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3
00033 보스 몬스터. =========================================================================
김한별은 내게서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나보고 빨리 일어나라고, 도망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이윽고 워프 게이트에 푸른빛이 번쩍이는걸 끝으로 나를 제외한 모두의 전송이 완료되는걸 볼 수 있었다.
갔나?
갔지?
갔네.
어느새 내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수북이 뒤 덮인다. 보스 몬스터는 먹잇감을 놓친 것은 상관없는지 나를 보며 연신 크릉거리고 있었다. 나는 양손을 땅에 짚은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굴러 다녔더니 온몸이 찌뿌둥한 기분 이었다. 잠시 몸을 뒤틀어 허리를 풀자 우두둑 거리는,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잘 사용했던 석궁을 물끄러미 보다가 땅에 떨어뜨렸다.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탁 소리와 함께 석궁이 흙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주저 없이 떨어트린 석궁의 위를 발로 밟아버렸다.
파각!
석궁이 반으로 부러진걸 본 나는 무심한 얼굴로 일행이 짐을 떨어뜨린 장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력을 일으켜 허공섭물의 묘리를 발현하자 안현이 떨군 장검이 휘르르르 돌며 내 손에 착 안겼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장검을 손에 들게 되었다.
통과 의례를 하면서 내내 생소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수중에 칼이 없다는 점 이었다. 홀 플레인에서 나는 칼을 내 생명이나 다름없이 여겼다. 잠을 잘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 씻을 때도 나는 칼을 꼭 옆에 두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안현에게 칼을 건네면서 왠지 전우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었다.
이제 다 끝났다. 홀 플레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얼마나 이 순간이 오기를 원했던가. 얼마나 다시 돌아가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랬던가. 한때 꿈이라고 여겼던 사실은 제로 코드를 얻으면서 현실이 되고 그 현실까지 이제 막 한걸음만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걸 느꼈다.
내 뜨거운 감정에 심장에 잠든 화정이 반응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리고 온 몸을 구석구석 흐르는 피가 뜨겁게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멈추었던 호흡이,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금 거칠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이제 막 오르기 직전의 순간.
크아아아아아아앙!
보스 몬스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놈을 베기 전 손에 든 검을 조용히 응시했다. 과거의 나를 상회하는 실력을 손에 넣었지만 내가 최강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설령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다시 한번 큰 상처를 받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으니까. 나는 일말의 걱정도 없이 검을 들어올리며 보스 몬스터를 겨누었다.
내가 진심으로 검을 든 그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공기가 일변했다.
『특수 능력 신검합일(랭크 EX)이 발동합니다. 검을 드는 순간 검을 사용하는 모든 행동에 추가로 긍정적인 보정을 받습니다.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수많은 업적 그리고 직업 보정으로 2랭크 상승 보정을 받습니다.』
『잠재 능력 백병전(랭크 A+)이 발동합니다. 근접 무기를 다루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미 극한을 넘어선 능력입니다. 근접 전투에 한해서는 절대로 밀리지 않습니다.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직업 보정으로 1랭크 상승 보정을 받습니다.』
나는 예전에 소드 마스터였고, 지금은 소드 스페셜리스트(검술 전문가)였다. 검에 관련된 능력을 갖고 있고 검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검을 들고 들지 않을 때 위력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표홀한 뜬구름 같았다면, 지금은 확실하게 는 의지가 담긴 폭풍 같은 살기가 놈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의 내 눈에 놈은 너무나 하찮은, 마치 벌레만도 못할 정도로 보였다. 내가 한 발자국 내딛자 보스 몬스터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영악하다고 해도 괴물인 만큼 야생의 본능은 살아있다. 서로간의 클래스가 아득하리만치 차이가 나는걸 인지한 이상 이미 놈은 전의를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 검술의 기본은 태극에 원류를 두고 있다.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하기 보다는 내 힘과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이 많았다. 최상위권 사용자들과 비교해 근력이 딸리던 나로서는 유일한 대응 방법 이었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전기치유(기에 전념해 부드러움에 이름), 이유극강(부드러움으로 굳센 것을 이김)의 원리를 이용하는데 요체는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지금 놈한테서 선공을 기대할 수 없는 만큼 내가 먼저 공격할 생각 이었다. 지금 자세는 나만의 발검 술을 펼치기 직전의 일종의 준비 자세였다. 물론 무방비한 상태로 보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상대는 내 첫 검로가 어떤 방향으로 공세를 취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상태로 번개 같은 속도로 검을 휘두르면 상대는 검로를 읽기도 전에 당하거나 아니면 공세 주도권을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눈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보스 몬스터를 보며 곧바로 발검(拔劍)했다.
이윽고.
내 검기는 공기를 찢어 가르며 놈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
”일검살. 멋진 발검 술 이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통과 의례의 생환을 축하합니다. 본 사용자는 6일차 16시 42분 27초를 기점으로 홀 플레인에 입장할 자격을 얻었음을 증명합니다.”
한칼에 보스 몬스터를 반으로 갈랐다. 그 후 소환의 방으로 돌아온 뒤 세라프가 나를 보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녀는 여전히 작은 제단 위에 빛나는 날개를 일렁이며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도 안되어 다시 보는 거지만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털썩 주저 앉았다.
“애들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통과 의례는 홀 플레인과 다르다. 사용자를 관전하는데 제한이 없는 공간이다. 내 플레이를 본게 분명하니 당연히 나와 같이 행동한 사용자들도 봤으리라 여겼다.
“타 사용자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건 허가 되지 않은 사항입니다.”
“쓰리 사이즈 궁금한 거 아니거든. 그냥 잘 들어갔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거 되게 예민하게 구네.”
내 말을 듣던 세라프는 한숨을 폭 쉬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용자 안현, 안솔, 이유정, 김한별은 정상적으로 소환의 방으로 전송 되었습니다. 현재는 전담 천사들과 대기 상태로 있습니다.”
“그렇군. 반나절 교육 받고 홀 플레인으로 들어가는 건가?”
“교육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사용자들의 특성에 맞는 직업과 능력을 개방해야 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본인의 주도하에 익숙하게 끝냈지만 다른 사용자들과 동일시 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이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예전에 7일을 버틴 나는 소환의 방으로 돌아온 후 홀 플레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익히고 기본 설정 후 입장할 수 있었다. 그때 걸린 시간이 체감상 반나절 이었다.
“모든 사용자들을 홀 플레인으로 전송하는건 일괄적으로 처리합니다. 그러므로 통과 의례 7일차가 끝나고 자격을 얻은 사용자들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나라도 지금 보….”
“절대로 안 됩니다.”
한시라도 빨리 입장하고 싶었던 내게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일부러 보스 몬스터도 신속하게 처리하고 온건 데.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다 듣기도 전에 내 말을 자르는 세라프를 보며 나는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럼 거의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여기 있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그 동안 마냥 기다리라고? 너랑 짝짝 궁이라도 할까?”
내 짜증 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세라프는 명료하게 답했다.
“원하신다면 해드리겠습니다. 일찍 통과한 사용자들에 한해 원래 조금 더 상세한 홀 플레인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필요 없어.”
“그럼 짝짝 궁이라도 하시겠습니까?”
“후…. 아니. 그냥 얘기나 하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세라프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무지 농담이 안 통하는 천사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통과 의례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 몇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물론 말투는 시비조를 듬뿍 담아서. 얘기나 하자는 내 말에 세라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 의례를 쭉 플레이 하면서 느낀 건데, 너희들 밸런스 생각은 했어?”
“네.”
단문으로 대답하는 세라프.
“…숲 한가운데 떨어트린 거랑 레이스는 그렇다고 치자. 도대체 소환 주문에 보스 몬스터는 무슨 놀부 심보냐. 진짜로 무슨 통과 의례가 이래. 이래서는 예비 사용자들이 통과 할 수가 없잖아.”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마지막에도 내가 없었으면 우리 일행은 전멸이나 다름 없었어. 그런 괴물 같은 놈을 풀어놓은 이유가 도대체 납득이 안돼서 그래.”
내 말에 세라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통과 의례는 각 회 차에 참가된 사용자들의 수준에 맞춰 자동적으로 밸런스 조절이 됩니다. 물론 이번 회 차는 특별히 사용자 김수현을 제외하고 했습니다만. 아무튼 올해 사용자들의 역대로 따져도 다섯 손에는 꼽힐 만큼 가능성 있는 사용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보스 몬스터는 이해가 안되. 마력도 사용할 수 없는 사용자들인데 어떻게 보스 몬스터를 잡아.”
“잡는 건 불가능 합니다. 공략법은 따로 있습니다. 보스 몬스터는 워프 게이트와의 남은 거리 200 미터에서 300 미터 사이로 랜덤 하게 소환됩니다. 홀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고, 최소 다섯 명이 있으면 최소한 한 명은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라프가 하는 말을 나는 바로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최대 네 명을 미끼로 도망친다는 소리네.”
“정답입니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충 보스 몬스터를 워프 게이트 주변에 배치해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통과한 사용자들은 그 동안 함께 했던 동료를 잃는 슬픔을 맛봐야 된다. 홀 플레인 안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비슷한 충격을 주고 시작하자는 의도를 가진 것 같았다.
악취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 말은 없었다. 내가 돌아온 이유도 어떻게 보면 위와 비슷한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서 비롯된 것 이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 먹을 찰나 세라프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어느 정도 난이도가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참고로 앞서 동시에 처음으로 도착한 네 명은 소정의 골드 포인트 포상이 주어진 상태 입니다.”
“…오? 그럼 우리들 말고 먼저 통과한 사람들은 없을 텐데. 나는?”
“사용자 김수현은 5등으로 통과했습니다. 앞서 말한 네 명은 공동 1등입니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 각각 골드 포인트 2500포인트씩 지급할 예정 입니다.”
오호. 그건 희소식인데. 초반 2500포인트면 상당한 도움이 된다. 사용자 전용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골드 포인트는 초반에 굉장한 유용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오. 골드 포인트. 나도 줘.”
“아쉽게도, 1등에게만 지급합니다. 원래 한 명한테 1만 포인트를 지급하는데, 이번엔 공교롭게도 네 명이라 4등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런가.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곤 고개를 주억였다. 2500포인트면 홀 플레인 골드로 환전해 초반에 돈이 쪼들릴 걱정이 없었다. 아니면 초보자용 무기도 구매할 수 있고.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용자 김수현. 상당히 아쉬워 하는 것 같습니다. 고작 2500 포인트에 불과합니다.”
“골드 포인트가 땅 파서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용자 김수현이 현재 보유한 골드 포인트는 정확히 3,784,720 포인트 입니다. 굳이 2500 포인트에 연연해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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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