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54
54. 자애의 현혹술사 (1)
폭발과 함께 시야를 덮쳤던 먼지바람이 한결 가라앉은 뒤, 성윤은 자신의 앞에 선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누, 누구…….”
뻐끔뻐끔 입을 열자 검은 그림자의 주인, 은하가 휙 고개를 돌렸다. 뿌연 먼지바람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싸울 수 있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검은 눈동자로 돌아온 은하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무기를 가진 남자를 보고 헌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당신은…… 불멸 사람이 아니군.”
성윤은 은하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분명 남은 동료들이 게이트 밖을 지키고 있을 텐데, 그녀는 어떻게 언노운 게이트로 진입할 수 있었을까. 혹시.
“지원군인가?”
성윤이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려는 찰나,
[경고! Lv.80 ‘고장 난 태엽 인형’이 태엽을 감습니다.]따각따각따각따각따각따각…….
인형이 턱관절을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이빨이 부딪히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멀리 떨어져 있으세요. 한 방에 박살 내야 하니까.”
은하는 펼치고 있던 양산을 곱게 접으며 말했다.
허……?
성윤을 포함한 세 명의 불멸 길드원이 멍한 얼굴로 은하를 응시했다. 이 여자, 지금 혼자서 Lv.80 몬스터를 상대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Lv.80 ‘고장 난 태엽 인형’이 돌진합니다! 상태 이상 ‘저주’에 주의하십시오.]슈우우우욱!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몬스터를, 은하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파앗!
땅을 박차고 인형을 향해 튀어 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저 녀석에게 한 번이라도 닿는 순간 저주에 걸릴 것이라며 절대 닿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릅니다.]한 방 싸움이란 소리였다.
즉 먼저 목을 꺾는 쪽이 이기는, 지난 언노운 게이트에서 은하가 수도 없이 겪었던 싸움이었다.
‘어렵지 않지.’
공중에서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리며 양산을 휙 고쳐 잡았다. 우산처럼 들고 다니는 평소와는 달리 마치 검을 겨눈 듯한 모양새.
바늘처럼 뾰족한 양산 끄트머리를 인형에게로 향한 채, 그대로 빠르게 낙하한다.
푸우욱─!
미간 정중앙에 양산이 꽂힌 인형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삐거덕, 삐거덕…….
위력이 부족했던 걸까. 양산에 의해 미간에 구멍이 뚫린 인형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통통한 인형의 손이 스르륵 움직이는 순간,
“위험해!”
성윤이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파아앗!
찰나의 순간이었다. 인형의 미간에 꽂힌 양산을 심지로 삼아 검은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끼야아아아아아!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는 양산을 인형에 꽂은 채로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뻐어어억!!!
“말도 안……!”
성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뻐어어억!!!
분명 내려친 것은 한 번일 뿐인데 또다시 아까와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바닥에 냅다 처박힌 인형은 퍼즐 조각처럼 산산이 분해되었다.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산산조각이 나 버린 인형을 보며 성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저 여자…….
[축하합니다! 마지막 네임드를 해치웠습니다!]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 – – – Loading – – – ]활을 들고 있던 성윤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 Lv.80 몬스터를 혼자 처리한 것인가? 그게 가능이나 한 이야기란 말인가? 대체 어떻게?
의문의 눈초리가 쏟아지는 가운데, 은하는 가라앉은 눈으로 시스템창을 응시했다.
‘마지막 네임드, 라고.’
여기 이 헌터들이 이전 네임드들을 이미 해치운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곧 보스가 모습을 드러낼 거란 소리였다.
또각, 또각─
은하는 미동도 없는 몬스터에게 다가가, 그것에 꽂혀 있던 양산을 단숨에 휙 뽑아냈다.
양산 표면에 묻은 피를 맨손으로 털어 내는 그녀를, 세 쌍의 눈동자가 멍하니 쳐다보았다.
“혹시 정장을 입은 남자를 보셨나요?”
이윽고 채비를 마친 은하가 그들을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작은 상처 하나도 없는 그녀의 모습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성윤은 눈을 끔뻑였다.
“아,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은하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두 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졌다.
“……대체.”
이름을 물어볼 겨를도 감사 인사를 전할 틈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방금 Lv.80 몬스터를 쓰러트린 그녀가 F급 헌터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방금 그 녀석들은 왜 구해 준 것이냐며 궁금해합니다.]이따금씩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쫓아 걸음을 재촉하던 도중, 고양이가 의문을 표해 왔다. 은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은하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면 그저 주는 것일 뿐. 그 행위에 특별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건, 고양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인 듯했다.
[그 녀석들은 게이트 입구에서 언니를 깔보던 놈들과 같은 길드 소속이 아니냐며, 심기가 불편한 듯 수염을 씰룩입니다.]“맞아.”
짧게 고개를 끄덕인 은하는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와 트러블이 있었던 건 바깥에 있던 놈들이지 방금 그 사람들이 아니잖아.”
은하의 말을 이해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고양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박─
걸음을 걸을 때마다 맑은 물소리가 고요한 게이트 내부를 울렸다.
게이트 입구 부근에서는 3cm 정도에 불과하던 바닥 물이, 어느 순간부터 발목 언저리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건 그렇고.
‘박 매니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환각에서 깨어나 게이트를 헤맨 지도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박제휘와 그의 여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위치 추적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순간.
반짝─
목 언저리에서 작은 빛이 났다. 군번줄? 아니다. 황금색 군번줄은 1세대 헌터의 상징이기에 평소에는 보란 듯이 목에 걸고 다니지 않았다. 그렇다면.
‘펜던트……?’
작은 빛의 발원지는 ‘흑염의 프린세스’ 세트 중 하나인 ‘검은 장미 펜던트’였다.
띠링!
[Cast Spell ‘위치 추적’ 감지] [당신은 ‘위치 추적’을 요청하셨습니다. 유물 ‘검은 장미 펜던트’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위치 추적을 요청했다고? 물론 중얼거리긴 했지만…….
은하는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검은 장미 펜던트’를 슬며시 감싸 쥐었다. 이 아이템에 그런 쓰임새가 있는지 몰랐는데.
어찌 됐든 써 보면 알겠지.
‘활성화.’
속으로 활성화를 허락하는 순간 펜던트 체인이 길게 늘어나더니 고장 난 나침반 바늘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추적 개체 파악 중. 해당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됩니다.] [ – – – Loading – – – ]…….
정말 펜던트는 박제휘를 발견할 것일까? 은하는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우선 ‘요청’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리저리 흔들리던 펜던트가 딱 멈추더니 한 방향을 정확히 가리켰다.
은하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남은 거리 451m] [남은 거리 336m] [남은 거리 199m]양산을 쥔 손에 슬쩍 힘을 주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피부 표면을 맴도는 기분 나쁜 한기, 그리고 비릿한 악취가 점차 강해졌다.
뿐만 아니라 듬성듬성 피어 있던 연분홍색 산호들은 어느새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빼곡하게 퍼져 있었다.
‘산호…….’
우뚝.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벽면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산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 조우했던 불멸 길드원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일부가 산호에 뒤덮여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역시 이 산호들은…….’
은하가 무심코 산호를 향해 손을 뻗는 찰나,
쿠구구구─
동굴 전체가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굴 내부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어둡고 축축한 공간입니다. 산호초가 내는 은은한 빛에만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 명중률 20% 감소 / 치명타 확률 15% 감소] [변동 값을 일시 조정합니다.] [ – – – Loading – – – ]흔들리는 땅 위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은하 앞에, 다시금 시스템창이 겹겹이 팝업됐다.
[예기치 못한 오류 발생.] [당신은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와 영혼이 결속된 상태입니다.] [패시브 ▶ ‘밤을 읽는 자’ 활성화. 밤눈이 밝아집니다. 어두운 공간에서 전투 시 명중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해당 게이트의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조정된 변동 값을 초기 상태로 변환합니다.]이내 벽인 줄로만 알았던 동굴 내벽이 마치 자동문처럼 양옆으로 열렸다.
휘오오오…….
열린 틈새로 기묘한 바람이 불어왔다. 피부 표면을 기분 나쁘게 훑는 그 눅눅한 바람은, 마치 은하에게 들어오라 손짓하고 있는 듯했다.
[남은 거리 30m]“…….”
찰박─
은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반경 200m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섬이었다. 천정은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종유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외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섬 곳곳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산호초와,
쏴아아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폭포.
이 작은 섬을 둥그렇게 감싼 폭포는 하얀 물안개를 뿜어 댔다. 은하는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굴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이곳의 풍경은 정말이지 낙원과 같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은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저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섬 정중앙에는 커다란 구체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힌 은하는 구체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실루엣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새의 날개 형태를 한 두 팔에 지느러미가 붙어 있는 다리는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놈을 마주한 은하는 비로소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환각의 원인은 바로 저 녀석이라고.
[…….]그 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물로 가득해 보이는 구체 속에서 ‘그것’이 히죽 웃는 것이 보였다. 스르륵 벌어진 입술 새로 상어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촘촘한 이빨이 살벌하게 드러났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당신을 흥미롭게 주시합니다.]팟!
은하는 반사적으로 땅을 걷어차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녀석의 레벨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너로군.”
저 녀석이 바로 보스 몬스터라고 말이다.
전투태세를 잡은 은하가 스르륵 상체를 낮추었다. 그런데.
툭.
“……?”
문득 발밑에 무언가가 걸렸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 본 순간, 은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은하는 황급히 상체를 숙여 그것을 유심히 응시했다. 분홍색 산호 더미에 뒤덮인 얼굴. 그는 분명,
[남은 거리 1m 미만] [안내를 종료합니다.]박제휘.
은하가 찾고 있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