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26
26화.
26화
카운터 앞에서 남자가 카드를 내밀었다.
“잠시만요.”
서진은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 10퍼센트 봉사료가 계산된 금액, 9,900원에서 100원을 더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계산서 위에 올렸다. 당황스러워하는 직원을 향해 예의 바르게 웃었다. 직원이 서진을 향해 물었다.
“주차하셨습니까 ”
“아뇨. 커피 맛있었어요.”
서진이 남자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걸어 나갔다. 냉철한 검사가 뒤를 금세 쫓아왔다. 회전문 앞에서 서진이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다보았다.
“김정현 검사님, 가서 일 잘 보세요.”
서진은 파이팅이라도 하듯이 양 주먹을 쥐었다. 회전문 안으로 들어가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영화나 볼 것을.
“서진 씨.”
서진이 움찔 놀라며 멈춰 섰다. 천천히 돌아가던 회전문도 멈췄다. 발소리도 없이 김정현 검사가 따라 들어와 서 있다. 멈춘 회전문 때문에 다른 칸에 있던 사람들이 넘어다보았다. 검사가 서진 옆으로 바싹 붙어 서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문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가시죠.”
“잊은 게 있어서 다시 들어가야겠어요.”
서진이 방향을 틀어 호텔 안쪽으로 향하였다.
“어이없네.”
정현의 말에 서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정현이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잠시만 이야기하죠.”
얼결에 몸이 끌려 밖으로 나왔다. 주말이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호텔 입구에서 서진은 잡힌 손을 뿌리쳤다.
“뭐가 문제죠 ”
정현이 물었다.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사건 때문이라고 양해를 구했잖습니까.”
“그런데요 ”
정현이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사건은 미루죠. 뭐 하실래요 ”
“김정현 검사님, 사건 보러 가세요. 저는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어요.”
“모셔다 드리죠.”
“싫어요. 택시 많은데요, 뭘.”
“택시라 생각하고 타세요, 그럼.”
“주차장까지 가기도 귀찮고 피곤해요.”
아, 끈질긴 놈. 서진은 햇살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손부채를 만들었다.
“잘됐네요. 자리 없어서 발렛 서비스 줬는데.”
정현이 티켓을 직원에게 건네었다.
“승부욕 엄청나네요.”
서진이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정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하긴, 져 본 적 없죠 ”
“없지.”
말이 반 토막이다.
“어떻게 하면 오늘도 이기는 게 되나요 내가 오점을 남겨 드릴 순 없잖아요 집에 돌아가면 제가 너무 마음에 들었으나, 검사님이 절 별로로 생각한다고 말씀드릴게요. 됐나요 ”
서진이 빈정거렸다. 정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교수 하는 여자 소개받으세요.”
정현이 아, 그런 거였어, 하는 표정이다.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자격지심을 건드렸나 봐.”
“재수가 없으려니.”
서진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성질이 보기보다 대단하네.”
“네, 맞아요.”
정현의 차가 두 사람 앞으로 멈춰 섰다.
“타시죠.”
정현이 서진의 팔목을 붙잡았다.
“놔요.”
서진이 힘을 다해 뿌리쳤다. 뜨거운 오후 햇살이 이마를 쿡쿡 찔렀다. 한심하고 짜증 나고 창피하고, 호텔 입구에서 소리라도 지를 지경이다. 핸드백에서 요란하게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이유 없이 눈물이 솟을 것만 같다.
“응.”
-선 잘 봤어
“아니, 엉망이야. 지금 통화 못해.”
목소리가 엉망으로 가라앉아서 나왔다. 서진은 핸드폰을 끊고 정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남자친구 ”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아니요, 제가 중독된 남자요.”
“서진 씨, 의외로 재미있는 사람이네.”
“네, 보기보다 성질 더럽고 의외로 재미있는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잘 가세요, 김정현 씨.”
서진은 뒤돌아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주차 요원이나 호텔 직원, 흘끗거리는 사람들 시선 속에서 택시를 잡으며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회전문을 지나와 로비에 주저앉았다. 꼼짝도 할 수 없이 피로했다.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손을 모아 머리를 지탱했다. 잠시만 눈을 감고 좀 쉬고 싶다. 귓속에서 지잉지잉,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 벨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서진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한혁 씨.”
-아직 호텔이야
“응.”
-어디
“신라.”
-그건 알고 있고. 라운지에 없는데
“응 ”
서진이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저만치서 걸어오는 남자가 보인다.
뭐지, 중독 현상으로 헛것도 보이는 걸까.
서진이 놀라서 급히 일어서다 어찔한 기운에 눈을 감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빈혈약 처방받았어야 했는데…….
회사를 나와 한혁을 무작정 따라갔던 날 여기 중식당에 왔었지. 까마득하게 예전 일인 것 같다.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더듬거리며 소파 등받이를 짚는데 한혁이 서진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인지 묻는 눈을 보며 답했다.
“현기증.”
“왜.”
“어제 누구 덕에 잠을 하나도 못 잤거든.”
“그래서 느낌 좋던 선도 엉망이야 ”
“그래, 숙면을 못 취해서 짜증도 나고 화장도 뜨고. 너 때문이야.”
한혁이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고는 서진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화장 공들여 했네. 옷도 그렇고.”
섬세한 레이스 장식과 여성미를 극대화시키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브랜드 블라우스에 허리선이 강조되는 몸에 꼭 맞는 스커트 차림이었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힐까지, 전형적인 맞선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는 기본이지. 원래 나, 브랜드 행사 갈 일 있으면 더 화려하게 화장하고 입어. 돈 벌어서 옷만 사.”
“예쁘게 화장하고 옷 입었는데 좋은 데서 밥 사 줄까 ”
“아니, 컨디션 너무 별로야. 집에 가서 쉴래.”
“데려다줄게.”
“오늘 윤서진 남자 복이 터졌네. 데려다준다는 남자도 많고.”
서진이 자조하였다.
“귀찮아. 택시 탈래.”
서진은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한혁이 바싹 붙어 따라왔다. 회전문으로 향해 가다가 중간에 서서 서진이 돌아다보았다.
“최한혁.”
“응 ”
“한 번만 물어볼 거야. 농담하지 마. 돌려서 말하지 마. 정확하게 답해.”
“알아, 오직 진실만을.”
한혁이 오른 손바닥을 보이며 선서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선보는 게 신경 쓰였어 12시 넘어 전화하고, 결국 여기로 찾아올 만큼 ”
“응.”
“그렇다면 우리는 사귀는 사이이거나, 막 시작하는 연인이거나 그래야 해. 너는 지금 선 밖에 서 있어. 그러면서 끝없이 나를 흔들어. 긴장감 있고 흥분되고 좋아. 그런 느낌이 계속 쭉 좋을 남자도 있겠지. 하지만.”
서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윤서진은 최한혁과 둘 중 하나밖에 못하겠어. 애인 혹은 남자 사람.”
한혁이 말없이 서진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서진의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정현 검사]서진이 버튼을 눌러 벨 소리를 죽였다.
“네 말대로 너를 어디까지 받아 줄까는 내가 정해. 나도 강요하지 않아. 너 역시 유보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유보해. 마음이든 육체든 뭐든 너 좋을 대로. 하지만 관계는 선택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아니 다만 일주일이라도 나한테 특별하게 굴고 싶으면, 너와 나는 연인이어야 해. 그게 아니라면, 선 밖에서 얌전히 남자 사람으로만 존재해. 계속 이런 식은 내가 못 견뎌 내. 내가 너 피곤해서라도…….”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핸드폰을 들어 한혁의 눈앞에 보였다.
“이 남자 만날래.”
[사과하고 싶어서 전화합니다. 받아 주세요.]서진은 남자의 메시지를 무시한다. 전화가 다시 울린다. 아, 집요해. 서진은 힐을 바닥에 탁탁 굴렀다. 미칠 듯이 짜증이 난다.
[중독남 바꿔 보는 건 어때요.]한혁이 팝업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읽었다. 전화벨이 다시 울리자, 한혁이 핸드폰을 낚아채어 전원을 꺼 버렸다. 서진은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느리게 돌아가는 회전문 앞에 서서 말했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제안해.”
“뭘.”
“In or Out.”
서진이 먼저 회전문으로 들어섰다.
“들어오거나, 선 밖에 서 있거나 네 선택이야. In ”
서진은 회전문 안에서 뒷걸음질 치며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or Out…….
회전문이 반 너머 돌아갔을 때, 서진은 우뚝 서 있는 한혁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회전문 밖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온한 오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후련해.
참았던 숨이 기침처럼 터졌다. 갑자기 회전문이 멈추었다. 응 고개를 돌리기 전에 문을 잡고 섰던 남자가 미끄러지듯 회전문의 벌어진 틈으로 들어왔다.
“In.”
한혁은 다짜고짜 서진의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잔뜩 신경이 곤두선 사람처럼 급하게 키를 받아 들고 직접 발렛 파킹 장소까지 빠르게 걸었다. 서진의 다섯 손가락을 제 것과 꼭 맞물리게 깍지로 끼고서 몇 번이고 다시 맞물리게 잡으며 걸어갔다. 한혁이 조수석 문을 열어 SUV에 서진을 태우고는 앞으로 돌아와 운전석에 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깍지를 꼈던 손가락이 허전해 서진은 제 양손을 맞물렸다.
“윤서진.”
서진이 한혁을 향해 고개를 천천해 돌렸다. 한혁이 손을 내밀었다. 서진이 양손을 모두 맡기자 하나씩 얽기 시작했다.
“네가 들어와 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남자의 긴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것을 집어넣었다. 손을 잡는 행위가 이토록 은밀하고 관능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는지 상상하지도 못했다. 맞물린 손은 남자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조수석 좌측 상단에 있는 버튼이 서진의 왼손 등으로 눌러졌다. 다른 손은 무릎 위에 있다. 지이잉, 작은 소리와 함께 등받이가 뒤로 젖혀졌다. 발끝까지 긴장으로 힘이 바싹 들어간다.
“그만해.”
선팅이 짙게 된 창 너머 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나뭇잎 그림자가 가슴 위에 어른어른 그림자를 떨어뜨렸다.
“후회할 거야.”
한혁이 몸을 기울여 말하였다. 뺨에 솜털이 일어섰다.
“아니.”
비웃듯 입을 부딪혀 왔다. 이런 키스를 나누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몸이 저절로 뒤틀린다. 뒤챌 때마다 바싹 붙은 남자의 몸에 동그란 가슴이 눌려진다. 호흡이 가빠진다. 숨을 쉬려 입을 벌릴 때마다 더 깊이, 침범당한다. 입술을 맞대고 남자가 물었다.
“후회해 ”
“아니.”
남자가 나지막이 웃었다.
“나를 받아 주는 선 따위, 네가 정할 수 없어. 내가 밀고 들어가면 넌 무너질 거야.”
서진이 손가락을 빼어 내려 움직였다.
“꽉 잡아. 내 손. 그게 최선일 테니까.”
입술이 다시 닿는 순간, 깍지에 힘을 더하였다.
맞붙은 손이 배어 나온 땀으로 끈적해질 때까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한혁이 물었다.
“이제, 뭘 하고 싶어. 나같이 근사한 애인이랑.”
“배고파.”
서진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말하였다.
“최고로 좋은 곳으로 가자.”
화려하고 기나긴 코스가 이어지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샴페인은 서진만 마셨다.
서진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혁은 동네 놀이터 근처에 차를 세웠다. 아래에 스프링이 달려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노란 오리와 빨간 목마, 간단한 시소가 있으니 놀이터는 맞으나, 동네 주민을 위한 쉼터에 가까웠다. 작지만 깨끗하게 가꾸어진 화단에서 은은한 꽃냄새와 싱싱한 식물의 향이 났다. 싱고니움과 푸미나 사이사이에 핑크색과 백색의 베추니아가 소담하게 피어올랐다. 여섯 개의 나무 기둥 위로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성글게 격자로 놓여 있었다. 기둥을 감고 오르며 제법 무성해지기 시작하는 담쟁이 넝쿨은 곧 훌륭한 차양이 될 것이다. 최근 지역구 의원이 신경 써서 조성한 것이지만, 아이들이 별로 없고 주로 차로 이동하는 동네 특성상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혁이 열어 둔 창으로 밤바람이 들어왔다.
“여기 조금 있다가 갈까 ”
“잠깐 내릴래 밤공기도 시원할 거 같은데.”
서진이 차 문을 열자 한혁이 서진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