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27
27화.
27화
“응 ”
“잠시만 있어 봐.”
한혁이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려와.”
“왜 그래 혼자 내릴 수 있어.”
“오늘은 애인 하기로 한 첫날이니까.”
한혁이 서진의 등 뒤로 팔을 두르고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잡았다. 덕분에 조금 높다 싶은 SUV 차량에서 편안하게 내려섰다.
“좋은데 애인 되면 원래 이렇게 다정해 ”
“아니. 너한테만.”
“좋아라.”
말 한마디에 발이 구름을 밟는 것처럼 들뜬다.
“난, 너한테만 뭘 해 줄까.”
손가락으로 목덜미로 내려온 머리칼을 감질나게 걷어 내며 한혁이 말하였다.
“전부 다.”
“응 ”
“전부 다, 나한테만 해 줘.”
섬세한 도자기를 만지듯 뺨을 감싸며 말하였다.
“대답해.”
머리칼에 손가락을 깊숙이 넣으며, 다른 팔로 허리를 감으며 부드럽게 재촉했다.
“서진아, 대답해.”
“그럴게.”
한혁의 입술에 만족스런 웃음이 떠올랐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삼키며, 놀라서 벌어지는 입술을 가르며, 손에 힘을 더했다. 동네인데, 사람들이 지날 수도 있는데…….
‘나한테만 해 줘.’
한혁의 요구가 떠올라 눈을 감는다. 입술은 이마를 꾹 누르고 떨어졌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는 손길은 다정하고 부드럽다. 서진은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가슴께만 바라보았다. 오늘은 화려하다 싶을 만큼 과감한 디자인의 셔츠 차림이다. 검은색에 콘트라스트가 강한 애니멀 자수 패치가 서슴없이 배치되어 있다. 메탈 장식 단추가 가슴 중앙에서 빛을 받아 반짝였다. 발렌티노를 이토록 잘 소화해 내는 사람은 모델 외엔 본 적이 없다. 한혁이 손가락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고개 들어.”
“응 ”
서진이 눈을 맞추자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바라보았다.
“왜 시선을 피해 ”
차가운 눈동자에 불안이 숨어 있다. 볼 때마다 가슴이 알싸했던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었나. 서진이 한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한혁이 그제야 웃는다.
“고작 이 정도로 ”
“고작이라니. 나 어지러워.”
서진의 어깨를 감싸고 한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지러운 머릴 기대어 오는 서진에게 속삭였다.
“매일매일 볼 때마다 할 거야.”
“우리, 회사에서 볼 텐데 ”
“알아, 팀장님.”
그 대답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진다. 벤치에 좀 앉을까 싶어 시선을 드는 순간 저만치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떡하지, 당황하여 자리에 멈춰 서자 한혁도 서진의 시선 끝을 좇았다.
“누구 ”
“내 동생.”
“응.”
서진이 손으로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떼어 냈다. 한혁이 어깨를 감싼 팔을 풀자, 서훈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서훈아.”
서진의 부름에 서훈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답하였다.
“어, 누나. 이제 들어오는 길이야 ”
서훈이 굳은 표정으로 서진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말했다.
“미안해. 그냥 지나갈까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네.”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
면 티셔츠에 편한 바지 차림의 서훈을 보고 서진이 물었다.
“아, 소양 여사님이 맥주 드시고 싶다 해서.”
서훈이 비닐봉지 안의 맥주 캔과 오징어를 들어 보였다. 서진이 서훈과 애써 눈을 맞추었다. 제발, 윤서훈! 무언의 협박과 애원을 읽었는지 서훈이 표정을 풀고 웃었다.
“안녕하세요. 서진 누나 동생이에요.”
“내 동생이야, 윤서훈. 여기는 최한혁 씨.”
“최한혁입니다. 반가워요.”
한혁이 서훈과 서진을 번갈아 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이다.
“근데 서진 씨랑 별로 안 닮았다.”
서진이 옆으로 흘겨보며 말했다.
“우리 집에서 나만 못난이거든.”
“내가, 예쁘다고 했잖아.”
“체. 거짓말.”
한혁이 서진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서훈은 이질감이 들도록 잘생긴 남자에게 푹 빠진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서진 누나.
“동생이랑 들어가라. 월요일에 보자.”
남자는 서훈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뵙죠, 윤서훈 씨.”
차 쪽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서진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서훈이 서진의 등을 툭 두드렸다.
“응 ”
“그만 봐라. 목 돌아가겠다.”
멀리서 키스하는 커플을 보고 방해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려다가 설마, 하며 다시 확인을 했을 때,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작은누나……
사춘기 여학생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으며 짝사랑이니 아니니 했던 고민의 대상이다. 오늘 누나 선본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자꾸 나는데…… 상처가 너무 깊은 사람 같아 웃는 모습만 보여도 마음이 아픈데.’
할 말이 없다, 정말. 서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서진의 말대로 빛이 나도록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의 얼굴과 다르게 눈은 어둡고 차가웠다. 사람을 단번에 무장해제시키는 매혹적인 미소까지 모두 서훈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서진은 서훈의 눈치를 살피며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우리 집 인간적으로 살기에 너무 불편하지 않냐 뭐 하나 사러 가려 해도 족히 십오 분은 걸어야 동네 슈퍼라도 나오니. 기사 있고 집사 있고 불편할 거 하나 없는 겁나는 이웃들이나 조용하고 외부인 안 다니는 좋은 동네지 뭐.”
서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응 눈치를 보는 서진에게 물었다.
“그 남자야 ”
“……응.”
“잘한다, 윤서진. 엄마는 선보고 잘되어서 늦게 들어오는 거라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말이야.”
“말, 안 할 거지 ”
“누나, 연하 사귀어 ”
“아냐. 나보다 나이 많아.”
서진은 황급히 부정했다.
“동안이네. 몇 살인데 ”
“서른하나라 했는데 우리나라 나이인지 미국 나이인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부터 있다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거든.”
“누나! 나이도 모르는 남자랑…….”
서훈은 겨우 뒷말을 삼켜 냈다. 서진이 중얼중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나이는 확인해 봐야겠다. 아마 서른둘, 나보다 두 살 많은 게 맞을 거야. 대학 졸업하고 일하다가 MBA 마친 뒤에도 경력이 있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월요일에 또 만나기로 했어 ”
“응 ”
“그 남자 가면서 월요일에 보자고 약속하던데 ”
“아, 그거 회사에서 보잔 말이야. 우리 팀에 들어왔거든.”
“돌겠다.”
서훈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서진을 쳐다보았다.
“사내 연애까지. 설상가상, 연애의 수칙을 하나도 안 따르네. 그런데 저 남자가 누나 팀에 뭘로 들어와 누나가 팀장 아냐 ”
“그냥 평직원.”
서훈이 얼굴에 어이없음 짜증 남 답답함을 감추지 않고 쏘아붙였다.
“작은누나! 어디서 일한 사람인데, 대체 어디 MBA이길래 평사원으로 들어가 다 거짓말 아냐 ”
“아니야. 스탠포드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했대. 프로덕트 트렌드 개발 전략팀에서 일했어. 똑똑해. 걱정 마, 그리 허튼 사람 아니야. 넌 누굴 바보로 아니 ”
발끈하여 늘어놓는 변명에 서훈은 더욱 서진이 한심해진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스탠포드 마치고 그 팀에 있었으면 거기 브레인이야. MS 회사 미래 전략과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부서라고. 그 학벌에 그런 경력의 사람이 왜 세림 작은 팀에 평직원으로 있어 ”
“그건, 나도 몰라. 대답 안 해 줘.”
“아, 정말……. 팀원이 어떻게 입사하는지도 못 알아봐 ”
“정기 채용이 아니었고, 윗선에서 데려온 사람이라…… 개인적으로 알아보니 경력은 맞더라.”
자신 없게 덧붙이는 서진의 대답에 서훈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걸어갔다. 서진이 잰걸음으로 서훈의 옆에 따라붙었다.
“서훈아, 그 사람 맘에 안 들어 ”
“내 맘에 안 든다고 그만 만날래 ”
남자의 품에 안겨 키스하던 서진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다.
“……아니.”
“그럼 묻지 마. 매번 뭐하러 물어 누나 맘대로 할 거면서.”
서훈은 편치 않은 기분으로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갔다. 따라오는 기색이 없어 쳐다보니 서진은 한참 뒤처져서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처음으로 서진이 좋다고 말한 남자였다. 5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남자 문제라 짐작하는 터였다. 그때의 일을 아직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서진이 남자에게 마음을 열었는데 기뻐하지 못하고서……. 서훈이 뒤돌아 서진에게로 다가갔다.
“왜.”
“가자.”
“먼저 가. 꼴 보기 싫어.”
서진이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말하였다. 서진이 이런 식으로 화를 낼 때면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다. 힘들었겠지. 제 말대로 서진이 바보도 아닌데, 어쩔 수 없었겠지.
“미안해, 작은누나.”
“윤서훈, 너 짜증 나.”
“작은누나, 화 많이 났구나.”
서훈이 고개를 기울이며 서진과 눈을 맞추자, 서진이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오늘 좀 피곤해서 그래.”
서훈이 서진의 어깨에서 핸드백을 내렸다. 체인 장식 백이 꽤 묵직하다.
“괜찮아.”
“들어 줄게.”
조금만 더 따뜻한 느낌의 사람이었다면, 조금만 더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걸. 석연치 않은 말도 석연치 않은 행보도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 서진의 핸드백을 팔에 걸고, 엄마의 맥주와 오징어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가락에 걸고서 서훈은 서진과 나란히 걸었다.
“그 남자, 잘생겼더라. 멋있던데.”
“정말 ”
숨기려고 차분한 목소리를 내지만 금세 들뜨는 눈을 보며 서훈이 웃어 보였다.
“잘해 봐. 너무 빠지지는 말고.”
봄도, 밤도 깊어 가는 시간이다. 선들거리는 바람으로도 답답한 속이 도통 가라앉지 않는다. 서훈은 비닐봉지 속에 있는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소양 여사한테 한 캔은 달라고 해야겠다.
***
서진이 한혁과 애인이 되기로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김정현 검사와는 이후로 한 번 더 통화했다.
‘중독된 남자와는 어떤가요.’
‘잘 지내요.’
‘혹시 제가 역할을 했나요 ’
서진이 답을 하지 못하고 웃자, 검사는 건투를 빌었다. 그쪽에서 무엇이라 마무리했는지 서진에게나 소양에게 들리는 말은 없었다. 서훈도 한 번씩 농담처럼 연애 잘되시나,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서진의 애인, 최한혁에게 자신은 사무실에서는 여전히 윤서진 팀장이었고, 사무실 밖에서는 무슨 일로 그렇게나 바쁜지 저녁마다 약속이 있는 눈치라 서진은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지난 주말에도 전화만 몇 번 하고 도무지 만날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회사 근처에서 몇 번 점심을 단둘이 먹은 것, 그리고 주말에 잠깐 얼굴을 보며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같이한 것까지 전부 다 해 손을 꼽아 봐도 열 번 남짓이었다. 물론 그와 같이하는 시간도, 오직 서진과 한혁 두 사람만 세상에 존재하는 듯이 집중하는 그의 키스도 더없이 감미로웠지만.
‘뭐가 애인이야.’
불퉁한 소리가 목 끝까지 넘어올 때쯤이면 반드시, 그 남자는 잊지 않고 확인을 해 준다. 무언가 물어보는 척 자리에 다가와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서진의 머리나 목덜미를 쓰다듬거나 손을 살짝 쥐어 주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로 돌아가서 기함하게 하였다.
하지만 키스나 스킨십으로도, 가끔 데이트를 할 때면 감동을 주는 세심한 배려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기에 당연히 느낄 수 있는 불안감이 아니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 이내 온몸을 덮어 버리는 그 불안감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한혁에게는 만물의 싹을 틔워 내는 봄날의 따스함과 만물을 시들어 얼어붙게 만드는 겨울의 혹독함이 공존하였다. 봄날의 나른함에 젖어 들다가도 가끔 얼음 조각처럼 파고드는 선득한 느낌은 서진을 움칫거리게 했다. 처음 그를 보았던 날, 낮고 허스키한 웃음의 공명이 심장을 후벼 대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가끔 서진을 앞에 두고도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공허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못마땅한 듯 손을 들어 미간을 가릴 때마다 저돌적으로 서진에게 몸을 부딪쳐 올 때마다 심장이 아프게 조여 들곤 하였다. 철저하게 냉소적인 한혁은 눈의 여왕과 입맞춤을 한 소년처럼 지켜보는 서진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너무 빠지지는 말고.’
서훈의 충고는 처음부터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를 받아 주는 선 따위, 네가 정할 수 없어. 내가 밀고 들어가면 넌 무너질 거야.’
서진은 매일 매 순간 새로이 무너졌다. 그의 말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