고집스레 팔에 붙어 있는 서진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대로 떼어 내 버리면 나 쪽팔려서 이 자리에서 사망할지도 몰라. 한 번만 봐 주라.”
한혁이 서진의 손을 떼어 내는 대신 힘주어 끌어당기자 서진은 넘어질 듯 앞으로 끌려 왔다.
“그런 표정으로 서 있지 말고 이리 좀 와 봐.”
서진은 조용히 말하며 한혁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동정할 사이는 아닌데 ”
서진의 팔을 몸에서 거칠게 떼어 내며 한혁은 이를 악다물었다.
“난 동정 같은 거 할 만큼 마음이 여리거나 착하거나 그렇지 않아. 어딜 봐서 내 성질이 성모 마리아과로 보이냐 ”
“그럼 뭐야 ”
“네가 좋아. 그래서 따라갔고 그래서 기대게 해 주고 싶은 거야.”
“필요 없어.”
제발 그만둬. 큰어머니와 같은 눈으로 그렇게 보지 마. 동정이든 뭐든. 제발……. 소리를 억누르느라 한혁은 서진의 팔을 아프게 쥐었다. 당당한 말투와 달리 그녀의 맑은 눈이 물기로 흐릿해졌다.
“나 오늘 제대로 미쳤나 봐. 이름, 나이, 얼굴밖에 모르는 남자와 뭐 하는 거니, 지금. 남자가 가자는 대로 무작정 따라다니고 결국에 중국 면 먹다가 어깨도 거절당하네 기록적인 굴욕의 날이다.”
“재수 없는 날이라서 유감이야.”
한혁이 서진을 아프게 쥐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니 가까이 좀 와 봐.”
아직도 서진은 물기 어린 눈으로 한혁을 가만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니, 언제라도 품어 줄 듯이 팔을 벌렸다.
“어서. 창피해 죽겠다니까.”
정말로 얼굴이 붉어지는 서진을 보며 한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어서, 응 ”
포근한 재촉에 천천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서진의 어깨에 기대었다. 가느다란 팔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바보같이, 성질부리지 말고 진작 이랬으면 좋잖아.”
편안한 목소리로 원망하며, 서진이 넓은 등을 가만가만 다독였다.
한혁은 서진의 목덜미와 어깨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고운 어깨와 부드러운 머리칼이 반쯤 덮은 목덜미에서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따스한 체취가 가슴으로 들어왔다. 한혁에 비해 키도 작고 턱없이 가느다란 몸에 기대어 있는 동안 서진은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감싸 안은 팔과 조심조심 다독이는 손길이 주는 안온함이 얼어붙은 등줄기를 천천히 녹였다. 단단하게 굳어 있는 심장까지 온기가 닿을 즈음, 저리도록 따스한 낯선 느낌에 한혁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힘들었지.”
서진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 기대란다고 그렇게 기대냐 어깨 내려앉는 줄 알았다.”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그의 매끈한 피부가 남긴 여운이 짙게 머물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정하느라 한혁을 한 번 흘겨보며 서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많이 무거웠지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한혁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서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어.”
서진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농담도 몰라 너 그냥 살짝 기댄 건데 뭐. 내가 그 정도는 받아 줄 수 있거든.”
순간, 무슨 말이 잘못되었을까. 한혁은 미소를 거둔 채 말하였다.
“윤서진, 그러면 거기까지만 받아. 더 이상은 말고.”
부드럽지만 완강한 경계가 그어졌다.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과 다르게 서진의 재킷을 내려 입혀 주는 남자의 동작은 더없이 다정했다. 어떤 얼굴일까.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을 읽고 싶어.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았지만 한혁은 무표정하게 재킷만 끌어 올리고 있다. 단단하게 굳은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에서 휘익 바람 소리가 났다. 한혁은 더 이상 서진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만족스럽게 재킷이 입혀지자 어깨를 감싸며 서진을 돌려 세웠다. 깃 속으로 들어간 머리칼을 빼어 내서 가지런히 만져 주는 손길은 어깨를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 것으로 완전히 서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예쁜이, 이제 나가자.”
감정을 담은 말은 아니었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 손을 뻗는데 한혁이 서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냐. 그냥 갈래. 택시 많은데 뭘.”
한혁은 힘주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차 앞에서 머뭇거리는 서진을 태우고서 한혁은 차를 몰아 호텔을 빠져나왔다. 도로에 진입한 이 후에도 내내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돼 ”
“이태원동.”
“이태원 ”
“응.”
남산 순환로를 나간 후, 서진이 설명을 더 붙였다.
“하이아트 쪽으로 가야 되는데.”
이어지는 서진의 설명대로 운전하면서 한혁은 점점 곤란한 마음이 되었다. 흘끗 서진을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서진이 미안한 듯 덧붙였다.
“미안해. 우리 집이 좀 설명하기 애매한 위치에 있어.”
서진이 마지막으로 우회전하라고 이야기했을 때 한혁은 의문을 담고서 서진을 쳐다보았다.
“아, 이 동네 제일 작고 낡은 집이 우리 집이거든. 저기 조금만 가면 우측으로 석상이 있는 집이 보이는데.”
서진이 좌측 앞쪽으로 높이 솟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정 회장 집을 보면서 변명했다. 석상이라……. 주황색 불빛이 따뜻했던 맞은편 작은 집이다. 한혁이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한혁은 서진의 집 앞을 그대로 빠르게 지나쳐 오른쪽 골목으로 빠져 버렸다. 서진이 아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 지나쳤어.”
“아, 미안. 많이 지나쳤어 ”
“아니. 여기서 내려 걸어가면 금방이야.”
서진이 차 문고리를 잡았다.
“갈게.”
“서진 씨.”
차 문이 반쯤 열리자 차에서 작은 신호음이 짧은 간격으로 울렸다. 문이 열려 있다는 신호음은 어둡고 조용한 골목길에서 마치 작은 종소리처럼 맑게 울렸다. 서진은 고개를 돌려 한혁을 바라보았다.
“고마웠어.”
그녀의 눈을 보지 않고 하는 인사……. 문을 열자 차 내부 등 아래 환히 드러난 한혁의 얼굴에 피로감이 짙게 묻어났다. 서진은 그 얼굴을 잠시 눈에 담고는 차에서 내려섰다. 문을 닫기 전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보았지만 한혁은 기어에 한 손을 얹고서, 문이 열린 채로도 곧 출발할 것만 같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노랗게 비치던 차 속이 금세 까맣게 젖어 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어를 바꾸고 엑셀을 밟는 남자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만 같다. ‘부우웅’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작게 울리던 신호음은 희미한 종소리처럼 서진의 귓가에 오래 메아리쳤다. 서진은 천천히 골목길을 돌아 올라갔다.
어깨쯤이야 한 번쯤 빌려 줄 수도, 빌릴 수도 있는 거잖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스로를 설득하였다.
‘윤서진, 거기까지만 받아. 더 이상은 말고.’
서진의 마음에 선을 긋듯 좍 그어 내린 그 말에 무어라 대꾸라도 했으면 좋았을걸. 소용없는 생각이 발길에 툭툭 채였다.
집 앞 석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마나 서 있었을까. 서진은 누군가 팔을 두드리자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놀라 ”
서훈이었다.
“아, 참. 놀랐잖아, 이 자식아.”
서진은 손을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멍하니 서서.”
“이제 들어갈 거야.”
서진이 벨을 눌렀다.
“근데 아까 갑자기 왜 밥은 먹자고 그랬어 ”
“아, 그냥. 오늘 누구 좀 만나는데 같이 만날까 해서.”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둘을 보며 소양이 웬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