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46
46. 엇갈리는
쿠구구구…….
바닥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역삼각형 형태를 한 뱀의 머리를 느른하게 쓰다듬던 검지가 멈칫하였다.
지진? 아니다.
은회색 눈동자가 게이트 통로 저 너머 아득한 어딘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곁을 지키던 요원이 힐끗 이준을 바라보았다. 눈치로 보아하니 그는 조금 전 희미한 진동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이준은 소리 없이 손바닥을 땅에 가져갔다. 바닥 위 모래알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그가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백이준.’
약 20분 전, 텔레파시가 왔었다.
이준을 제외한 이곳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텔레파시였다.
이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또한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었다.
‘사고가 났어. 지원군을 보내 줘.’
돌연 이준이 피식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곁에 선 요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 헌터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니, 별일 아니야.”
그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손을 느른하게 움직여 뱀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제 곧 1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미복귀자가 셋이나 있네요.”
요원은 본대를 훑으며 걱정스레 운을 뗐다.
첫 수색은 1시간이라고 분명 공지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릭스터, 흑염의 프린세스, 뫼비우스, 이 세 헌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 저기 뫼비우스 헌터가 돌아왔습니다!”
누군가가 외쳤다. 저 멀리 뫼비우스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외견을 보아하니 큰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뱀을 쓰다듬고 있던 이준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오는 도중에 길을 잃어서요.”
“그런가.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야.”
“마에스트로께서 모든 몬스터를 잠재워 주셨던 덕분이지요.”
빙긋 웃은 뫼비우스가 “그럼.” 하고 몸을 돌렸다. 어쩐지 굉장히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을 지그시 응시하던 이준이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어느덧 뱀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딱딱하게 멈추어 있었다.
“오는 길에 사람을 보지 못했나?”
오한이 들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에 뫼비우스가 문득 헛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뫼비우스는 짧은 시간 새에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람이라뇨?”
이준은 눈동자가 꿰뚫듯 그를 응시했다.
스스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마치 미세한 곤충들이 피부를 뒤덮은 듯, 불쾌하고 낯선 감각에 뫼비우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짧은 침묵 후, 이준이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보지 못한 모양이군.”
이어서 이준의 곁에 있던 요원이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흑염의 프린세스와 트릭스터가 아직 복귀하지 않고 있거든요.”
“아아…….”
잠시 말끝을 흐린 뫼비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몬스터에게 슬리핑이 걸려 있는 마당에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요원이 힐끗 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트릭스터는 둘째 치더라도 흑염의 프린세스는 협회가 예의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생사보다, 그녀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준의 능력이 필수 불가결이었다. 협회인들은 이준이 부리는 뱀이 GPS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뱀들과 청각과 시각마저 공유한다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백 헌터님,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실 수 있으십니까?”
요원의 물음에 이준은 조금 곤란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신호가 끊겼어. 게이트가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뜨끔.
뫼비우스가 어깨를 떨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 뫼비우스는 무너지는 표정을 서둘러 바로잡았다.
이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할 수밖에 없겠어.”
“예? 직접 말입니까?”
깜짝 놀란 것은 요원이 아니라 뫼비우스였다.
안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문제 있나?”
이준이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뫼비우스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모른 체하며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리, 리더이신 백 헌터께서 본대를 비우시는 건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뭐 어때. 오래 걸리지 않을 건데.”
“하지만 그사이 그들이 돌아올 수도 있고…….”
더듬더듬 말끝을 흐리던 뫼비우스가 일순 눈을 반짝였다.
“아, 그렇다면 제가 직접 수색하겠습니다.”
“자네가?”
“예. 화랑 길드에서는 주기적으로 수색 교육을 실시하고 있답니다. 더군다나 제 고유 능력은 수색 작업에 특화되어 있지 않습니까. 분명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할 겁니다. 게이트가 무너진 것이라면 더더욱이요.”
이준이 뫼비우스를 빤히 응시했다. 잿빛 눈동자가 뫼비우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쓰다듬듯 훑더니, 이윽고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정 원한다면.”
그의 허가에 뫼비우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뫼비우스는 후다닥 등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 뱀은 두고 가도록 해. 이제 쓸모없으니까 말이야.”
슥.
이준이 손짓했다.
일종의 신호였던 걸까. 뫼비우스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흰 뱀은 자석에 이끌리듯 이준을 향해 미끄러졌다.
뫼비우스는 자신을 떠나는 흰 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뱀이 쓸모없어진 것이 다행일지도. 적어도 그가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뫼비우스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럼 건투를 빌지.”
이준도 마찬가지였다.
* * *
은하가 본대로 복귀한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 후였다.
거의 2시간이 다 되어서야 슬금슬금 모습을 나타낸 그녀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은하는 자신을 향한 모든 시선을 무시한 채 주변을 훑어보았다.
뫼비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복귀하지 않은 걸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카악 퉤! 그 새끼 어디로 꽁무니를 뺀 거냐며,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발톱을 세웁니다.]‘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자리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뫼비우스의 부재를 확인한 은하는 이준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들은 걸까. 내벽에 기대 쉬고 있던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하는 우두커니 서서 단조로이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어.”
그러자 은회색 눈동자가 미끄러지듯 스르륵 아래로 향한다. 그의 시야에 물수건으로 감싼 그녀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다쳤네.”
짤막하게 말한 그가 곁의 요원에게 손짓했다.
“치료 요원을 부르─.”
“아니, 됐어.”
은하는 그의 말을 잘라 냈다.
“그보다 네 뱀이 폭발하면서 게이트 중추 부분이 무너졌어. 트릭스터가 거기 혼자 갇히게 됐고.”
“그래?”
이준은 아주 담백하게 답했다.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은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수색조를 파견해 줘.”
“수색조?”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따랐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이준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사르륵 떨어지는 앞머리 사이로 은회색 눈동자가 곱게 휘어진다.
“뱀이 폭발한 건 나나 이곳의 다른 헌터들의 책임이 아니야. 트릭스터가 멋대로 뱀의 머리를 터뜨린 탓이지.”
“…….”
“따라서 그를 수색하기 위해 수색조를 파견할 생각은 없어.”
은하가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가만히 두 사람의 곁을 지키던 요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이분 왜 이러시지?’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직접 수색에 가겠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필요 이상으로 싸늘하게 변했다? 게다가 트릭스터가 뱀의 머리를 터뜨렸다는 건 무슨 소리지? 알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 영문을 모르겠는 것은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이야?”
은하의 물음에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애를 모른 척하겠다고?”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원망, 경멸, 어쩌면 실망. 그 눈빛 앞에서 이준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래, 진심이야.”
이준은 자신에게 화살처럼 꽂히는 까만 시선에게서 도망치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단호했다.
“명령을 어긴 자를 위해 내가 굳이 움직여야 할 당위성을, 나는 잘 모르겠군.”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를 응시하는 시선만은 거두지 않았다.
영겁과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은하 쪽이었다.
“왜─.”
질끈, 주먹을 쥐었다.
“왜 그렇게 됐어?”
표정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이준은 알 것이다.
은하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아마도 현재의 이준에게.
하얀 뱀이 이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준은 기다란 검지로 뱀의 머리를 간지럽히듯 쓰다듬었다. 기어코 뱀에 시선을 못 박은 그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소린지.”
그 앞에서, 은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와의 대화는 결코 성사되지 않는다. 그가 은하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까닭에.
그럼에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은하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실망이네.”
멈칫.
뱀을 쓰다듬던 손이 멈추었다.
하지만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이준은 다시금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 앞에 우두커니 선 은하는 그저 노려보듯 그를 똑바로 응시할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디선가 찾아온 냉랭한 한기에 주변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은 듯했다.
“저어…….”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고 있던 요원이 이윽고 용기를 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 뫼비우스 헌터가 미복귀 헌터들을 수색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홱.
은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에서 서슬 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뫼비우스?”
나지막한 물음에 요원은 히익, 숨을 들이켰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 그와 대비되는 까만 머리카락. 어쩐지 기괴한 빛깔을 품은 듯한 눈동자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슬금슬금 시선을 회피하는 와중에도 기어코 이준을 변호했다.
“네, 네. 백 헌터께서 말씀은 이렇게 하셨지만 미복귀자들을 모른 척하고 계신 것은 아니랍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뫼비우스 헌터가 돌아올 겁니다.”
“아니, 그만으로는 안 돼요.”
은하가 딱 잘라 답했다.
뫼비우스는 믿을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은하는 그에게 털끝만큼의 신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색조를 파견하지 않겠다면 제가 직접 가겠어요.”
“네?”
요원이 눈을 크게 끔뻑였다. 놀란 것은 주변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헌터님, 트릭스터는 S급 헌터입니다. 결코 A급 버스트 게이트에서 변을 당할 위인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습니까?”
흑염의 프린세스는 F급, 그것도 컨셉 헌터였다. 보통의 컨셉 헌터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파트너도 없이 게이트에 뛰어들겠다고? 그것도, S급 헌터를 구하기 위해? 말도 안 된다.
“맞습니다. 차라리 본대와 떨어진 것이 트릭스터라 다행이죠. 그라면 아무 문제 없이 돌아올 겁니다. S급 헌터니까요.”
“외람되지만 S급 헌터를 구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조금…… 건방진 생각이 아닐지.”
주변 요원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헌터들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은하도 알고 있었다. 트릭스터는 한국에 몇 없는 S급 헌터였다. 한 길드를 이끄는 리더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나, 이건 선물이에요. 수류탄이랑 트럭도 만들 수 있어요!’
‘이제 튜닝만 하면 완성일 것 같은데 조만간 한번 보러 올래요?’
‘진짜요? 와, 신난다!’
맞잡았던 작고 통통한 손.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즐겁고 천진한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말해 주고 있었다.
“…….”
자신을 만류하는 이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애잖아요.”
세상이 변하지 않았더라면,
각성을 겪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어딘가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있었을, 어린 소년이었을 뿐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