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0
30화.
30화
서두른 덕분에 7시가 조금 못 되어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서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다가 베이커리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정확하게 만날 장소도 정하지 않아 전화라도 해 볼 참이었다. 어젯밤 한혁이 늦게 전화를 걸어 와 무작정 ‘아침 7시 15분, 기차역에서 보자’ 약속만 했지 도무지 사람들이 들어찬 서울역 어디에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개찰구 위 커다란 전광판의 오렌지색 글자들을 읽다가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한혁은, 문자도 톡도 먼저 하지 않는다. 한글 자판이 익숙하지 않아 한글로 보내면 영어로 간혹 답을 하긴 하지만 주로 통화를 선호한다.
“여보세요 나 도착했는데 어디에서 볼까 ”
-어디 찾아갈게.
“여기, P 베이커리 앞인데.”
-응. 알았어.
서진은 전화기를 들고 할 일 없이 톡톡 발장난만 했다. 기차 여행이라니. 언제 기차를 타 봤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대학교 때 MT를 가느라 경춘선 열차를 탄 것이 아마도 마지막인 듯하다. 기차 여행은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다.
“여기.”
“어 ”
따뜻한 커피향이 코끝에 들어왔다. 흰 셔츠에 청바지차림의 남자가 커피를 내밀고 서 있다. 한혁을 처음 봤을 때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왜 웃어 ”
“처음 봤을 때 생각나서. 그 후론 이런 차림 못 봤으니까.”
너무 어려 보여서 학생인 줄 알았는데. 이제 머리가 좀 길어져 그나마 조금은 나아 보인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탄탄한 근육 잡힌 가슴과 넓은 어깨는 분명 고운 얼굴과는 다르게 건장한 남성이다.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신축 역사의 창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햇빛을 온전히 받아 얇은 셔츠 아래로 다 감추어지지 않는 몸의 실루엣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서진이 시선을 낮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 여기서 커피 사고 있었는데.”
“왜 말 안 하고.”
“가자. 늦겠어.”
한혁이 등에 팔을 두르며 서진을 끌었다.
“오늘 의상, 너무 유혹적인데.”
한혁의 시선이 가슴께에 머물자 긴장으로 굳는다.
“놀리지 마.”
“무척 예쁘지만, 나 만날 때만 이렇게 입어라.”
한혁이 서진의 귓가에 속삭이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귓불을 스치듯이 깨물었다.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같이 기차는 서울역을 출발했다. 기분 좋은 진동이 등으로 전해졌다.
“왜 울산이야 ”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너랑 같이 보고 싶은데. 아마 없을지도 모르고.”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이래 ”
“이제 6월이니 있다 하더라도 아마 아직 안 피었겠다.”
“울산에 유명한 꽃이 있어 난 못 들어 봤는데.”
한혁이 웃으며 서진을 감쌌다.
“아니,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 피던 꽃.”
“한혁 씨 울산에서도 살았었어 ”
“잠깐 동안.”
서진의 팔을 가만가만 쓸어 올리며 한혁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좀 기대서 졸아. 잠 못 잤지 ”
“응.”
서진이 눈을 감았다.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길러지던 한혁은 돌 무렵 정 회장이 생모와 같이 내친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단지 언론과 세림 일가의 눈을 피해 양육되던 한혁은 다섯 살 무렵 서울로 왔고 생모의 오빠, 한혁의 외삼촌 집에 숨어 지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고 누구 하나 제대로 말해 주는 사람도 없어, 급히 미국에서 한혁을 데려와 몸을 숨길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정도였다. 아마도 집요한 언론의 추적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당시 쏟아지는 스캔들을 헛소문으로 잠재우며 아들의 존재나 세림과의 관계를 부정하던 배우 장은실의 아들로 추측되는 한혁의 사진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잡지사 기자에 의해 찍혔고, 필름을 뺐고 돈을 쥐여 주며 무마하는 소동 이후, 갑자기 외삼촌네는 한혁을 데리고 울산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한혁은 두 번째 여름이 끝나기 전에 정 회장 집으로 들어갔다.
울산에서 지낸 이 년 남짓 시간 동안 한혁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작은 아파트 단지에 심어졌던 분꽃이었다. 계속 서울에서만 생활했던 외숙모는 갑자기 낯선 울산으로 생활을 옮기자 휑한 아파트 단지 화단 전체에 분꽃을 심었다.
‘한혁아, 여름이 되면 아주 예쁜 꽃이 필 거야.’
그해 여름, 거짓말처럼 기다란 아파트 화단에 하나 둘 짙은 핑크색과 흰색의 분꽃이 피기 시작해서 온통 꽃 무리를 이루었다. 분꽃은 아침이면 오므렸다 어스름해지는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활짝 피어올랐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온통 화단 주변을 뒤덮었다. 여름 밤, 바람이라도 불라 치면 열어 놓은 발코니 문으로 분꽃 향이 집 안까지 은은하게 들어왔다. 유치원도 가지 않고 친구도 없었던 한혁은 외숙모와 손을 잡고 분꽃이 핀 화단을 걸어가며 꽃 하나하나에 말을 걸었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꽃이 떨어진 자리에 씨앗이 까맣게 맺히자, 그것들을 따 모아 빈 쿠키 상자에 보물처럼 간직했다. 처음 서진에게 몸을 기대었을 때 한혁은 서진의 포근한 체취에서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분꽃 향을 기억했다.
잠시 잠에 빠졌던 서진이 눈을 떴다.
“좀 더 자도 돼.”
“아니. 충분해.”
서진이 고개를 들며 씩씩하게 말했다.
“이젠 네가 기대. 피곤해 보여.”
“괜찮아.”
몇 번 응 응 어깨를 내밀며 재촉하자, 한혁이 웃으며 얼굴을 가볍게 기대어 왔다.
“서진아.”
“응 ”
“너한테서 분꽃 향이 나.”
“분꽃…… 보러 가는 거야 ”
대답은 없었지만 목덜미에 묻은 그의 얼굴이 조금 움직였다. 눈을 감은 얼굴에 외로움이 번진다. 서진이 손을 들어 얼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얇은 종이가 물에 젖어 드는 것처럼 스며드는 외로움을 걷어내려 그녀의 손가락이 고요하게 움직였다.
울산은 처음이었다. 부산과 비슷한가, 서진은 특별히 다를 것 없는 도시 풍경을 눈에 담았다. 택시 속에서 한혁은 아이처럼 두리번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많이 바뀌었네요.”
“오랜만에 오신 깁니꺼 ”
“중학교 때 와 보고 처음이니 15년이 넘었네요.”
미국을 떠나기 전, 울산에 무작정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기억에 울산은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소담한 곳이었다.
“아이고, 그라마 세월이 얼만데예, 울산만 그대로 있으라꼬예 ”
“그렇죠.”
한혁이 웃으며 고층 건물이 가득 차 버린 울산 시내를 보았다.
기사 아저씨 말대로 택시에서 내려 큰길을 조금 걷다가 오른쪽 첫 번째 골목을 들어가니 5층짜리 아파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 검정색으로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아파트 이름이 외벽에 가로로 쓰여 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연보라색 페인트는 색이 바래고 벗겨져 본디 색상을 잃어버렸고 세로로 균열이 생긴 건물에는 재건축 조합이 붙인 현수막이 세로로 늘어뜨려 있다. 차들이 들어서 주차장처럼 되어 버린 아파트 사이 길 옆으로는 화단이 길게 이어졌다. 어린 시절 한참을 걷고 걸어, 길어만 보이던 그 화단이 사실은 작은 아파트 두 동 정도의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한혁은 마음이 바빠 급히 화단에 다가섰지만 이내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직 피지 않았네. 아마 이게 분꽃일 텐데.”
서진이 다가와 연녹색 이파리가 싱그러운 무릎 높이의 작은 식물을 보았다.
“예전에는 이 화단 전체가 분꽃뿐이었는데. 지금은 여기만 있는 거 같아.”
서진은 풀이 죽은 듯한 한혁을 한 번 두드려 주고 화단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앞서서 걸어가더니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한혁 씨, 여기 여기 와 봐.”
서진이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자리 앞에 핑크색 꽃봉오리가 하나 보였다.
“이거다. 그치 ”
“맞아. 분꽃이야. 와아, 정말 분꽃이야. 꽃이 피기 시작했구나.”
한혁이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건 해가 지면 활짝 필 거야.”
“그래 ”
“응, 아침이면 오므리고 있다가 저녁이면 피기 시작해. 그래서 영어로는 four o’clock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해.”
한혁이 서진을 일으켜 세웠다. 어깨를 살짝 감싸며 천천히 걸어갔다.
“어릴 때 생모가 날 키울 수 없는 처지라 미국에서도 살았고 여섯 살 무렵에 여기서도 잠깐 살았어. 외숙모님이 날 키워 주셨어. 그 후론 못 뵈어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좋은 분이셨어. 그분이 이 화단 가득하도록 분꽃을 심으셨는데. 저녁이면 어둑한 화단이 분꽃으로 환해졌어. 여름이면 바람에 날리는 포근한 분 향기가 좋아서, 한 저녁을 화단에서 놀다가도 다시 베란다에 앉아 잠들 때까지 화단만 바라보았어.”
서진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기대었다. 고작 여섯 살, 아빠도 엄마도 없이 하염없이 분꽃만 바라보고 있을 어린 한혁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가슴이 아렸다. 애써 표정을 털어 내며 서진이 미소 지었다.
“여름에 꽃이 다 피었을 때 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난 분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네.”
“진달래랑 비슷한가. 잘 모르겠다. 여름에 피면 꺾어다 줄게.”
“그럼 생일 선물로 분꽃 꽃다발 만들어 갖고 와라. 내 생일 한여름이거든.”
“그럴게. 그런데 좀…….”
“응 안 돼 ”
“그 꽃, 다른 이름이 있어. 선물하기는 좀 그런데.”
“뭔데 ”
“밤에만 핀다고, 첩을 빗댄 이름이 있어. 생모가, 몇 달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 한 그분이 찾아왔을 때 분꽃을 꺾어 온 나를 보고 숙모에게 악을 쓰더라. 첩살이 꽃 키우는 저의가 뭐냐고.”
한혁은 당황스러워하는 서진을 향해 무던하게 웃었다.
“첩살이, 첩살이. 말도 서툰 어린애가 그 말뜻을 알 리가 없잖아.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 안 해 주던데.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지.”
앞서 걸어가는 한혁을 서진이 붙잡았다.
“응 ”
돌아보는 한혁을 향해 손을 꼭 쥐고서 말했다.
“꼭, 줘. 내 생일 선물로. 나한테 분꽃은 네가 좋아하는 꽃이고 너랑 나 같이 보러 왔던 꽃이고 그리고…….”
“그리고 서진아, 너한테서 분꽃 향이 나.”
한혁의 말에 서진의 목덜미가 분꽃처럼 물들었다. 한혁은 서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아파트 사이 길을 빠져나갔다.
완전히 캄캄해져서야 도착한 서울역에서 서진은 머뭇거리며 한혁의 표정을 살폈다. 돌아오는 길 별다른 내색은 않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이 마음에 내내 걸렸다. 다른 고민이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모습에 막막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손을 쥐어 보아도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도, 그가 서진을 한 팔로 감싸 부드럽게 머릿결을 넘겨 주어도 기차에서 내리면 금방이라도 눈에서 사라질 사람만 같았다. 조금씩 덜컹거리는 규칙적인 기차의 진동에 따라 서진의 마음도 불안으로 흔들거렸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며 한혁은 서진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았다. 손이 닿은 자리에서 따뜻한 열꽃이 피었다.
“서진이 피곤하겠다.”
“아니, 전혀. 택시 많네, 타고 갈게.”
기차역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를 타려 서진이 문을 열자 그가 먼저 차에 올랐다.
“타라. 데려다줄게.”
택시 안에서 한혁은 별말 없이 서진의 팔만 자꾸 쓸었다.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한혁은 이윽고 입을 뗐다.
“서진아.”
“응 ”
“다음에 이야기할게. 오늘 못했네.”
“뭘 ”
고민을 감추고서 한혁이 싱긋 웃었다.
“일찍 깨워 미안했어. 얼른 들어가.”
서진의 눈이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한혁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잘 자.”
차에서 내린 서진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벨을 누르고 곧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가 골목을 벗어났을 때 한혁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여기 주변 한 바퀴만 돌고 방금 차 세웠던 곳으로 다시 가 주시겠습니까 ”
한혁은 기사가 무어라 반문하기 전에 좌석에 깊이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니, 차는 어떻게 하시고.”
오 집사가 급히 대문까지 내려와 한혁을 맞았다.
“택시 타고 왔어요.”
“부르시지 않구요.”
“괜찮습니다.”
한혁은 현관에 나와 있는 연화를 보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어요 ”
“왔니 좀 늦었지만, 저녁 준비할까 ”
“아니요, 먹고 왔습니다.”
“왜 매번 그래. 집에서 먹지 않고서.”
언제나처럼 호수같이 고요한 얼굴로 그를 맞는 연화 옆에는 돌아가신 최석원 부회장을 쏙 빼닮은 예린이 서 있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이제 막 여자 티가 나기 시작하는 예린은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늘 한혁에게는 귀여운 동생이다. 어린 나이에도 단 한 번도 질투도 하지 않을 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담뿍 받는 예린을 그 역시 더할 수 없이 귀여워했다.
“와아, 오빠 오랜만이네.”
예린이 달랑 다가서며 팔짱을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