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28
28화.
28화
이사실에 보고를 하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한혁이 불쑥 서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멀리서 보니 너무 예뻐 누군가 했네. 팀장님이었구나.”
“농담하지 마.”
“왜 ”
“회사잖아.”
한혁이 피식 웃었다.
“잠깐 이야기나 할까.”
“싫어. 나도 할 일 많아. 한혁 씨는 매일매일 무슨 약속이 그리도 많아 주말도 그렇고.”
“화났어 ”
“아니.”
서진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화났는데 ”
“아니라니깐.”
“너 화나면 약간 이렇게 턱을 들고 날 쏘아보는 거 알아 ”
한혁이 자신의 턱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말하였다.
“지난 주말에 못 봐서 그래서 투정 부리는 거네.”
“내가 애야 투정은 무슨. 됐어. 왕자님 업무가 바빴나 봐. 난 투정 같은 거 안 해.”
“화내지 마.”
“화 안 낸다니까. 빨리 가서 일이나 해.”
“잠시만, 기다려. 이따 봐.”
뭐라 더 쏘아붙이려 했을 때 한혁은 그대로 서진을 지나쳐 가 버렸다. 화장실로 꺾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진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기다려야 하나 사무실로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강 전무가 저만치서 서진을 향해 걸어왔다. 목례하는 서진에게 강 전무는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윤서진 팀장, 잘 지내요 ”
“네, 전무님.”
“최한혁 씨는 일 잘하고 있습니까 ”
“네, 그럼요. 훌륭한 인재를 저희 팀에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전무의 입가에서 미소가 어색하게 멈추었다. 서진이 표정을 살피려 다시 쳐다보았을 때 전무가 웃으며 덧붙였다.
“윤서진 팀장이야말로 세림의 보배지. 시간 될 때 내 방에 한번 와요. 몇 가지 물어보고 상의할 일이 있어요.”
“네, 전무님. 언제 찾아뵈면 좋을까요 ”
“지금은 회의 들어가야 하고, 내가 이 대리에게 연락하라 하죠. 내 방에서 맛있는 차도 대접할게. 그럼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서진이 웃으며 인사하였다. 강 전무가 인자한 얼굴로 지나쳐 간 후, 서진은 한혁이 사라진 화장실 쪽을 보며 기웃거렸다. 여기에서 기다리라는 말이었는지 사무실에서 보자는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만 사무실로 가야지 싶어 돌아서는데 뒤를 바싹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따라와.”
가까이 지나던 사람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고 작게, 한혁이 속삭이고는 스쳐 지나갔다. 가야 하나, 한 번쯤 무시해 버려야 할까. 서진은 복도 중간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결국, 비상구로 사라진 그를 쫓아 서진은 무거운 문을 밀었다.
“왜.”
서진은 한혁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물었다.
“변명하려고.”
“무슨 변명.”
서진 앞으로 한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서진은 서류철을 앞으로 모아 쥐었다.
“주말에 대한 변명.”
“해 봐, 그럼.”
“할머니 댁에 갔어. 큰어머니와 여동생도 같이 사는 집. 고모님 가족도 왔고, 할머니의 남동생들, 그러니까 작은할아버지들 가족도 왔지. 대가족 모임이었어. 내가 거기 끼어서 꼼짝도 못했어.”
한혁의 눈이 푸르스름한 형광등 아래에서 더욱 검어 보였다.
“할 말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꾸역꾸역 먹고 있자니.”
한혁이 서진의 손을 잡아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여기까지 음식이 차서 목이 졸리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목에 가져갔던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하였다. 감미롭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화장실로 도망가서 전화했지. 너에게.”
“그래서 괜찮아졌어 ”
서진이 한 손을 맡긴 채 조용히 물었다.
“아니, 아직도 체한 것 같아. 통화로는 부족했어.”
한혁이 서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급습적으로 목덜미에 닿는 입술은 차갑고 또 부드러웠다. 서진이 서류철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 마.”
한 손으로 어깨를 밀었다.
“회사잖아.”
“그래서 싫어 ”
입술을 떼며 묻는다.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고 떨어져서, 검푸른 빛 눈이 묻는다. 내가 싫어 서진은 고개를 젓는다. 한혁이 양어깨를 붙잡고서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서진은 이를 맞물어 소리를 삼킨다.
“흔적 남기지 않을게. 온통 그러고 싶지만.”
심장이 부르르 떨린다. 서류철을 꽉 쥔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질 만큼 아프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 뜨거웠다 싶으면 얼음처럼 냉랭한 표정을 보였고, 솜사탕처럼 부드러워 그 달콤함에 빠져들 때면 선득하게 날이 선 눈동자를 보이곤 했다.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매혹적인 미소는 때로는 비웃음을 포장하여 다가왔다.
아무리 다물어도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뜨거운 숨이 쉴 새 없이 나오고 미약한 소리가 섞인다. 차라리 입을 막고 싶어.
“……키스해 줘, 한혁 씨.”
“싫어.”
얼굴을 들며 조롱한다.
“회사라며.”
고집스레 움켜쥐어 가슴팍에 안고 있는 서류철을 한혁이 툭툭 두드렸다. 어떡하라고. 갑자기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하고 싶음, 네가 해 봐.”
어깨에서 손을 떼고 한 발 떨어져서, 서류철을 안은 채로 한 번 해 보라는 듯 느긋하게 내려다본다. 서진이 한혁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왜,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 ”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원망했다.
“왜 그렇게 차가워 ”
서진은 눈을 맞출 수가 없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왜 그렇게…….”
한혁은 서진의 턱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앞머리를 올려 드러난 단정한 이마 위로 사랑스럽게 잔머리가 나 있었다.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정한 얼굴선, 곧게 뻗은 콧날 아래로 빨간 장미 꽃잎같이 도톰한 입술이 움직인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듯한 인상의 그녀를 미칠 만큼 설레도록 하는 입술이다. 하지만 언제나 가슴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하는 것은 겨울 공기처럼 투명한 눈. 서진의 맑은 눈이 물기로 흐려져 있다.
“왜 울어 ”
“너무 지독해.”
서진은 손을 들어 한혁의 가슴을 힘없이 때렸다.
“내 감정은 이렇게 춤을 추는데 어떻게 너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니 ”
“그렇지 않아.”
“거짓말. 이것도 거짓말. 너는 다 장난이야. 대체 여기에 뭐가 들어 있길래, 이렇게…….”
한혁이 가슴을 두드리는 서진의 손을 잡았다.
“내 가슴을 갈라, 네게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할게.”
서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왼쪽 가슴에 갖다 대었다.
“……지금은 들려줄 수만 있지만.”
세차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서진의 귀와 뺨으로 고스란히 흡수되듯 전해진다.
“뭐가 들려 ”
“심장 소리.”
서진이 고개를 들어 한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툭 서류철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양팔로 한혁의 목을 감았다.
“네 가슴에 뭐가 있는데 ”
“아마도, 너.”
“얼마쯤에 있어 ”
서진이 왼팔은 두른 채, 오른손으로 심장께를 더듬었다. 와이셔츠 한 장 위로 호흡할 때마다 떨리는 근육이 느껴진다. 손으로 지도를 그리듯 움직였다. 남자의 다물린 입술이 벌어진다.
“어디쯤에 내가 있어 ”
“네가 들어오는 대로.”
“또 거짓말. 걸어 잠근 것 다 알아. 나만 매일 무너뜨리면서.”
손바닥 아래에서 남자의 심장이 잡힌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꾹 다문 이가 드러난다. 남자가 잇사이로 말을 밀어내었다.
“결국엔, 네 맘대로 들어와서 온통 헤집고 나갈 거야.”
서진이 양팔을 목에 단단히 두르고 고개를 들었다.
“키스해.”
한혁의 눈썹이 찡그려진다. 숨이 닿을 만큼 입술을 더 바싹 붙이며 말했다.
“내 맘대로 들어갈 거야. 온통 헤집어 버릴 거야. 너를, 샅샅이 전부.”
서진의 허리를 끌어안는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러니, 어서 키스해.”
다물린 잇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나의 선이 무너지는 소리. 격렬하게 탐하는 입술 사이로 두 사람이 무너지는 소리.
***
11시가 넘은 시각이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한혁은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신다. 재킷을 걸고 내내 목을 조였던 넥타이를 풀고, 옷을 훌훌 벗으며 숨을 내어 쉰다.
퇴근 후 이어지는 스케줄은 거의 일정하다. 식사를 겸하며 보고와 경영 수업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회계사가 정리한 회사의 재정 상태, 전략팀이 설정한 미래 전략 보고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행해졌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 성과와 실패, 미심쩍은 숫자와 의사 결정. 보고를 하는 사람도 깔끔하게 정리된 숫자도 백 퍼센트 신뢰란 존재하지 않는다. 탐색하고 추측하고 서로에 대한 평가를 가슴에 새긴다.
네가 과연 세림을 끌고 갈 수 있어 내 충성을 바칠 만한 사람인가.
그들의 탐색은 집요하고 신중하다. 이미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알 수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으며 동시에 누구에게서라도 신뢰를 얻어야만 한다. 한혁의 일이고 임무이다. 다음 수업까지 찾아내야 한다. 수많은 숫자와 글자로 전한 보고 속에 시험 문제가 들어 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교묘하게 배치된 문제를 찾아내어 맞혀야 한다. 정답률에 따라 신뢰도는 상승한다. 믿어도 좋습니다. 저를 믿고 한 배에 오릅시다. 백 번의 말이 필요 없다.
오피스텔에 도착하면 육체는 피로에 잠식당해 있다.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서 하루를 복기한다.
놓친 건 없나, 속은 건, 숨은 문제를 빠뜨리지 않았나.
낮에는 마케팅팀에서 수집하는 회사의 바닥 정서, 제일 아래에서 돌아가는 수치들의 분석, 가감 없이 보이는 회사에 대한 애정과 근심을 빠트림 없이 담아야 하고, 밤에는 성실하고 진중한 표정만을 보이는 노련한 이사들의 감정을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진실의 그림을 찾아야 한다.
그동안 파고들어 파악한 회사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회장이 건재하다 하나 이미 일흔이 훌쩍 넘은 사람이었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혈압과 심장을 치료한 지는 오래되었다. 최근 들어 미묘한 회사 분위기 때문에 병원 가는 일도 쉬쉬하며 다니고 있다. 최석원 부회장, 그의 아버지가 떠난 이후 그룹 부회장은 공석이다. 계열사 사장이 혼란을 수습했지만 세림의 둑에는 이미 크고 작은 구멍이 성글게 생겨나고 있었다.
주식 시장의 작은 움직임에도 모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칫하다가는 적대적 M&A의 공격 대상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 부회장이 보유하던 주식을 한혁의 앞으로 옮기면서 발생하는 복잡한 세무 문제에 더불어 재계에서는 한혁의 행보만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와 그의 출생 문제로 인해 강 전무가 실세에 오른다는 설이 분분하여 회사 내의 세력은 이미 급격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혁이 그런 와중에 마케팅의 평사원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그들의 확신을 신념으로 바꾸고 있었다. 일단 줄타기를 시작한 사람은 말대로 선택의 순간이 끝나 결정을 했다는 바를 의미했다. 차후의 감정과 판단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그 줄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근한 지 두어 달이 지난 지금 한혁은 자신에게도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가야 할 길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것은 윤서진이었다. 그녀를 접을 수도 놓칠 수도 없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럴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영원히 세림의 숨은 자손으로 있어야 했다. 최석원 부회장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귀국하지 않던 그가 눈부신 시애틀의 봄 햇살을, 그에게 주어졌던 편안함과 자유를, 되찾은 작은 빛을 뒤로하고 돌아섰을 때 이미 가야 할 길은 결정되었다.
세림에 들어온 이상 이대로 물러선다면 그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일이다.
사생아. 천한 피. 오점.
이미 깊은 흉터가 되어 버린 화인은 귀국한 그날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한혁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
금요일 하루 내내 월요일에 있을 회의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했다. 당분이 필요한 시간이다. 서진이 조용히 사무실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커다란 도넛 상자를 들어 보였다.
“저는 당이 필요해요. 우리 간식이나 할까요 ”
“우아, 팀장님, 사랑해요.”
영석이 웃으며 도넛 상자를 냉큼 받아 들었다. 도넛을 가운데에 두고 팀원들이 모이자 주로 잡무를 담당하는 정희 씨가 나긋하게 말했다.
“제가 커피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서진이 정희 씨를 향해 웃음을 보이는 순간 그녀를 따라가는 한혁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니 괜찮다고 거부하는 정희 씨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컵을 챙겨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서진은 도넛을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같이 커피를 들고 다가온 두 사람의 모습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