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53
53. 산호 숲의 노랫소리
몸이 붕 뜨는 감각이 들었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셈이었는데 이곳은 1층 화단도 보행로도 아닌 듯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연보랏빛 오로라였다. 반투명한 오로라는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얇은 커튼처럼도 보였다.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 한복판을 유영하는 것 같기도, 어쩌면 잔잔한 파도에 유유히 휩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 기묘하고도 신비한 감각이 영 싫지는 않아, 은하는 눈을 감고 부유감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감긴 눈꺼풀 뒤로 기다렸다는 듯 엄마의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 딸이 대학생이 되는 건 엄마 소원이었잖아. 당연히 기쁘지.’
‘그것’이 정말 엄마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서, 그렇게라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이 잔해에 깔린 모습이 아니라 웃는 모습이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은하는 방금 전 엄마의 마지막 미소를 평생 잊지 않도록 눈꺼풀에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탓─
허공을 유영하던 두 다리가 바닥에 닿은 순간,
[게이트 내부에 진입합니다.]눈앞에 푸른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서…….
[System Error = 21387 볷?¶□뚭긆깂깒?긽¶‡귻깛긐긘긚긡?] [System Error = 21388 걁퉹뷠뾴?벍밙¶딯땝끯□궕뚷‡궻귘] [System Error = 21387 볷?¶□뚭긆깂깒?긽¶‡귻깛긐긘긚긡?] [System Error = 21388 걁퉹뷠뾴?벍밙¶딯땝끯□궕뚷‡궻귘]심상치 않은 진동과 함께 오류 메시지가 폭주했다. 은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언노운 게이트.’
오랜 시간 갇혀 지냈던 그곳에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은하는 몇 번이고 죽을 뻔했으니까.
그런데 은하가 기억하는 언노운 게이트와 이곳은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동굴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은 같았지만, 이곳은 마치…….
‘바닷속 풍경 같아.’
마치 바다 깊은 곳에 숨겨진 동굴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숨을 쉴 수는 있었다.
찰박─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딛자 물소리가 들려왔다. 땅 표면에는 3cm가량 물이 차올라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해초, 불가사리, 조개껍데기 등 바다의 산물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을 앗아 가는 것은.
“…….”
바로 동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핑크빛 산호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것들은 동굴 바닥, 내벽 할 것 없이 빼곡하게 자리 잡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해도 이곳은 게이트, 그것도 언노운 게이트 내부였다. 즉, 여태까지 손쉽게 공략했던 대다수의 게이트와 같은 곳으로 판단해선 안 됐다.
또각, 또각.
은하는 동굴 내벽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오랫동안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제휘도 찾을 수 없었다. 걷고 또 걸어도 말이다.
은하는 지나온 길의 흔적을 표시하기 위해 내벽에 다가섰다. 날카로운 양산 끝으로 내벽에 X 표시를 남기던 와중.
“……이건.”
곁에 있던 산호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은하가 멈칫했다.
“손?”
핑크빛 산호 아래로 인간 남성의 손이 보였다. 산호 밑에 사람이 깔려 있기라도 한 것일까? 확인을 위해 산호를 깊게 살펴보았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이 손은 도대체 뭘까? 은하가 고개를 갸웃하는 그 순간.
‘설마.’
은하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전에도 은하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공격한 헌터를 슬라임으로 만들어 버리는 보스 몬스터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곳 보스도 그러한 유형이라면 이 산호들은…….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사도 없이 멜로디만.
그것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노랫소리를 귀담아듣지 말라며 당신에게 경고합니다.]노란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고양이의 경고로 은하는 비로소 확신했다. 역시 이 노랫소리에 이 언노운 게이트의 힌트가 깃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앞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뒤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한 노랫소리. 은하는 휙 고개를 돌렸다.
북동쪽.
저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은하는 직감적으로 그 노랫소리를 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길을 찾는다고 시간 낭비를 할 순 없었다. 은하는 내벽을 향해 팟! 오른손을 펼쳤다.
그 순간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분홍색 산호들.
“…….”
그 상태로 그대로 굳어 버린 은하는 한동안 산호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하나씩, 또 하나씩 조심스레 떼어 내어 바닥에 내려 두기 시작했다.
이렇듯 이미 완전히 변해 버린 이들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아니 그랬다고 한들 은하에게는 상태 이상을 해제할 만한 스킬도 아이템도 없었다.
이윽고 마지막 산호 하나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 둔 은하는 다시 게이트 내벽을 향해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희미한 노랫소리가 북동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 게이트 어딘가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북동쪽으로 가기 위해서 동굴 속을 탐험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콰과과과광─!
길을 뚫어 버리면 될 일이었다.
* * *
콰과과과광─!
“……!”
언노운 게이트 내부.
수색조로 파견된 불멸 길드원들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굉음에 가던 길을 멈추었다.
“모, 몬스터 웨이브인가?”
불멸의 3인자, 성윤은 남보다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었던 거지?’
성윤은 허공을 향해 겨눈 활시위를 거두지 않은 채 주룩 식은땀을 흘렸다.
이곳은 언노운 게이트.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실제로 그들 중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전사했고 중상을 입었으며,
“혀, 형님. 재진이가…….”
넋이 나갔다.
도성윤이 뒤로 돌자 젊은 헌터 한 명이 바닥에 풀썩 쓰러진 것이 보였다.
“으윽……. 그건 내 거야……. 내, 거…… 라고오……!”
헛소리를 지껄이는 점이라든가 그의 등 위로 연분홍색 산호가 서서히 돋아나는 점. 그리고…….
[……♬♪]아득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이전과 같았다.
“다들 귀를 막아!”
성윤은 남은 인원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두 명이 환각에 먹혀 버린 후였다.
“젠장.”
나직이 욕설을 뱉은 성윤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남은 전투 인원은 이제 고작해야 넷, 아니 이젠 셋이었다.
성윤은 주머니를 뒤적여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네트워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연결을 재시도 하시겠습니까?] [ – – – Loading – – – ] [오류. Error Number 34421.] [네트워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연결을 재시도 하시겠습니까?]일말의 기대를 담아 보았으나 단말기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즉 바깥과 통신은 아예 불가능.
뿐만 아니었다. 출현하는 몬스터는 유형도 레벨도 모두 다 달라 대응이 까다로웠다. 심지어 출현 시기도 랜덤. 한 번에 한 마리만 나타나는가 하면, 수십 마리가 우글우글 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더군다나 길은 미로처럼 되어 있는 데다가 이따금씩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한두 명씩 미쳐 가고 있었다.
‘진퇴양난이로군.’
정말 그랬다.
게이트 출구는 이미 닫혔고 보스와 조우하기도 전에 절반 이상의 전투 인원을 잃었다. 이대로 운 좋게 길을 찾아 보스와 맞닥뜨린다고 해도 승리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게이트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을 동료들이 내규에 따라 상부에 지원을 요청해 둔 상황이겠지만…….
‘과연 지원군이 올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신을 좀먹는 것만 같은 나약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 성윤은 분한 듯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이것도오…… 저것도오…… 내, 거…… 야…….”
투득, 투득─
환각을 보고 있는 길드원 위로 연분홍색 산호가 돋아났다. 등이며 얼굴이며 상관없이 돋아나는 그것들을, 성윤을 포함한 세 명의 길드원들은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상태 이상을 해제할 수 있는 아이템이 이제 더는 남아 있지 않았기에.
“미안……, 하다.”
성윤은 괴로운 듯한 얼굴로 동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혀, 형님!”
그때 한 길드원이 다급하게 도성윤을 불렀다.
예고도 없이 등장한 몬스터들이었다. 성윤은 짧게 욕설을 뱉고 화살대를 잡았다.
“가장 큰 놈을 내가 맡겠다. 나머지 두 마리는 너희가 알아서 하도록.”
성윤은 Lv.62 ‘외눈 광대’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피슈욱─!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팟! 퍼억, 퍽!
전투 인원은 오직 세 명. 체력도 고갈 직전이었지만 불멸의 이름 아래 결국 그들은 세 몬스터를 제압하는 것에 성공했다.
“헉, 허억…….”
그러나 이미 그들의 몸은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가까스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다음은 힘들 것을 알았다.
성윤은 상처를 대충 지혈한 뒤 나머지 두 길드원들을 살폈다.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치유 계열 헌터는 이미 전투 불능 상태였고 들고 온 회복 물약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황.
─이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
성윤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게이트 벽면으로 향했다. 허리춤에서 휴대용 단검을 꺼내고, 날카로운 칼끝으로 벽면에 메시지를 새기기 시작했다.
“형님…….”
나머지 두 길드원은 그런 성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들 역시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죽는다는 것을.
서걱, 서걱…….
노랫소리에 환각 효과가 있다는 점. 환각에 물들어 갈수록 인간이 산호화(化)가 된다는 점. 노랫소리가 끝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가 나타나는 점. 몬스터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없다는 점.
성윤은 천천히 그 모든 정보를 벽에 남겨 두었다. 뒤이어 게이트에 진입할 동료들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메시지 가장 아래, 마지막으로 남길 것은 바깥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으흑…….”
누군가 울음을 삼켰다.
이딴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사실 세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분홍빛 산호들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동료였고, 앞으로의 내가 될 테다. 그 생각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가고 싶다.
그러나 나갈 수 없다.
내벽에 마지막 메시지를 새긴 성윤이 스르륵 칼을 떨어트렸다.
챙그랑─
날카로운 날붙이 소리가 고요한 게이트 내부를 울렸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Lv.80 ‘고장 난 태엽 인형’이 모습을 드러냅니다.]푸른 시스템창이 세 사람의 눈앞에 팝업되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누구도 무기를 들지 않았다.
Lv.80 몬스터. 만일 그들이 최상의 컨디션이었다고 하더라도 해치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고레벨 몬스터였다.
끼기기긱…….
인형의 목이 기괴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한 쌍의 눈은 단추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너희들은 도망가라.”
성윤이 나직이 말했다.
“혀,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망치라고. 가능하다면 사부가 오실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는 거야.”
성윤은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다시 한번 화살을 잡았다. 지금 몸 상태로 저 몬스터를 해치우진 못하겠지만 녀석들이 도망갈 시간을 버는 정도라면 가능할 것이다.
“혹시 사부를 만난다면 전해 줘.”
화살통에 남은 화살은 단 하나. 성윤은 마지막 화살을 손에 쥔 채 입술을 달싹였다.
“마지막까지, 난 임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파앗!
‘고장 난 태엽 인형’을 향해 성윤이 크게 도약했다. 인형은 실로 꿰매어진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Lv.80 ‘고장 난 태엽 인형’이 스킬을 사용합니다. ▶한입에 꿀꺽]투둑, 투둑…….
입을 꿰매고 있던 실밥이 터지며, 인형이 크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퍼어어어엉─!
큰 폭발이 일었다.
“형니임─!”
차마 그를 뒤로하고 도망갈 수 없었던 길드원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엄청난 폭발이 사방으로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졌다. 매캐한 먼지 속에서, 그들은 초조한 눈으로 성윤을 찾았다. 그리고.
또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낯선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