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2
32화.
32화
“윤서훈!”
한혁이 얇은 스트레이트 잔을 부서질 듯 쥐고 있었다. 손마디 뼈가 하얗게 돌출되도록 잔만 쥐는 것 외에 다른 움직임은 없었지만 이마에 푸른 정맥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뼈마디가 으스러지도록 그러쥐고 있는 손도 터질 듯 솟아오른 핏줄도 부정하듯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정을 삼키려는 듯 그의 목울대만 크게 움직였다.
“너, 서진이 동생만 아니라면 오늘 반쯤 죽었을 줄 알아. 네 누나, 윤서진이 삼류 양아치한테 놀아날 사람이야 ”
“……진심이라는 말입니까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제발, 매도하지 마. 부탁이야.”
한숨처럼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의 진심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상처가 깊은 남자라는 것보다 감정도 상처도 삭혀 냄이 너무 익숙한 남자라는 것이 더 맘에 들지 않는다.
“어쩔 작정입니까. 제 누나 어떻게 할 겁니까.”
“내가 서진이한테 말할게.”
“당신,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한혁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서훈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
내일 내야 할 보고서를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이제 마지막이다. 워커홀릭이 맞나 보다. 일요일 내내 고치고 보충하고 다듬었다.
만족스러워, 기뻐. 내가 이런 멋진 보고서를 썼다니. 뿌듯함에 절로 웃음이 난다.
서진은 아아함, 소리를 내며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였다. 이제 침대에 점핑해서 죽은 듯이 자야지. 서진은 털썩 소리가 나도록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다가 노크 소리에 몸을 반쯤 일으켰다.
“네.”
“누나, 나야.”
“응.”
서훈은 아무 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오지도 않는다.
“뭐야. 가 버렸나 ”
서진이 문을 열자 서훈이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뜨린 채 서 있었다.
“왜 ”
“누나, 잠깐만 이야기할 수 있어 ”
“응. 들어올래 ”
서훈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샤워를 마치고 왔는지 서훈의 머리칼에서 물방울 하나가 톡 그의 허벅지로 굴렀다.
“또 그래, 머리 좀 잘 말려. 있어 봐. 말려 줄게.”
“아니, 괜찮아.”
드라이어를 가지러 화장대로 향하려는데 서훈이 손을 잡았다.
“앗, 차거. 뭐니, 너 이 밤에 냉수마찰이라도 했어 ”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에 놀라서 돌아보았지만, 서훈은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을 살필 수가 없다. 뭐야, 서훈이 고민 있나
“왜 찬물로 샤워해 아직 추워.”
“답답해서.”
“어우, 술 냄새. 꽤 마셨나 봐. 샤워해도 술 냄새 풀풀 날린다. 너 술 마시고 찬물에 샤워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어, 엉 ”
서진은 책상 의자를 끌어 서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무슨 고민 있어 여자 내 그럴 줄 알았다. 너, 여자로 한번 된통 혼날 거라 생각했어. 뭐야, 다 말해 봐. 내가 해결해 줄게.”
어울리지 않는 침묵과 어색한 표정을 보며 서진은 서훈의 연애 문제라 확신을 하였다.
“아니야, 그런 거.”
서훈이 기막힌 듯 힘없이 웃었다.
“누나.”
“응 ”
“5년 전 일은 괜찮아졌어 ”
서진은 의외의 말에 눈을 깜박여 보다 살짝 시선을 피하였다.
“괜찮아지는 중이야……. 무책임하고 나약했던 나를 돌아보는 게 좀 힘들기는 하지만 연습 중이야. 이제 안 그러려고.”
“정말 ”
서진은 생긋 미소를 그렸다.
“그러면, 이제 늙어 가는데 애처럼 계속 그러리 ”
“그거 잘됐네.”
“근데 뜬금없이 그건 왜 아버지가 뭐라 하셔 ”
긴장감에 깍지 낀 손을 살짝 비틀며 묻자 서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
“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서 그랬어. 이제 괜찮다면, 다시 안 그런다면 됐어.”
서훈은 싱겁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걱정 마라. 나 튼튼하고 씩씩하다.”
언제 부턴가 쑥 자라 종종 마치 오빠인 양 자신을 챙기는 서훈이 대견하기도 하고 흡족하기도 하다. 서진이 뽀시시 웃음을 보였다.
“작은누나, 굿나잇이다.”
“응, 너도.”
“작은누나, 잘 자.”
서훈은 미련 없이 서진의 방을 나섰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에는 조금만 아프고 말아, 누나…….’
한혁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여린 외모 뒤에 강한 심장을 가진 남자. 매력적이었다. 소문은 틀렸다. 최한혁은 세림의 경영 후계자로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누나의 남자로는 일 킬로미터 반경 안으로도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
보스턴 캠브리지, 늦은 오후 시간이다. 하버드대 경제학부 전공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자신을 향하는 일백여 개의 눈동자들은 매번 심장이 멈춰 버리도록 강한 긴장감인 동시에 희열이다. 정기훈은 보드에 커다란 삼각형을 그렸다.
“무엇입니까 ”
“삼각형요.”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시원하게 답한다. 강의실 전체가 웃음으로 흔들렸다.
“맞습니다.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죠 ”
기훈은 매력적으로 웃으며 삼각형 꼭지마다 글자를 썼다. Free Cash Flow, Fixed Exchange Rate, Use of Monetary Policy for Domestic Stabilization(자유로운 통화 유출입, 고정환율제, 국내 경제 안정화를 위한 통화정책). 숨죽이며 노트 필기하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다.
“그럼 이건 무엇일까요 ”
기훈은 학생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제니스.”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보며 기훈이 호출하자 긴장한 모습의 금발 여자가 기훈을 응시했다.
“대답을 주겠나 ”
“제가 알기로는 세 가지는 서로 충돌하는 점이 있습니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는 제니스를 보며 기훈이 무표정하게 질문을 이었다.
“이를테면 ”
“예를 들어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만약 자유로운 자금의 유출입을 허용한다면 자국 내 달러의 수요 변화에도 불구하고 환율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에서 자국 통화를 가지고 달러를 사고파는 것으로 환율을 유지해야 합니다. 통화량의 흐름은 양국의 이자율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렇다면 그들의 통화정책은 미국의 이자율, 즉 타국의 통화정책에 있어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타국의 이자율 정책을 흉내 내야만 하게 되겠지요.”
기훈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그렇습니다.”
반 이상 제니스의 플로우를 따라가지 못해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보며 기훈은 보드에 커다랗게 다시 썼다.
‘Impossible or Unholy Trinity(불가능한 혹은 부정한 삼위일체).’
“제니스의 말대로 이 삼각형의 꼭짓점 세 개 모두를 만족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니스가 언급한 예시의 대표적인 케이스의 국가는 홍콩입니다.”
그는 교단 위에 올려져 있던 프린트물을 몇 뭉치로 나누어 줄의 제일 앞좌석마다 두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잠시 수선스러운 동안 그는 다음 시간 과제를 제시했다.
“지금 나누어 준 핸드아웃에는 최근 경제 기사 두 개가 있습니다. 홍콩과 중국에 관한 것들입니다. 각각 두 국가의 케이스가 여러분의 의문에 대해 도움을 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두 개의 아티클의 내용을 바탕으로 Unholy Trinity에 대해 토론이 있을 것입니다. 토론 주요 의제는 웹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괜찮죠 다음 시간에 봅시다.”
웅성거리는 학생들의 소음을 뒤로하고 기훈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교수 연구실로 돌아와 학생들이 이번 시간 제출한 과제물을 하나씩 검토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조용히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성지희였다. 흰 원피스 차림, 차분한 단발이나 아이처럼 통통한 뺨은 이십 대 중반이 된 여자라기보다는 아직 소녀 같다. 조심조심 걸어오는 그녀를 향해 기훈이 얼굴에 미소를 만들면서 고쳐 앉았다.
“지희 왔구나.”
기훈이 옆에 놓여 있던 의자를 당겨 자신의 책상 근처에 두었다.
“아까 전화드렸는데 안 계셔서 미리 연락도 못하고 왔어요.”
“그랬니 강의가 있었어.”
지희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손을 무릎 위로 가지런히 모으고 기훈을 쳐다보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
“……괜찮으시면 저녁 같이하고 싶어서요.”
“응, 그래. 그런데 지금 과제물 좀 봐야 하는데.”
기훈이 안경을 검지와 엄지로 집어 고쳐 쓰더니 앞에 쌓여 있는 A4 용지들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아니에요. 저녁까지 시간 있으니까. 아니 많이 늦어져도 괜찮아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천천히 하세요. 기다릴게요. 아니면 다음에…….”
얼굴이 붉어지는 지희를 보며 기훈은 잠깐 미간을 찡그렸다가 이내 지희가 눈치채지 못하게 표정을 거두었다.
“아니, 오늘 저녁 같이하자. 8시쯤도 괜찮겠어 ”
“네, 그럼요.”
기훈의 한마디에 얼굴이 복사꽃처럼 환하게 피었다.
“그럼 전에 갔던 타이 음식점에서 어때 내가 데리러 갈게. 어디 있을 거야 ”
“저희 도서관. 아니, 아니에요, 오시지 마세요. 제가 올게요. 선배님 다 되시면 전화 주세요.”
지희는 가지런히 모았던 손을 내리고 살며시 일어섰다. 의자를 제자리에 두고 기훈을 보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차분한 발걸음 뒤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기훈은 안경을 벗어 미간을 주물렀다. 긴 한숨을 쉬고는 다시 과제물을 넘기기 시작했다.
채점을 거의 마칠 무렵 지희와의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단축키를 누르자 열대여섯 개의 숫자가 떠오른다. 잠시 후, 신호음이 떨어졌다.
-여보세요
“잘 지냈어 ”
-……네. 잠시만요.
확연히 딱딱해지는 목소리였다.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는 기척이 전해졌다.
-말씀하세요.
“오랜만이야. 어디, 회사야 ”
-네, 방금 출근했습니다.
여전히 굳어 있는 목소리에 기훈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언제나 야박을 떠는 놈인데도 한 번도 밉지 않으니 그것도 신기한 일이다.
“한혁이 너 곧 회사 맡는다면서.”
-……네.
“잘됐다. 고모님이 많이 의지하시더라. 열심히 해. 너는 누구보다 잘할 거야.”
-당숙 어른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지 마라. 왜 또 형이라 안 하고. 뭐 불만 있어 ”
-형 때문에 어른들이 걱정이 많으시던데.
“그렇지 뭐.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 많이 보고 싶어. 궁금하고. 너 어려운 결심한 거 감사하고.”
-형이 고마워해야 할 일은 아니라서.
냉소적인 한혁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지자 기훈은 하하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내가 오버했다. 인정. 마치 너 내가 키운 것처럼 뿌듯하고 그랬어.”
-겨우 세 살 많으면서 항상 그러지 좀 마십시오. 늙은이처럼. 매번 형이라 부르면서도 당숙, 숙부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요.
한혁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난다. 회사엔 적응을 제법 잘한 모양이다. 기훈이 편안해진 마음으로 답했다.
“알았어. 잘 지내고 어려운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뭐 내가 별다른 힘은 없다마는.”
진심 어린 다정한 목소리였다. 한혁은 불편한 숨을 들이켜고 작게 대답했다.
“네…….”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서 한혁이 차가운 복도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기훈 형.
내가…… 형한테 몹쓸 짓 하는 건가요
***
[비상구]서진은 달랑 세 글자 찍힌 문자를 보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이후 가끔 접선하듯 만나는 비상구 계단에 한혁이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분명 문소리가 났음에도 아무것도 못 들은 듯 아래로 시선을 붙박고만 있다. 서진은 서둘러 한혁의 앞에 다가섰다. 머리칼에 손을 묻으며 조용히 불렀다.
“한혁 씨 ”
아무 움직임이 없어 어쩐지 무안해진다. 옆자리에 앉으려 몸을 돌리는데 허리를 붙잡고 몸을 끌어 내리는 한혁의 팔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한혁의 왼다리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비스듬히 앉게 되자 서진은 균형을 잃지 않으려 반사적으로 한혁의 목을 둘렀다.
“아우, 왜 그래. 깜짝 놀랐어.”
“계단 차가워.”
“괜찮아.”
“이대로 있어.”
한혁이 한 팔로는 서진의 허리를 감싸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서진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어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빈틈없이 그의 몸과 밀착되어 전신을 자극하는 열기가 저릿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