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24
24화.
24화
“퀄리 하나를 남기고 그 사람이랑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 다시는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 지금의 나라면 헤어져도 아무렇지도 않거나, 아니 적어도 내 인생의 길을 바꿀 만큼 어리석지 않거나 끝내 용기를 내어 그 사람 곁에 있거나, 뭐 그랬을 텐데. 하지만 그때의 나는 공부만 죽어라 파던 폭 좁고 아집 강한 그리고 외풍에 힘없이 넘어지는 형편없는 사람이었거든.”
작은 거품이 하나씩 힘없이 올라오는 맥주잔만 응시하던 한혁이 서진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어때 ”
“가끔 나한테 물어봐. 그럼 답은 하나야.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도 똑같은 반복은 죽어도 안 해.”
“아니, 네 마음은 어떠냐고.”
“……응 ”
“많이 아파 보이는데 ”
“아니야. 말짱해.”
“거짓말.”
한혁은 이를 꾹 맞물리게 다물었다.
“정말이야. 그 사람 때문에 아프지는 않아. 그 시절의 나를 보기가 많이 불편할 뿐이야.”
예상하고 있던 대로 그녀의 행로가 바뀐 뒤에는 정기훈이 있었다. 눈길에 넘어져서 톡톡 쏘아붙이던 서진의 말간 얼굴과 서진을 찾아 병원으로 황급히 들어오던 기훈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말하고 나니 시원하다.”
서진은 아픈 눈을 감추려는 듯 활짝 웃으며 한혁을 바라보았다.
“근데 별 새드 스토리도 아닌데 왜 그대가 표정이 이래 응 그래도, 내가 듣기 좋고 부르기도 좋은 하.바.드. 석사야. 울 아빠가 미워해서 그렇지.”
서진이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돌리며 한혁의 얼굴 밑으로 다가왔다. 포근한 눈길이었다.
“응 ”
손끝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자 담백한 눈빛이 흔들린다.
“넌 왜 이렇게 종잡을 수 없어서…….”
머리를 넘긴 손을 떼지 않고 귓바퀴를 엄지와 검지로 꾹 누르자 서진이 말을 멈추고 몸을 움칫 떤다.
“내가 뭐.”
“몰라, 내가 슬퍼야 할 타이밍에도 네가 더 슬퍼 보이니까.”
“……전혀.”
“아님 됐어.”
서진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리고 뜨거운 한숨을 쉰다. 꼭 다물었던 봉오리를 벌리는 꽃처럼 입술이 열린다. 립스틱이 지워진 입술이 붉다. 쓸어 보고 싶어 손끝이 움찔거린다.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추는 상상을 대담하게 시작한다. 도톰한 입술은 젤리처럼 말랑거리겠지. 맥주를 적신 혓바닥을 맛보면, 나를 밀어낼까 벗어나려 발버둥 칠까. 함부로 굴면 너 따위 다시 보지 않는다고 뺨이라도 갈기고 도망칠까.
잘됐네. 원하는 바.
윤서진, 도망가.
친절하고 다정하고 단 한 번도 나를 밀어낸 적이 없는 유일한 사람 정기훈, 당숙의 여자였던 너를 원하는 나한테서.
“나가자.”
한혁이 주먹 쥔 손으로 제 입술을 거칠게 문지르며 일어섰다. 먼저 걸어 나가는 한혁을 서진이 급히 뒤따랐다. 한혁이 손을 들어 택시를 불렀다. 멈춰 선 택시의 문을 열어 서진을 밀어 넣고 기사에게 이태원동 행선지를 말하면서도 한혁은 서진을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잘 들어가.”
끈질긴 시선을 외면하며 창밖에서 인사를 하였다.
서진이 복잡한 심경으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양은 서진을 불렀다. 거실 소파에 앉히고는 인사도 받기 전에 용건부터 꺼냈다.
“다음 주 주말 시간 비울 수 있어 ”
“네 ”
“내가 선보라 했잖아.”
“선 ”
벌써 까맣게 잊었다. 눈을 깜박이자 소양이 등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얘가, 웬 정신이 이렇게 없어 은숙이가 소개시킨다는 검사.”
“아, 그거 ”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서진을 보며 소양은 손가락 세 개를 손등이 보이도록 펴 보였다.
“어, 엄마. 꼭 욕설 같은데요 ”
“이게, 너 서른이라고!”
“아, 싫어. 무섭단 말예요. 국정원 차장 아버지에 검사, 집에서도 취조식 대화가 오가는 거 아닐까 ”
“암튼 시간 잡았다. 토요일 3시 신라.”
“엄만, 물어보지도 않고 ”
서진이 발끈하는 소리에도 끄떡 없이 소양은 손가락 세 개를 다시 펴 보이더니 다가와서 주먹을 쥐고 있는 서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들어 가며 세 개를 폈다.
“기억하기 좋네. 서른 살 윤서진, 3시에 선보다.”
마치 영화 제목처럼 들리는 그 문구가 심히 맘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다. 서른, 잔치는 끝나는 나이라 했던가.
“싫어. 맘에 안 들어.”
“웃기고 있어. 맘에 들 궁리나 해라. 서훈이가 알아보더니 멋있다더라. 능력 있고 키 크고 남자답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너 꼭, 꼭 소개시키라 하던데.”
이 자식이! 이마에 핏줄이 불끈 선다.
“모자가 완전. 서훈이는 어딨어요 차 보니 들어온 거 같던데.”
“제 방에 있어. 건들지 마. 사흘 동안 거의 못 잤어. 걔 계속 새벽에 들어왔다가 나갔잖아.”
투다닥 계단을 급히 올라가는 서진의 뒤통수를 보며 소양이 소리를 높였다. 열 받은 서진에게 들릴 리는 만무했다.
서진은 비꺽거리는 계단을 힘차게 뛰어 올라가서 서훈의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윤서훈, 이야기 좀 하자.”
“어우, 왜…….”
잔뜩 가라앉아 피곤에 전 목소리였지만 서진은 문을 벌컥 열고 불을 켰다. 샤워를 마치고 막 드러누운 참인지 서훈은 반바지 위에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아직 남아 있는 물기를 보며 서진이 의자 위에 걸린 수건을 들고 다가갔다.
“야, 머리 더 닦고 자. 감기 걸려.”
“그 말 하려고 그리 세차게 문을 두드린 건 아닐 테고. 누님, 무슨 일이시오 ”
서훈이 수건을 받아 옆에 던져두며 눈이 부시는 듯 가늘게 떴다. 자세히 보니 안구에 실핏줄이 섰다. 아무래도 많이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좀 안된 마음이 들었지만 기왕 방해한 거 목적은 달성해야지. 서진은 앞뒤 따지지 않고 말했다.
“너 엄마한테 무슨 소리 한 거야 ”
“뭐 ”
서훈이 목을 긁적이며 눈을 찌푸렸다. 살짝 찌푸린 모습을 보니 한혁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서진은 고개를 좌우로 털고는 말했다.
“네가 나 그 검산지 뭔지 적극 소개시키라 했어 ”
“아, 그거 ”
“나 싫거든.”
“왜애 누나가 싫어하는 재벌도 아니잖아.”
서훈은 빙긋 웃었다.
“장난치지 말고. 내가 말해서 안 먹히니 네가 정정해.”
“뭐 어떻게.”
“알고 보니 영 아니더라든가, 아님 그래, 그 집에서 신부 측에서 집을 사 오기를 원하는 눈치라든가. 그럼 직방이겠다. 울 소양 여사님 돈 없잖아. 그러니 불가항력적으로 안 되는 거지.”
“하, 참. 왜 그래야 하는데 그냥 선보고 영 아니다 싶음 싫다, 그러고 말어.”
귀찮다는 듯 도로 누우려는 서훈의 팔을 끄집어 당겼다.
“야아, 윤서훈.”
“왜 그런 거짓말을 시켜서 남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래 ”
서훈이 정색하기 시작하면 억지는 통하지 않는다. 서진이 입을 비쭉거렸다.
“……사실은 나 좋아하는 남자 있어.”
“어 ”
피곤과 잠에 절어 가느다랗게 뜨고 있던 서훈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정말 작은누나 남자 친구 있어 언제부터 ”
“정말이고, 남자 친구인지는 아직 모르겠고, 얼마 전부터 좋아했다.”
“뭐야 그 나이에 짝사랑해 ”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이 찡그려졌다. 못마땅한 눈길을 받으며 서진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그래, 나 서른이다. 서른이면 남자 좋아도 못하니 ”
“거참. 알았어. 그래, 그 남자랑 잘되어 가기는 하는 거야 ”
“어떡하면 잘되는 건데 ”
“남자 친구인지 아닌지도 모른다고 한심한 소리 했잖아. 언제쯤 확실해질 거 같은데.”
서진은 한숨만 폭 내쉬었다.
“작은누나 짝사랑이야 진짜 혼자 좋아해 ”
“아아니! 나 좋아해!”
힘주어 부정했다. 한혁이 ‘너를 쫓아다니고, 줄곧 보고 있다’고 오늘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럼 잘해 봐.”
“그게…….”
서진은 계속 시원한 답을 하지 않고서 시간만 끌고 있다. 서훈은 마른세수를 하고 고쳐 앉았다. 사흘 동안 제대로 못 잔 잠은 서진의 폭탄선언 때부터 벌써 달아나 버렸다. 단 한 번도 서진의 입에서 좋아하든 관심 있든 남자 이야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잠에 취한 동생을 깨워 놓고서 남자가 좋다며 우물쭈물 무안해하는 서진이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하다. 서훈이 장난스레 물었다.
“왜, 좋아하기만 하고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 ”
“그런 거 아냐.”
“더 문젠데. 진도만 나가고 확신이 없으면 제일 곤란한 경우야. 작은누나, 그냥 발 빼라.”
서훈이 냉정하게 자르자 서진이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부정했다.
“진도가 나가긴 뭘 나가. 그냥 알 수 없는 소리를 해서 머리 아파.”
“뭐라 그러는데 남자는 단순해. 여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리가 복잡다단하지 않다구. 간단한 말과 행동을 제멋대로 복잡하게 해석하는 건 여자들이야.”
서훈의 그럴싸한 남녀학 개론을 들으며 서진은 못마땅한 듯 ‘체’ 하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나도 만만치 않게 단순 심플한 사고 구조거든.”
“허긴, 그래.”
“서훈이 네가 해석해 봐라. 나더러 자기를 너무 많이 받아 주지 말래. 거기까지만 받아 주라고.”
“젠장, 선수네.”
“어 ”
서훈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나이 허투루 먹은 우리 작은누나. 정리하시는 게 좋겠어.”
“왜 ”
“그런 말을 여자한테 지껄이는 남자는 둘 중 하나야. 그럴싸한 말로 여자 홀리는 놈이거나 다른 하나는 진짜 자기 여자를 만들기에 자신의 상황이 너무 벅찬 남자. 전자든 후자든 재미없어. 좋을 거 없으니 그만둬.”
역시 서훈은 냉철한 놈이었다. 서진이 듣기에도 너무 자명한 분석이다. 마음이 아려 왔다. ‘젠장’은 서진이 뱉을 대사다. 서훈은 정확하게 잘라 말했다.
“선봐. 그 남자 생각도 말고 잠이나 자고.”
“생각이 자꾸 나는데…… 상처가 너무 깊은 사람 같아 웃는 모습만 보여도 마음이 아픈데.”
어후우, 서훈이 입 모양으로만 야유했다.
“얼어 죽을 상처. 생긴 게 우수에 찬 미남이겠지.”
“맞아, 완전 잘생기긴 했어. 있지, 너를 좀 더 곱게 화려하게 미남으로 만들면 그 사람이랑 비슷하려나 ”
“헐, 콩깍지는.”
서훈이 이만 나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맘대로 해라. 누나 마음 건강을 위해서는 더 빠지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겠다. 나의 충고의 끝. 이제 나 잠 좀 자게 해 줘. 골이 욱신거려.”
서훈은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차가운 눈길조차 거두며 자리에 막 드러누울 태세였다.
“그래도 선은 봐야 할까 ”
“나한테 묻지 말고 그 남자한테 물어봐. 선볼지 말지.”
“그래 ”
서진은 수건을 들어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는 서훈의 머리를 몇 번 툭툭 털어 주더니 잘 자라는 다정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 나갔다.
‘설마 진짜 그 남자한테 물어볼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
서훈은 혼자 중얼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며칠 간 혹사시킨 머리가 웅웅 울린다. 서진의 풀 죽은 모습이 맘에 걸렸지만, 똑똑한 사람이니 이번 일도 스스로 잘 해결하겠지 싶다. 게다가 나이가 서른인데, 설마 바보도 아니고 말야.
***
“나 선봐.”
서진은 바보였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서훈 말대로 진도도 나가지 않는 한혁과의 관계가 무엇인가 고민하는 동시에 이미 어영부영 보는 것으로 확정되어 가는 선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단순한 머리에 지진이 일어나도록 생각을 거듭했다. 몇 번이나 한혁에게 선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다 딴소리만 여러 차례 하였다.
“그래 ”
한혁의 반응은 단 한마디가 전부였다.
금요일 오전,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걸려 온 김정현 검사 전화를 받고 복도에 서서 ‘네, 들었어요. 토요일 3시 신라 라운지요.’라고 답을 하고 보니 한혁이 나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 만나 ”
한혁의 물음에 거짓말을 할 순발력이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시동을 걸기 전에 입이 움직였다. 몇 번이나 연습한 ‘나 선보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가 아닌 ‘나 선봐.’라는 확정형으로. 서훈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무엇이라 구박을 할까.
“선보지 말까 ”
뒤늦은 수습이 먹힐 리가 없다.
“약속 잡던데 ”
한혁은 특별한 표정 없이 말하고는 자리로 먼저 들어갔다.
마음 한구석에서 찝찝한 고민을 거듭하며 하루가 지났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한혁의 자리는 벌써 비어 있다. 나갈 때 인사나 했던가. 몇 명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퇴근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혀 인사를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서진은 망설이다 핸드폰을 열었다. 11을 꾹 누르자 최한혁 이름이 화면에 나타났다.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