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52
52. 지키지 못할 약속
부산 자갈치시장. PM 11:53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고요한 적막 사이로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선 슬리퍼를 신은 발이 문득 한곳에서 뚝 멈추었다.
“……이봐, 괜찮아?”
달빛을 등진 남자의 시선이 주르륵 아래로 향했다.
발밑에는 건장한 사내들, 불멸의 길드원들이 낙엽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부산 자갈치시장에 언노운 게이트가 발생한 것이 4일 전의 일이었다. 닥터 플랜트의 연락을 받은 불멸은 곧장 삼십 명의 인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그중 먼저 공략에 나선 이십여 명 전원이 3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길드의 3인자 ‘철인 도성윤’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왔다.
불멸 길드의 2인자, 허재민.
재민은 발밑에 널브러진 불멸 길드원들을 주르륵 눈으로 살폈다. 그중 성윤은 보이지 않는다.
‘도성윤 그 녀석, 아직인가.’
지독하게 잘난 척하더니. 그러게 나 없이는 힘들 거라고 그토록 경고했는데. 돌아오면 꼭 혼쭐을 내 줘야지. 돌아오면…… 돌아오면 말이다.
낮은 한숨을 쉰 재민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길드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들은 기절한 것도 아니었고 다친 것도 아닌 듯했다. 다만 굉장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언노운 게이트의 영향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재민은 자리에 쭈그려 앉아 넋이 나간 듯 보이는 부하 헌터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한 길드원이 뻣뻣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형, 형님. 게이트 안에 여자가 들어갔어요.”
“뭐?”
부하 헌터의 말에 재민이 스르륵 고개를 들어 게이트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 누구.”
“흐, 흑염의 프린세스라고…….”
“흑염, 뭐?”
“흑염의 프린세스요. 늑대 길드와 계약했다는 F급 헌터 말입니다.”
재민은 한쪽 눈썹을 기묘하게 올렸다.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있잖습니까. 까만 드레스에 양산 들고……. TV에도 한 번 나왔는데요.”
“난 그런 거 몰라. 요새 신인들이 한둘이어야지.”
짧게 답한 그는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한데. F급이라는 그 여자는 대체 어떻게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지?”
재민은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은 부하 헌터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덩치가 큰 헌터의 오른뺨을 찰흙처럼 쭈욱 잡아당겼다.
“응? F급 헌터 하나를 막는 데에 너희들만으로 부족했을 리는 없고.”
“윽…… 재성함미…….”
휙.
재민은 헌터의 뺨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힘이 어찌나 셌던지 잡혀 있던 헌터는 고무줄처럼 픽 튕겨져 나갔다.
그들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며, 재민은 혀를 끌끌 찼다.
“너희를 통솔하고 있던 도성윤의 고생도 알 만하다. 그렇게 약해 빠져서야, 원. 네놈들은 어디 가서 불멸의 이름을 댈 자격이 없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양산 몸통으로 그들의 목뒤를 차례로 가격한 다음, 쫓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속도로 게이트에 뛰어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이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불멸에 몸을 담은 헌터 여럿이서 고작 F급 컨셉 헌터 한 명을 저지하지 못한 것. 그 사실에 있어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한심한 것들. 서울로 돌아가면 각자 팔 굽혀 펴기 2천 번, 윗몸 일으키기 3천 번씩이다. 알겠나?”
“죄송합니다!”
“알겠냐고!”
“알겠습니다악!”
그들은 고함을 지르듯 답했다. 그러는 와중에 한 그림자가 스르륵 재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부님을 부를까요?”
재민은 힐끗 오른쪽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아니. 방해할 수는 없지. 얼마 만의 데이트겠어?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예정대로 이곳에 도착하실 거다.”
“그럼, 쫓을까요.”
휘오오.
바닷바람에 재민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게이트 입구를 응시했다.
마치 자력(磁力)이라도 가진 양 검은 소용돌이는 주변 낙엽이나 자갈들을 미세하게 끌어당겼다. 그 신비하고도 기이한 모습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블랙홀의 축소판처럼도 보였다.
“……내버려 둬. 어차피 결과는 두 가지야.”
시커먼 균열에서 시선을 돌린 재민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안에서 죽거나, 나와서 죽거나.”
검고 커다란 소용돌이 주변으로 파지직, 까만 스파크가 자잘하게 튀고 있었다.
* * *
“──하야.”
푹신하다.
어딘가 익숙한 향기도 났다.
된장찌개 냄새.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은하는 번쩍 눈을 떴다.
“은하야.”
“……!”
그리고 굳었다.
“벌써 9시야. 아침 먹어야지?”
“엄…….”
……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분홍색 곱창 밴드로 느슨하게 묶은 머리. 모녀인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은하의 것과 꼭 닮은 눈매. 새로 사라고 해도 10년도 넘게 고집하던 낡은 앞치마까지.
“일요일이라고 너무 늦잠 자는 거 아니니? 어제 늦게까지 안 자고 뭐 했어?”
저를 꾸짖는 엄마를 외면하고, 은하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틀림없다. 이곳은 30여 년 전 엄마와 둘이 살던 집이었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렀다고는 해도, 십여 년을 넘게 살았던 집의 풍경을 잊을 수는 없었다.
눈앞에 마주한 익숙한 얼굴과 풍경에 감격하는 것에 앞서 은하는 의문을 느꼈다.
‘이게 대체.’
분명 자신은 부산 자갈치시장에 있었다. 불멸 길드원과 트러블이 있었고, 그들을 기절시킨 뒤 게이트에 뛰어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으이구. 우리 딸, 아직 잠이 덜 깼구나. 어서 가서 세수하고 와. 밥 차려 놨어.”
멍하니 주변을 응시하는 은하를, 엄마는 떠밀다시피 화장실에 집어넣었다.
좁은 화장실에 우두커니 선 은하는 느릿하게 내부를 훑어보았다.
컵에 꽂혀 있는 칫솔 두 개. 가장 위쪽 선반의 선인장 조화. 언젠가 욕조에 붙여 두었던 스티커.
심지어는…….
언젠가 엄마가 받아 왔던 촌스러운 자수가 놓인 수건까지. 그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대로였다.
수건을 만지작거리던 은하는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고양아.”
잠시 입을 닫았다가, 다시 한번 불러 본다.
“고양아, 거기 없어?”
주변 어디에도 노란 메시지창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는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았다. 원래라면 팟! 하고 불꽃이 피어올라야 하는데 불꽃은커녕 자그마한 불씨조차 날리지 않았다.
짐짓 굳은 은하가 고개를 든 순간,
“……뭐야.”
화장실 거울을 통해 낯선 듯 익숙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허리를 덮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이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로 짧은 단발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두발 규정 때문에 19살까지 쭉 단발을 유지했었는데…… 잠깐.
‘설마 과거로 돌아온 건가?’
만일 그게 아니라면…….
‘여기가 언노운 게이트? 이건 환각인 건가?’
그것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다만 게이트 내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광경이긴 했다. 맨발에 화장실 타일이 닿는 차가운 감촉마저도 현실적이었다.
우두커니 선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하야, 아직이니? 밥 다 식어.”
엄마의 독촉에 은하는 우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아담한 식탁 곁에 앉아 조금 묘한 눈으로 아침 식사 메뉴를 응시했다. 된장찌개가 담긴 뚝배기 위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어제 아랫집 아줌마가 김장하고 남은 김치를 좀 나눠 주셨거든. 너 저번에 그 집 김치 맛있다고 했잖아.”
분주히 그릇을 옮겨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엄마를, 은하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필요하면 젓갈도 조금 나눠 주신다는데 받아 올까? 우리 딸 명란젓 좋아하잖아.”
“……응.”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엄마가 무슨 이야길 하는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
그저 살아 움직이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이렇게 엄마를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엄마의 등은 은하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왜소했다. 은하는 저도 모르게 그 등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머.”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는 딸이 이상했는지 엄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하는 엄마를 안은 두 팔에 꼭 힘을 주었다.
‘아주 잠시 동안만.’
눈앞의 엄마가 진짜인지, 잘 만들어진 가짜인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잠시만 이러고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엄마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싫은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자신의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딸을 바라보다가 짝 손뼉을 친다.
“참. 내일이 대학 합격 발표 날이었지?”
대학 합격 발표……. 그 말에 은하는 엄마를 안고 있던 팔을 내리고 벽면에 걸린 달력을 확인했다.
──1997년 9월.
역시 ‘현대’가 아니었다.
그 날짜를 눈에 담은 순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멍청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심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것이 꿈이었노라고.
그날, 엄마는 죽지 않았노라고.
“오랫동안 고생했으니까 분명 합격할 거야. 우리 딸은 뭐든 잘하니까.”
이번에는 엄마가 은하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그 손길만은 진짜처럼 따듯하고 포근해서, 은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그대로 안겨 버렸다.
“입시 준비가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우리 딸이 웬일로 응석을 다 부리고.”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안긴 은하는 엄마의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그리고 쥐어 짜내듯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조금, 힘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고생 많았어, 우리 예쁜 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뺨을 타고 내려와 부스스한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순간, 은하는 보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왼손. 정확하게는 왼쪽 팔목에 ‘그것’이 없었다.
낡디낡은 소원 팔찌. 은하가 선물한 이래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던, 엄마의 보물이자 유품.
그것은 마치 깨고 싶지 않았던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우뚝 굳어 버린 은하는 습관처럼 자신의 왼쪽 팔목을 감싸 쥐었다.
“……엄마.”
소원 팔찌를 매만지던 은하가 입을 연 순간,
야옹─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어머, 고양이네. 귀여워라.”
은하의 집은 2층 빌라였기에 종종 길고양이나 참새가 창틀에 앉아 쉬었다 가곤 했었다.
엄마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은하는 베란다 창틀에 앉아 이곳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검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야옹─ 야옹─
고양이는 뭐가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반복하여 울고 있었다. 앞발을 들어 콩콩 유리창을 두들기기도 했다.
“저런. 배가 고픈 걸까?”
가엾게도. 엄마가 중얼거렸다.
윤기 나는 까만 털, 호박을 빼 박은 듯한 황금 눈동자. 그에 이끌리듯 은하는 저벅저벅 베란다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좁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집은, 지금 와서 다시 보니 굉장히 비좁았다. 식탁에서 몇 걸음만 걸어도 금방 베란다 문에 도달할 정도로.
시우가 제공해 준 초호화 오피스텔에 벌써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이 좋았다.
나무 냄새가 밴 책장. 낡은 담요가 얹힌 가죽 소파. 늘 꺼질 일 없었던 주홍색 거실 등. 잊은 줄 알았지만 잊은 적 없었던 소소한 것들.
지나고 나니 모두 행복이었다.
“은하야?”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하를 바라보았다. 베란다를 향해 걸어가던 은하는 일순 걸음을 멈추었다.
“……엄마, 내가 대학 합격하면 기쁠 것 같아?”
줄곧 물어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은하가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지금 눈앞의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닌 것을. 바보같이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은 입매가 희미하게 비틀어졌다.
은하는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어 다시금 걸음을 뗐다.
─떼려고 했다.
“우리 딸이 대학 가는 건 엄마 소원이었잖아. 당연히 기쁘지.”
멈칫.
“게다가 미국 대학이라니. 엄마는 옆집 윗집 다 자랑하고 다닐걸?”
은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럼.”
망설이지 않고 되돌아오는 대답에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지금 이 모습을, 이 순간을 눈꺼풀 뒤편에 진하게 새기듯 아주 천천히.
“응. 다행이다.”
늘 단단하게 억누르고 있던 입매가 만개하듯 흐드러진 미소를 피워 냈다.
“이만 가 볼게요.”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은하는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엄마는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은하를 붙잡지도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밥은 먹고 가야지?”
은하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다음에.”
드르륵.
열린 창문 새로 미끄러져 들어온 늦여름 바람에 검은 단발머리가 휘날렸다.
“다음에 먹을게요.”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