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48
48. 어둠 속에 밝혀진 불꽃 차가운 은회색 눈동자
트릭스터와 흑염의 프린세스의 복귀는 딱히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본대의 그 누구도, 트릭스터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걱정한 이가 없었기에.
“무사히 돌아왔으니 결론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이준은 손을 꼭 맞잡고 있는 은하와 민주를 마른 눈빛으로 응시했다.
“트릭스터는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조금 딱딱한 어투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트릭스터, 민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없는데, 할 말.”
건방진 대꾸. 아무래도 뱀의 머리를 터뜨린 것에 대해서는 이미 까마득히 잊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일지도.
이준은 민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그리고 유심히 훑었다.
손톱이 듬성듬성 빠져 있고 손가락 끝에 피멍울이 맺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부상은 없어 보였다.
소년을 훑던 은회색 눈동자는 마침내 맞잡은 두 사람의 손에 고정되었다. 이내 이준은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이 일은 협회 측에 낱낱이 보고될 거야.”
“무슨 일?”
“원활한 수색을 위해 분배했던 ‘도구’를 멋대로 훼손한 일.”
“아아. 그러든가.”
가볍게 등을 돌린 민주가 “누나, 가요.” 하며 은하의 손을 덥석 잡으려는데,
“그리고─.”
이준이 비스듬히 시선을 돌려 은하를 응시했다.
“허가 없이 개별 행동으로 본대를 이탈한 일.”
“…….”
은하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헌터법에 의하면 게이트에 참여한 모든 헌터들은 해당 게이트의 총괄 지휘자, 즉 리더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경우, 협회는 해당 헌터에게 페널티를 부과했다. 일종의 벌점 제도였다. 한마디로 운전 면허증과 비슷한 시스템이다.
일정 벌점을 초과하면 헌터 활동을 정해진 기간 동안 중지해야만 했으며, 벌점 최고치에 달하는 순간 헌터 면허증은 취소된다.
“뭐라고? 이봐, 아저씨.”
민주가 매섭게 눈매를 세웠다.
사실 S급 헌터에게 면허 정지 처분은 협박 축에도 끼이지 못했다.
한국의 S급 헌터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고, 세간에서 S급 헌터는 국보라고 불릴 정도였다. 즉, 고작 이런 일로 S급 헌터인 민주의 면허증이 취소될 리는 결코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F급인 흑염의 프린세스는 이야기가 다르다.
민주는 은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성큼성큼 이준에게로 걸어갔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미친 아저…….”
척.
은하는 가볍게 팔을 뻗어 그런 민주를 제지했다.
“누나?”
“가만히 있어.”
“하지만.”
“…….”
민주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건 이준도,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을 에워싼 공기가 급격히 식었다.
꽁꽁 얼어붙은 듯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배, 백 헌터님!”
인원을 파악하고 있던 협회 요원이었다.
“뫼비우스 헌터가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이준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질린 요원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차분한 태도.
“혹시 뫼비우스 헌터의 행방을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 헌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첫 수색 때 뫼비우스와 함께 조를 짰던……. 아아, 같은 길드 헌터인 모양이다.
그의 요청에 이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네? 어, 어째서…….”
“그에게는 내 뱀이 붙어 있지 않거든.”
이준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뫼비우스가 수색 작업에 나서기 직전, 직접 그에게 붙어 있던 뱀을 거둬들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요원이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수색조를 다시 보내야 하는 걸까? 초조한 요원의 앞에서 이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떡하긴.”
요원을 지그시 응시하던 은회색 눈동자가 예고도 없이 스르륵 접혔다.
“실종 처리 해야지.”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 공기가 차갑게 변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곳의 누구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화랑 길드 M 헌터, 게이트 수색 작업 중 실종…… 헌터 협회 진술을 토대로 사건 경위 조사 중]8월 23일 출현한 여의나루역 버스트 게이트에서 한 헌터가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 * *
하늘에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시우는 핸들을 잡은 채 미동도 없었다. 다만 자동차 유리 위로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대, 대표님. 이곳에…… 트릭스터와 마에스트로가 있습니다.」
제휘에게서 걸려 온 전화. 시우는 그 전화를 받자마자 저택을 박차고 나왔다.
“…….”
빨간불이 녹색불로 바뀌고, 조금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
버스트 게이트가 출현한 여의나루역 부근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끼익─
미끄러지듯 빗길을 달린 그가 차를 세웠다. 뒷좌석에 두었던 우산을 챙기지도 않고 후드만을 툭 뒤집어쓴 채 차에서 내렸다.
게이트 주변을 봉쇄하고 있던 바리케이드를 경찰관들이 정리하고 있었다.
버스트 게이트의 낙찰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낙찰 길드가 어디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시우의 푸른 눈동자가 거센 빗줄기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아, 대표님.”
그를 발견한 제휘가 헐레벌떡 다가와 우산을 씌워 주었다. 흠뻑 젖은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는 저것이 땀인지 빗방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
제휘는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나 시우는 내밀어진 손수건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게이트 입구에만 시선을 못 박았다.
“아직인가?”
“예. 이제 막 낙찰 길드 인원이 투입되었으니 이 헌터님께서도 곧 나오실 겁니다.”
멋쩍게 손수건을 거둔 제휘는 힐끗 게이트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낙찰이 2시간 만에 정해져서 다행이네요. 하하. 오늘은 차에서 꼬박 밤을 새울 생각으로 이불도 챙겨 왔는데 말입니다.”
부러 밝은 어투로 덧붙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음.’
제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우리 대표님은 여담을 나눌 기분이 아니신 듯했다.
쏴아아─
점차 두꺼워지는 빗줄기 사이로, 헌터들이 균열을 뚫고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 나오네요. 저기 이 헌…….”
제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우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을 탁 낚아챘다.
긴 다리로 빗길을 휘적휘적 뚫고 나아간 시우가 은하 앞에 우뚝 섰다.
“선배.”
“와 있었어?”
“네. 방금 왔습니다.”
시우는 은하에게 우산을 씌워 주면서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별일 없었습니까?”
“별일은 무슨.”
“트릭스터와 마에스트로가 이곳에 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은하가 힐끗 어디론가 고개를 돌렸다.
민주는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졌고, 이준은 저 멀리 경찰관 무리에 섞여 있었다. 헌터 뫼비우스의 실종 사고에 관해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이곳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한국 헌터 협회랑 계약을 맺었다나 봐.”
“뭐라고요?”
시우가 꿈틀 눈썹을 움직였다. 한국 협회랑 계약? 누가? 백이준이?
“누가 그럽니까?”
“트릭스터, 송민주가.”
“…….”
민주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래 봬도 그 꼬마는 한국의 4대 길드 중 하나인 군단의 수장이었다. 아직 공론화되지 않는 정보를 그가 먼저 알고 있다는 것이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기사로 뜨지 않겠어?”
은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겠지.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준과 협회의 계약과 같은 큰 뉴스가 아직 보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이상했다.
의도적으로 입을 막은 것일까.
그렇다면 아직 기사가 보도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시…….
‘선배 때문인가.’
우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스르륵 힘이 들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우는 모른 척 눈을 느릿하게 한 번 깜빡였다.
“일단 돌아갈까요.”
우뚝.
“……선배?”
은하는 제자리에 꼿꼿이 선 채 어느 한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 새까만 시선을 쫓아간 시우는, 이윽고 그곳에 선 검은 슈트의 남자를 발견했다.
‘마에스트로.’
입매가 절로 경직되었다.
시우를 찾아왔을 당시, 이준은 흑염의 프린세스에 관해 물었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에 입국하고 거의 바로 시우를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가 한국에 입국한 이유는 아마도 흑염의 프린세스, 선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은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준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은하의 과거를 폭로하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
그렇게 되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각 매스컴이나 연구 기관에게 그녀를 빼앗기게 될 테다.
“…….”
두 사람이 쓰기에는 조금은 비좁은 우산 아래서, 시우는 소리 없이 시선을 돌려 은하를 응시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하리만치 가라앉은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선배, 젖습니다.”
탁.
시우가 은하의 앞에 섰다. 진회색의 후드 티가 은하의 시야에 가득 찼다.
은하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우의 얼굴이 어딘가 언짢은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에게 할 말이 있습니까?”
저도 모르게, 그런 물음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만일 할 말이 있다고 하면……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 걸까.
“…….”
“…….”
쏴아아─
둥근 우산 아래 빗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없어.”
“……네?”
“없다고. 할 말.”
그 또한 내게 할 말 따위 없을 것이다.
은하는 이준에게서 주저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처음부터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사람처럼 깔끔하게.
“가자.”
그리고 시우는 어쩐지 그 사실이 기뻤다.
“……네, 선배.”
코를 슥 매만진 시우는 벌써 몇 발자국 앞서 걸어가는 은하의 뒤를 황급히 따랐다.
꼭 붙들고 있던 까만 우산이 소리 없이 기우뚱, 은하 방향으로 기울었다.
시우가 흑염의 프린세스의 활동 정지 처분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