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96
96. 삼십여 년 전의 은인 (1)
샛노란 달이 구름 뒤에 숨은 밤.
준환은 갑작스러운 제천대성의 부름에 대학 병원 옥상으로 올랐다.
“자네가 고생이 많군그래.”
쪼르르륵.
루비처럼 선명한 붉은빛의 레드 와인이 종이컵 가득 차올랐다. 유환은 마른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준환에게 받으라는 듯 슬쩍 턱짓했다.
“아…… 감사합니다.”
준환은 주춤주춤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술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병에 붙어 있는 라벨이나 1947이라는 숫자를 보았을 때 분명 저렴하지는 않을 것이라 추측했다.
“같은 ‘환’끼리 한잔하고 싶다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술이 있어서 가져와 봤지. 입에 맞는가?”
“예, 향이 좋군요.”
“그렇지? 역시 ‘환’끼리는 통하나 보군.”
으핫핫! 유환은 송곳니를 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달밤에 옥상에서 술잔을 비워 나갔다.
어느덧 눈앞의 안주가 절반 정도 줄어들었을 때쯤, 준환의 뺨이 발갛게 물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유환이 슬그머니 자세를 바꿔 앉았다.
“꼬맹이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들었는데.”
“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닥터 플랜트께서 성심껏 돌봐 주신 덕분이죠.”
딸꾹…… 아, 실례. 준환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낮게 웃은 유환은 종이컵에 남은 와인을 한 방에 털어 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픽시 파우더…… 아니, 흑염의 프린세스 덕분은 아니고?”
멈칫.
종이컵을 입에 가져가던 준환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돌처럼 굳은 채 시선만을 들어 유환을 응시했다. 흐릿하던 동공에 취기 대신 경계가 깃들었다.
유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표정 말게. 뭐 딱히 캐낸 건 아니고, 닥터 플랜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야.”
“그 일은…….”
“알고 있다. 뭐, 너희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내가 먼저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어. 내가 그렇게 생각 없는 놈으로 보이나?”
어깨를 으쓱한 유환이 빈 종이컵에 다시 한번 와인을 따르며 이어 말했다.
“그쪽만 의리가 있는 건 아냐. 불멸도 그렇지. 그자에게는 불멸도 한 차례 빚을 졌거든.”
“빚…… 이요?”
“일전의 부산 자갈치 시장 언노운 게이트.”
꿀꺽, 와인을 넘긴 유환이 안주에 손을 뻗으며 덧붙였다.
“그때 흑염의 프린세스가 우리 길드원들을 구해 주었어.”
“…….”
그런 일이 있었나. 전혀 몰랐다. 준환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놀라지 않는군.”
유환이 중얼거렸다. 준환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환의 입꼬리가 씨익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F급 헌터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궁금하지 않나 봐.”
“그건…….”
“그래. 그자는 F급 따위가 아니지.”
그녀와 주먹을 부딪쳐 본 유환이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협회에서의 소집령, 군단에게도 갔겠지? GIA인가 CIA인가, 녀석들이 꽤 오싹한 예언을 남겼다더군.”
군단의 2인자인 준환에게도 소식이야 전달됐을 터.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해도 되겠지.
종이컵을 탁, 내려 둔 유환은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자의 힘이 필요해.”
“…….”
유환이 말하는 ‘그자’. 흑염의 프린세스.
잠시 침묵하던 준환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십니까?”
호오, 이것 봐라. 유환이 스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늑대를 나왔다는 사실은 조금만 조사해도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남은 수단은 군단의 문을 두드리는 것뿐.
그녀는 트릭스터를 위해 40만 코인을 선뜻 지불하여 픽시 파우더를 구해 왔다. 그것 자체가, 흑염의 프린세스와 군단 간의 인연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
“아니, 그냥 연락처를 내게 넘겨. 내가 직접 이야기하지.”
유환의 말에 준환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두 뺨 가득 물들어 있었던 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제자리에 선 준환은 유환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술은 잘 마셨습니다, 제천대성. 하지만 그분에 대한 정보는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벤치 위에 책상다리로 앉은 유환이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웃음기 하나 섞이지 않은 시선에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준환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분은 군단의 패밀리이며, 우리가 마스터와 더불어 충성을 맹세한 분입니다. 또한…….”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힐끗 바라본 준환이 느릿하게 덧붙였다.
“군단의 충성은 그 어떤 비싼 술로도 희석할 수 없을 겁니다.”
“…….”
“비싼 술에 대한 값을 치르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휘이잉─
병원 옥상을 가로지르는 바람.
옥상 화단에 핀 붉은 꽃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 사이로 픽, 작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멀어졌다.
“이래서 난 자네가 좋아.”
읏차. 자리에서 일어난 유환이 준환 앞에 섰다. 준환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2m에 육박하는 유환 앞에서는 마치 청소년처럼만 보였다.
“술은 하나도 아깝지 않아. 이런 것쯤, 내 창고에는 몇백 병은 있거든.”
건들건들한 말투였지만 준환은 그것이 결코 허풍은 아닐 거란 점을 알았다.
우두커니 선 준환을 지나친 유환은 옥상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끼이익.
녹슨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유환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전해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
“나 제천대성, 유환이 애타게 찾는다고 그자에게 전해 줘.”
일전의 펜던트 값까지 쳐서, 이것보다 훨씬 더 비싼 술을 준비해 두겠다고 말이야.
* * *
수업이 끝난 뒤 은하는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고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어느 고즈넉한 언덕. 어머니를 모신 곳이었다.
귀뚜라미 소리를 벗 삼아 잘 가꾸어진 잔디를 밟으며 은하는 방금 전 준환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제천대성이 은하를, 흑염의 프린세스를 찾고 있다고.
「……아마, 이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협회의 일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은하는 일단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뒤, 준환은 메신저를 통해 불멸 본부의 전화번호를 전해 주었다. 불멸 측에는 은하의 연락처를 넘기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불멸] 02-XXXX-XXXX / 내선 번호 XXX은하는 액정 위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휴대전화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잔디 가운데 난 돌길을 따라 바짝 마른 낙엽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을 밟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
돌연 우뚝 걸음을 멈춘 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의 무덤 앞,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누구지?’
낯선 남자였다. 조문객?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까만 정장을 갖춰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모습은 분명 그리 여길 만했다.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은하는 문득, 현대에 나오고 처음 어머니의 묘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은하가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던 동안, 현실 시간으로는 자그마치 30년이 지났다. 그 긴 세월 내내 방치되었을 줄로만 알았던 묘는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깨끗했던 것.
비석 주변에 남아 있던 타다 만 재, 그것은 분명 방문객의 흔적이었다. 그녀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온 것이다.
머릿속 퍼즐을 하나씩 맞춰 나가던 은하는 수수께끼의 조문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그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금발…….’
각성자라는 존재가 생겨나며 현대인들은 국적과 상관없이 머리칼과 눈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금발이라고 해서 외국인이라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었다.
그를 조금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Rrrrr…….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은하의 것이 아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앞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은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영어. 남자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분명 영어였다.
“【응, 이제 곧 갈 거야. 알았어.】”
뚝.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도로 앞주머니에 넣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색조 화장을 한 듯 조금은 불그스름한 눈가. 그 가운데 공허한 빛깔의 잿빛 눈동자. 색소가 옅은 베이지색 머리카락.
은하는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백이준?’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지금 어머니의 묘 앞에 서 있는 그는 분명 이준이었다.
‘왜 여기에 백이준이.’
은하의 까만 눈동자에 옅은 혼란이 일었다.
얼마 전, 파티에서 이준을 만난 이후 은하는 그가 완전히 변했다고 확신했다. 은하가 알던 이준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그런데…….
“또 들르겠습니다.”
차게 식은 비석 앞에서 공손히 상체를 숙인 이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자리에서 두세 걸음 물러난 그는 이내 차분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은하가 숨은 곳, 그 반대쪽 언덕길로 서서히 사라졌다.
“…….”
바스락─
나무 그늘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은하는 그의 등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 한구석에 들어오는 꽃다발 하나. 바람결을 따라 하얀 연기를 피워 내는 향초는 아직 채 다 타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은하의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
여태까지 묘를 돌봐 주었던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준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미국에 있지 않았던가.
하얀 리본으로 정성스레 묶은 꽃다발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미 이준의 모습은 저 언덕길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현대에 좀 맞춰 보겠다고 그런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헌터 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인데, 진짜 컨셉 헌터라도 될 작정이야?’
‘난 있잖아. 너 같은 사람이 헌터라는 사실이 싫어.’
그날 밤의 이준. 그리고…….
‘그래도 난, 너처럼 되고 싶어. 앞으로도 지금 네 모습 그대로 있어 달라는 말이야.’
‘난 지금 네 모습이 좋아. 아, 아니, 좋다는 말은 그러니까…….’
솨아아아─
고즈넉한 언덕을 뒤덮은 바람에 은하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뒤얽히듯 흩날렸다.
“……대체 넌.”
아직 멀리 가진 않았을 것이다. 은하는 뒤늦게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타닷─
느릿했던 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물어봐야 했다. 정말 네가 어머니의 묘를 돌봐 준 것이냐고.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그래 주었냐고.
언덕길을 내려온 은하는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준은 보이지 않았다. 골목으로 들어간 걸까?
은하는 얕게 숨을 헐떡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패시브 ▶ ‘고양이의 수염’ 활성화.]…….
안 되겠다. 기척을 감지하기에는 주변에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빠르게 단념한 은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티셔츠 안에 숨겨져 있던 펜던트를 꺼내었다.
“추적.”
[Cast Spell ‘위치 추적’ 감지] [당신은 ‘위치 추적’을 요청하셨습니다. 유물 ‘검은 장미 펜던트’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활─.”
입술을 달싹인 그때였다.
“……차은하?”
멈칫. 은하는 펜던트를 거머쥔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누군가 저를 불렀다.
이유라도 흑염의 프린세스도 아닌…… 분명 ‘차은하’라고. 은하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방금 전 사라진 이준이 아니었다.
‘차은하.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가족을 잃었다. 나 역시 딸을 잃었고.’
──소장님.
‘네가 살리지 못한 사람보다, 네가 앞으로 살릴 사람이 훨씬 많겠지.’
‘그게 네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삼십여 년 전.
훈련생 시절 자신을 돌봐 주었던 훈련소장, 견원철이 새하얀 백발을 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