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31
31. 낡은 묘비와 새 꽃다발
1998년 5월.
하늘이 굵은 눈물을 쏟아 내던 날이었다. 3개월이라는 훈련을 마치고 ‘헌터’가 된 지 일주일 정도 흐른 시점이었다.
의정부 시내에 게이트가 출현했다는 신고에, 은하를 포함한 35명의 헌터가 해당 지점으로 출동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게이트 출현을 감지하고 재난 문자를 전송하는 헌터 협회도, 헌터들에게 게이트 출현을 알리는 단말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늦었군.”
비에 젖어 버린 담배를 땅에 짓이기며, 분대장이 욕설을 뱉었다.
이미 ‘포화 상태’에 돌입한 게이트는 밀물처럼 몬스터를 토해 내고 있었다.
“여, 여긴…… 지옥이야.”
누군가의 아득한 절망이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이미 이틀 전 한 분대를 초토화한 게이트였다. 그 앞에서 몇몇 헌터들은 돌처럼 몸을 굳혔다. 어쩌면 죽음을 직감한 것일지도 몰랐다. 매번 게이트 앞에 설 때면 들이닥치는 직감이었다.
“다들 정신 차려.”
분대장은 넋을 잃은 헌터들을 통솔하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출동한 헌터 35명 중 20명이 게이트 내에 투입되었고, 은하를 포함한 나머지 15명은 게이트 외부 수색조로 편성되었다.
「A구역, 무너진 상가 확인. 트랙터 이동 중. 후방 지원 바랍니다.」
「A-4구역, 생존자 0명. 소형 몬스터 2체 생포 완료. 좌표 273, 129. 근거지 확보.」
「B-2구역, 10328 심주현 헌터 왼 다리 절단. 현재 의식 불명으로 임무 진행 불가 판단. 그 외 인원, 임무를 속행하겠습니다.」
휴대용 소형 무선 송수신기. 그 작은 기계만이 지옥 속에서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마저도 게이트에 입장하는 순간, 통신이 단절되니 별로 쓸모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철골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 뜯겨져 추락한 간판들 표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아무렇게나 튀어 있다.
그것들을 차례로 눈에 담던 은하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사, 살려 주세요…….”
참혹했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철근이 남자의 배를 뚫은 상태였다. 은하는 거센 빗줄기를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배에 박힌 철근을 양손으로 쥔 순간, 그 위로 피범벅이 된 손이 다급하게 겹쳐졌다.
“여, 여기가 아니라…… 저기 게이트에…… 딸이, 내 딸이 휘말렸어요.”
쿨럭! 남성이 토한 피가 은하의 뺨에 튀었다. 거무죽죽한 피는 빗물과 섞여 턱을 따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꺼져 가는 생명 속에서도 죽을힘을 다해 자신에게 매달리는 손. 은하는 무선 송수신기에 천천히 입을 가져갔다.
“A-4구역, 생존자 1명. 복부 중상, 출혈이 심각합니다. AMB 긴급 호출. 좌표, 203, 199…….”
「B, B-3구역, 대형 몬스터 1체 발견, 현재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으, 으아악!」
치지직.
혼선이 일어난 모양이다.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누구의 비명 소리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부탁…… 부탁합니다…….”
무선 송수신기에서 입을 뗀 은하는, 끝까지 자신을 꼭 붙들고 있는 남성을 군모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은하는 남성의 손등을 감쌌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다시 한번 무선 송수신기를 들어 올렸다.
“3소대 1분대, 98-S10102794 차은하. A-4구역 정찰 완료. 게이트 내부조 지원하겠습니다.”
「…….」
치지직.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꼭 붙들어 매고 있던 남자의 손이 툭, 흙탕물 위로 떨어졌다.
은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뺨을 사정없이 두들기는 빗방울에 군모를 더욱 깊이 눌러쓰고 걸음을 서둘렀다.
게이트 입구는 언제라도 들어오라는 듯 두 팔 벌려 은하를 맞이했다.
당시에는 현대처럼 입구를 관리하는 제어 장치랄 것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민간인보다 조금 더 낫다는 이유로 헌터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철벅, 철벅.
무거운 군화가 진흙탕 위를 헤치고 지나갔다.
게이트에 입장하자 고약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에 몬스터의 사체나 동료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참혹한 산맥 너머, 무언가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쿠륵, 쿠르륵…….
기괴한 소리를 내던 몬스터는 은하의 존재를 깨닫고 삐거덕삐거덕 고개를 돌렸다.
새의 머리, 말의 몸통을 가진 괴물이었다. 한차례 식사를 끝낸 녀석의 입 주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파앗!
몇백 번, 몇천 번을 훈련소에서 반복한 동작이었다. 굽이치는 불꽃이 녀석에게 명중했다. 작지 않은 폭발이 일었고, 괴물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퀴에에에에엑!
다만 훈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전에서 만난 몬스터는 일격에 쓰러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몬스터가 온몸을 비틀어 댔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녀석은 결국 꿀렁꿀렁 무언가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철제로 된 책상 다리.
자전거 바퀴.
거의 다 녹아 버린 나뭇잎들과,
“…….”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 옷자락.
그 얇은 옷자락은, 냇물처럼 흘러오는 토사물을 따라 은하의 발끝까지 떠밀려 왔다.
은하는 상체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퀴에에에에에에엑!
한층 더 거세진 울음소리는, 정확히 은하를 향해 있었다. 은하는 뒷걸음질 치지 않은 채 번쩍 시선을 들었다. 손에 들린 옷자락을 꾸욱 쥐자, 빗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괴물 새끼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아니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형체라는 것이 있었을 그 토사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달랑 팔 하나만 남아 있었던 자신의 어머니도, 어쩌면 저런 형태로 놈들의 배 속에서 침식되어 갔을 것을 생각하자니.
배가 뚫린 와중에도 제 딸을 구해 달라 사정하던 남자에게 이 찢어진 옷자락을 가져갈 생각을 하니,
정말이지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쉬이이익!
쾅!
쿠우웅!
그때부터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까맣게 탄 셀 수 없는 양의 사체. 그리고 새파란 안색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타 헌터들과 역겨운 악취 속에서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은하는 분대장이 되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단 한 번의 실전밖에 겪지 못한 자가 분대장의 자리에 바로 올라갔다는 것이.
이유는 간단했다. 전 분대장이 전사했다는 것. 그리고 은하가 가장 많은 몬스터를 섬멸했다는 것에서였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몬스터를 죽였다. 은하가 분대장이 된 이유는 그따위였다.
분대장의 자리뿐만 아니라 은하의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값의 수당이 은하의 몫으로 돌아왔다.
꿈과 생명을 깎아, 동료의 시체를 밟고 몬스터를 썰어 낸 뒤 기어코 손에 쥘 수 있었던 돈. 은하는 그 돈을 털어 어머니의 묫자리를 좋은 곳으로 옮겼다.
그제야 제대로 마주한 어머니의 묘 앞에서, 은하는 차게 식은 묘비에 손을 뻗으려고 했다.
“…….”
단단하게 굳은 피딱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흉터.
손톱 사이사이에 낀 시커먼 흙먼지까지.
은하는 어머니의 묘비에 닿을 뻔한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럴 수 없었다.
무전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경기도 파주, 601 헌터 훈련소에서 붉은 벼락 발생. 예상 난이도 미지수. 17대대 1중대 및 2중대 전원 조속히 투입 바람. 반복한다. 경기도 파주, 601 헌터 훈련소…….」
은하는 뒤돌았다.
홀연히 불어온 메마른 바람이 어머니와 자신 사이를 힘껏 가르고 지나갔다.
노을을 등지고 끝내 싸늘하게 식은 묘지가 어쩐지 저를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그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
“…….”
새까만 속눈썹이 뺨 위로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은하는 허수아비처럼 서서 어머니의 묘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망설이던 은하는 이윽고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손에 쥔 꽃다발을 조심스레 내려 두었다. 오는 길에 구매한 그것은 어머니가 생전 좋아하시던 꽃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는지 포장지가 구깃구깃했다.
“엄마, 나 왔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희미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은하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흙과 나무 냄새, 어디선가 실려 온 된장찌개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은하는 자신의 소매에 코를 박고 킁킁댔다. 혹시라도 피 냄새가 날까 싶어서였다.
스스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은하는 슬쩍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묘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이질감이 든다는 걸 깨달았다.
“……?”
묘비 주변이 이상하게 깨끗한 기분이 들었다. 무성하던 잡초도 정돈된 느낌이 강했고…….
‘이건.’
그때처럼 누군가 향을 피운 흔적이 보였다. 은하는 회색 재를 손가락으로 스윽 훑었다. 향을 피우고 시간이 그렇게 오래 흐르진 않은 모양이다.
‘대체 누가.’
은하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묘비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묘비 앞을 지키고 있자니, 어느덧 노을이 질 무렵이 되었다.
은하는 주변을 정리하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묘비를 방문한 자는 끝까지 추론해 내지 못했다.
“그럼 또 올게.”
오늘도 결국 하지 못한 말들이, 듣지 못한 말들이 많았다.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순간.
부르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파란눈] [오후 7:22] 선배 어디세요?시우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였다. 무심하게 액정을 바라보던 은하는 도로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Rrrrr…….
010-XXXX-XXXX
잠시 고민하던 은하는 천천히 화면을 스와이프 했다.
“여보세요.”
「선배, 집에 안 계시나 봐요.」
“응. 볼일이 좀 있어서.”
「괜찮은 겁니까?」
“뭐가.”
「또 경찰서 잡혀간 건 아니겠죠.」
얘는 날 뭘로 보고. 은하는 희미하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니야. 잠시 근처에 나왔을 뿐이야.”
거기까지 말한 은하의 시야에 문득 어머니의 묘비가 들어왔다.
“……혹시 너, 우리 엄마 묘비에 들렀어?”
「아뇨. 왜요?」
신시우가 아니었나.
하긴, 처음 그와 묘비에 들렀을 때에도 누군가 묘비를 방문한 흔적이 있었지. 그렇다면 어머니의 친구? 하지만 묘비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틈을 타, 수화기 너머로 다시 한번 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선배. 저녁 아직 안 드셨죠?」
“아직이긴 한데, 딱히 입맛은 없어.”
무심한 어조로 그리 내뱉는 순간,
「지난번에 선배가 먹고 싶다고 하셨던 ‘김윤례 할매 국밥’.」
우뚝.
「지금 막 가게에 들어온 참이거든요.」
제자리에 멈춰선 은하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김윤례 할매 순대국밥은 당시 은하가 다니던 고등학교 뒤쪽에 위치했던 조그마한 국밥집이었다. 엄마와 함께 자주 갔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분의 아들이 2대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전과는 달리 깨끗하게 가게 내부 인테리어를 리모델링 하고 TV 방송에도 여러 번 출연한 덕분에 오늘날엔 엄청난 유명 맛집이 된 모양이다.
한 번 먹기 위해서는 기본 대기 시간이 두 시간이라던데…… 잠깐.
“설마 기다린 거야?”
「네.」
맙소사.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아니, 그것보다 그가 정말 국밥집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갈게.”
은하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추억의 맛집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다시 생각해도 이상했다. 박 매니저를 시켜도 될 일인데 어째서 시우는 굳이 직접 국밥집에 찾아간 것일까.
도통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불?’
고개를 돌리자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다급한 사람들의 외침이 잇따라 들려왔다.
“뭐야, 불났어?”
“헐. 대박. 연기 봐.”
“꽤 크게 났나 봐. 가 보자!”
길을 걷고 있던 행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집에 가려거든 그 길을 지나야만 했기에, 은하 역시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장이 가까워질수록 공기의 혼탁이 짙어지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자 고층 호텔 건물이 보였다.
“와씨. 저기 호텔이잖아.”
“미쳤다. 뉴스 나겠는데, 이거?”
찰칵, 찰칵.
행인들은 너도나도 가던 길을 멈추고 플래시를 터뜨려 댔다.
지독한 화마에 휩싸인 호텔은 각 층 창문마다 검은 먹구름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은하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과 코를 막았다. 매연이 어찌나 심한지 눈과 코가 따가울 정도였다.
가스 폭발 사고? 아니면 방화 사건?
‘아니.’
은하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짝 검지를 들어 호텔 층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정확히 3층에서 스파크처럼 파지직 튀어 오르는 그것은.
‘균열이야.’
즉, 이건 화재 현장이 아니라 게이트 출현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