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3
33화.
33화
“나, 무겁단 말야. 요즘 많이 먹었더니 좀 찐 거 같기도 하고 신경 쓰여.”
“걱정 마, 하나도 안 무거워.”
한혁은 조금 웃었다.
6년 전 보스턴의 눈길에서 미끄러졌을 때도 그랬던가. ‘무거워서 미안하다니까!’ 그의 등에 업혀 오기를 부리는 서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 마음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녀는 아직도 그를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지만. 영원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서진의 부드러운 가슴의 곡선 위로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쿡쿡 불규칙하게 요동친다. 견디기 힘든지 서진은 몸을 살짝 틀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자.”
서진은 몸을 맡긴 채, 그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왜…… 무슨 일 있어 ”
포근한 그녀의 가슴에서 분꽃 향이 스며 나왔다. 잠시만 이대로 취하고 싶다.
서훈은 삼류 양아치라고 비난했다.
서진아, 너는 나를 얼마나 잔인하게 비난할까. 어떻게 매달려야, 네가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한혁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서진아.”
“응 ”
“저녁 뭐 먹고 싶어 ”
“오늘 저녁은 다른 약속 없어 ”
한혁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녁도 내일도 약속 없어. 너랑 있을 거야. 우리, 뭐 할까.”
“으음, 갑자기 그러니까 잘 모르겠는데. 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야 ”
서진은 어린애처럼 잔뜩 부푼 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좋아라. 꼭이야, 꼭. 꼭, 꼭! 무르기 없기. 그럼 퇴근 시간까지 생각해 놓을게.”
서진이 그의 다리에서 달랑 일어섰다.
“먼저 갈게. 빨리 퇴근하려면 서둘러야지. 이제부터 머리랑 손에 모터 달고 일할 거야.”
돌아서 가려던 서진이 몸을 숙여 그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서진의 모습이 철문 뒤로 사라졌다. 한혁은 손가락을 천천히 펴 보았다가 이내 접었다.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에 그의 다리에, 손에 그리고 가슴에 서진은 향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지하 주차장에서 만났다. 서진이 영화 예매 정보가 담긴 휴대폰 메시지 창을 열어 보였다.
‘영화 예매했다. 금요일이라 자리가 없어 비싼 데 했어. 저녁은 영화 보면서 대충 먹어.’
서진은 깔깔 웃기도 하고 무섭다고 품을 파고들기도 했지만, 한혁은 영화에 대해선 감상이 없다. 줄곧 뭘 보고 들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팔짱을 끼고 상영관 주차장에 들어섰다. 서진은 영화 내내 집중하느라 한 모금도 못 마셨다며 얼음이 녹은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차 문을 열며 한혁이 물었다.
“그렇게 재밌었어 ”
“응, 완전, 완전! 혹시 넌 별로였어 ”
“재밌었어.”
“금요일이라 예매하기 어려웠는데 여기라도 남아 있어 다행이야. 잘 모르는 영화라 기대 없이 봤는데 다행히 영화도 재밌었고.”
“……나랑, 영화관에 가고 싶었어 ”
“그래, 너 나랑 영화도 한 번 안 본 거 알아 ”
서진은 뿌루퉁한 표정이었다.
“영화 말고는 하고 싶은 거 없어 ”
한혁이 안전벨트를 채워 주며 물었다.
“뭐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얼마나 많은데.”
서진은 스트로로 아이스티를 삼키다가 눈초리를 살짝 올렸다.
“한번 말해 봐.”
“여행도 가고 싶고. 근데 기차 여행 했으니 그건 좋아. 야경 좋은 곳에서 칵테일도 마시고 싶고 포장마차서 떡볶이도 먹고 싶고, 팔짱 끼고 동대문 새벽 시장도 돌아다니고 싶고 놀이공원도 가고 싶고, 그리고…….”
서진은 열심히 해 온 숙제를 검사받는 착실한 학생처럼 말한다.
“그럼 오늘은 칵테일, 야경 좋은 곳. 그 정도로 괜찮을까 ”
“응, 좋아.”
한혁은 주차장 건물을 빠져나가며 속도를 높였다.
서진을 데리고 한혁이 도착한 곳은 한남동의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여기서 ”
“야경은 좋아. 진토닉 같은 건 어설프게 만들어 줄 수도 있고, 와인으로 대신해도 된다면 더 좋고.”
한혁이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한혁 씨 집 ”
“아니, 지금 내가 잠시 사는 곳.”
더 이상 서진이 무언가 말하기 전에 그가 어깨를 감싸며 걸어갔다.
27층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열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이라 하기엔 너무 넓고 커다란 공간이 드러났다.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그곳은 필요한 것은 다 갖추어진 듯했지만 꼭 급조한 무대 세트장처럼 딱딱하고 차가웠다. 서진은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툭 터진 거실 공간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의 말대로 거실이 끝나는 곳, 통유리로 한눈에 들어오는 한강의 야경은 감탄할 만했다.
“와, 정말이네. 이런 뷰가 있구나.”
한혁은 뒤따라 들어서면서 벽에 붙어 있는 리모컨을 들어 거실 두 곳의 조명등을 밝혔다. 부드러운 노란색의 빛이 스며들자 거실이 한결 덜 차가운 느낌이다. 언제나 이 공간에 홀로 들어서면 그러하는 듯 그는 거실 장 한편에 있는 묵직한 무게감의 날씬한 리모컨을 들어 CD 버튼을 눌렀다. 거실의 너른 벽 중앙 왼쪽으로 자리 잡은 CD플레이어의 제일 윗칸을 감싸며 오렌지색 불빛이 부드럽게 원을 그렸다. 스피커는 예민하고 화려한 질감의 음색을 만들어 내어 바이올린과 피아노 협연곡 사운드는 마치 차가운 페리에처럼 청아했다.
“와인 ”
한혁이 레드와인이 찰랑이는 잔 두 개를 들고 걸어왔다.
“고마워.”
서진이 잔을 받아 들며 미소를 보였다. 와인에서 흙 냄새와 부케 향이 뒤섞여 들어온다. 향만으로도 취할만큼 근사하다.
“무슨 와인이야 ”
“뭐였더라. 아마 샤또 오브리옹 취향을 잘 몰라서 무난한 맛으로 오픈했어.”
서진이 가만히 보고 있자 한혁이 1인용 의자로 서진을 이끌었다.
“여기 앉아. 이 집에서 제일 야경이 잘 보이고, 제일 편한 의자야.”
서진이 천천히 잔을 비웠다. 그동안 한혁은 계속 창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한혁과 이렇게 오랫동안 긴 침묵 속에 있었던 적이 없다. 서진이 조용히 일어서 한혁에게 다가갔다. 서진의 잔을 보고 한혁이 물었다.
“한 잔 더 할래 ”
고개를 저었다. 한혁이 잔 두 개를 탁자 위에 두는 동안 서진은 끈질기게 한혁을 쳐다보았다.
“와인과 야경 때문에 날 여기 데려온 거야 ”
“아니.”
단호한 답이다.
“그럼 ”
“네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네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
“응 ”
한혁이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서진이 품에 기대자 힘주어 끌어안았다.
“너 오늘 안 보낼 거야.”
“오늘, 이상해.”
서진이 무언가를 캐묻듯이 한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
“한혁 씬, 마치 룰을 정한 사람처럼 굴었잖아. 유보하는 것이라 생각했어.”
서진이 한혁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네 심장이 유보되었듯이, 육체도 유보 아니었어 ”
한혁이 쓰게 웃었다.
“아님, 다른 게 유보야 ”
“윤 팀장님, 머리 나쁘네. 내 심장은 기억하는데.”
한혁이 서진의 손을 잡아 제 심장 위에 정확히 올렸다. 박동이 손바닥을 두드린다.
“첫 번째 입맞춤으로 얼음을 녹이고, 두 번째 입맞춤으로 과거를 지우고…….”
한혁이 엄지손가락으로 서진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 입술로 말했잖아.”
엄지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와 혀끝을 건드리고 나갔다.
“이제, 세 번째 키스로 내가 뭐라고 했는지 대답해 봐.”
서진이 머뭇거리자 한혁이 허리를 끌어안고서 매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잊었어 ”
“내가…… 들어왔다고.”
“맞아.”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한혁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하였다.
“내가 너한테 들어갈 거야. 남김없이, 모조리.”
노골적인 말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혁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문 두 개를 차례로 열어 마스터룸으로 들어섰다.
“생각한 것을 하기 전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먼저 알려 줄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
한혁이 서진에게 콘솔 위에 올려 둔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
“열어 봐.”
봉투 안에는 시애틀행 1등석 오픈티켓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서진은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티켓과 한혁을 번갈아 보았다.
“네가 선택해.”
“알 수가 없어. 한혁 씨, 미국에 다시 가려는 거야 ”
“네가 원하면.”
“내가 왜 ”
“지금 네가 알고 있는 만큼의 나로 평생 있기를 원한다면.”
한혁은 의도적으로 서진에게서 떨어졌다. 티 테이블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서 서진을 바라보았다. 서진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섰다.
“내가 모르는 게 뭐야. 아니, 뭘 더 알아야 해 ”
“내가 누구 아들인지. 내 할머니가 누구인지.”
서진이 순간 굳은 듯 우뚝 섰다.
“최, 한혁.”
입술에서 남자의 이름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맞아, 내 이름.”
“설마. 한혁 씨 ”
절망적인 물음에, 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데리고 갔던 묘소 주인은 고 최석원 부회장이야. 나는 그가 아주 어린 나이에 얻은 아들.”
서진은 충격으로 고개를 저었다.
“월요일부터 그 팀으로 출근하지 않아. 예정대로라면 목요일, 상무이사로 발령 나.”
서진의 다물어진 입속으로 ‘상무이사’ 그의 새로운 직함만이 뱅뱅 돌았다.
“서진이 네가 싫다면 없던 일로 할게.”
“어떻게 ”
바싹 말라 버린 입술에서 초라한 물음이 나왔다.
“전처럼 살면 돼. 별 관심 받지 않고 미국에서 조용히. 정식 발령 전에 아직 여유가 있으니 상무 건은 없던 걸로 할 수 있어.”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냉정한 눈을 보며 서진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아니 너 할머니는 어떻게 하고.”
“많이 실망하시겠지.”
“말도 안 돼.”
서진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한혁이 서진에게 다가와 손을 내렸다.
“서진아.”
서진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나 쳐다봐.”
올려다본 한혁의 눈이 간절하게 호소한다.
“회사는, 나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아무리 고민해도 내 답은 하나야. 네가 더 중요해. 세림, 처음부터 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서진이 고개를 들어,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미국 가면 뭘 어떻게 할 생각이야.”
“시애틀로 갈 거야. 나 꽤 고액 연봉자였어. 먹고살 만해.”
한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너만 있으면…….
“가지고 싶었던 어머니, 아버지, 다 내 차지가 아니었어. 내가 너 하나는 가질 거야. 그러니 서진아, 네가 나를, 받아 줘.”
태연한 척하는 남자의 입술이 떨린다. 서진은 아픈 눈을 깜박였다.
세림…… 세한…… 정기훈…….
‘본데없는 집안.’
‘접근을 말아.’
5년 전 스위트룸의 휘황찬란하던 응접세트가 눈앞에 영상처럼 떠올랐다.
‘없어져서라도 우연히도 마주치는 일 없을 겁니다.’
보스턴의 눈길, 가슴을 할퀴던 바람. 심장이 끊어지는 고통으로 정신을 놓았던 작은 기숙사 방. 병실의 하얀 천장. 그리고 지금의 서진 앞에는 그녀 하나만 잡고 싶다는 한혁이 있다.
“나, 잠시만 시간을 줘.”
한혁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