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03
00402 3. 두 번째 의뢰 – 구출 : 얼어붙은 숲(5/5) =========================================================================
송승규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좌우로 몇 번 흔들리는가 싶더니 얼음 벽을 훌쩍 넘어 자취를 감췄다.
‘도망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재빠르게 클랜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기, 김수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고개 숙여 사죄하는 비비앙.
“하아…. 하아….”
살짝 숨을 몰아 쉬는 한나.
일견 보기에 대부분 침착해 보였지만 한나는 약간 놀란 듯싶었다. 이미 사전에 공지를 했음에도 저러는걸 보면, 아마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한나는 애써 아닌 척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살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미약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갑자기 목이 돌아가는데 깜짝 놀라서…. 이제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졌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명료히 대꾸한 후 클랜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 또한 나에게 쏠려있었다.
‘바로 가는 게 좋겠지.’
이윽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송승규의 의뢰, 동료들의 생사 확인 및 구출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파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시간부로 클랜 로드의 직권 아래 조사단을 해체합니다.”
나는 잠시 말을 끊었고, 중단에서 선두 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자 한나는 한결 안도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섰다.
“그럼 지금부터 얼어붙은 숲의 중앙, 얼음 탑의 탐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진 순간 클랜원들은 곧바로 진형을 변경했다.
선두에는 나와 한나가, 중단에는 하연과 신재룡이, 그리고 후미에는 현과 비비앙이 맡는다.
인원이 적은 만큼 진형은 순식간에 갖추어졌고, 우리는 곧바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탑의 원혼은 우리를 9층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리고 난 지금 9층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미로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습격 받는 것보다는, 호랑이 굴로 직접 들어가 때려잡는 게 훨씬 편한 길이었다.
원혼이 말대로 길의 끝나는 부분에는 오른쪽으로 새롭게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이어서 단숨에 계단을 오르자 7층에서 보았던 공허한 입구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여기도 철문은 존재했다. 다만 7층처럼 굳게 닫혀있는 게 아닌, 활짝 열려져 있는 상태였다.
‘있다.’
그리고 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문이 9층으로 통하는 통로이며, 원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등 뒤로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의 안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컴컴했다.
나 또한 감각으로만 느꼈을 뿐, 마력으로 끌어올린 안력에도 희미한 실루엣만 보이고 있었다. 내부의 어떤 기운이 안력에 의한 투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바로 들어가기 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곳은 현대가 아닌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입니다. 원혼은 한낱 괴물에 불과하며, 우리 사용자들은 괴물을 잡을 능력이 있습니다.”
“…혀, 형 말이 맞아요. 저깟 괴물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안현이 곧바로 동의하고 나섰다. 그리고 난 녀석을 지그시 응시했다.
맞장구 쳐주는 건 고마운데 입술 좀 그만 떨지 그래.
“현이 말이 맞습니다. 그저 외관이 약간 끔찍한 괴물일 뿐, 우리들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마볼로도 잡아낸 전력이 있다는 것을요.”
사실 내가 혼자 잡은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사기만 진작할 수 있다면 뭔 말을 못하랴.
나는 말을 마치는 것과 함께 귀걸이를 떼어내었고, 이내 찬란한 빛을 내뿜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에서 뿌려지는 은은한 빛은 입구 안으로 흘러 들어 약간이나마 시야를 밝혀주었다.
“그럼 안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이윽고 어둠이 사방에 깔린 방안으로 나와 클랜원들은 동시에 진입했다.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9층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쪽으로 완연히 발을 디딘 순간, 뭔가 기묘한 위화감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헝겊처럼, 뭔가 가슬가슬한 감촉이 느껴진 것이다.
그때였다.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뭔가 단단한 물건을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허공에서 뭔가 길쭉한 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여 제 3의 눈으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는 찰나, 뒤에서 묵직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 ───. ───.”
일단 시야를 확보할 생각인지 신재룡이 사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생성된 구체는 곧 환한 빛을 뿜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그러는 와중에도 불편한 소음은 도를 더해갔고, 이내 약간이나마 잦아졌을 때 신재룡의 주문이 발동했다.
“홀리 라이트(Holy Light)!”
화악!
주문을 영창하자 떠오른 구체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와 방안을 물들인다. 빛 무리는 9층 전체를 밝힐 정도는 못되었지만, 그래도 주변 시야를 확보하는 데는 차고 넘쳤다.
이윽고 구체를 중심으로 일부가 훤히 드러난 9층의 광경.
“허, 허억!”
“으, 으아악! 저, 저게 뭐야!”
그와 동시에, 지금껏 어찌어찌 견뎌오던 클랜원들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9층의 바닥은 공동(空洞)이 연상될 만큼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바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시 후 나와 클랜원들은 허공에 떠 있는 어떤 것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바라본 공중에는 커다란 ‘머리’가 떠 있었다. 어느 정도의 크기냐고 하면 잘 익은 수박 두 통을 합친 정도일까.
드러난 얼굴 또한 가히 그로테스크했다.
얼굴은 이리저리 균열이 일어나 있었는데, 갈라져 터진 곳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와 시뻘겋다는 느낌이 강하다.
또한 눈은 얼굴의 1/3 이상을 차지할 만큼 과도하게 컸고, 눈동자 중앙 절반을 차지한 검은 자위는 흡사 블랙홀을 보는 듯했으며, 입술은 귀밑까지 크게 찢어져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구체가 빛을 밝힌 순간, 아까 제 3의 눈으로 보았던 정보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도독, 오도독!
좌우로 흔들리던 길쭉한 것은, 의뢰인 송승규였다. 원혼의 이빨에 물린 채 머리부터 차근차근 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신을 스쳤던 가슬가슬한 감촉은, 바로 머리칼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머리카락은 방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길고, 수북했다.
오도독! 꿀꺽!
– 히키킥! 히키키킥!
이내 송승규를 모두 삼켰는지, 원혼은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꽝!
일순 강렬한 금속음이 귓가를 강타했다. 설핏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굳게 닫힌 철문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열려있던 문이 원혼이 웃자마자 저절로 닫힌 것이다.
‘퇴로를 차단하려고 한 건가?’
어디서 본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의도대로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문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회로의 마력을 일으킨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가슴에 닿을 정도로 끌어당겼다가, 일직선 방향으로 있는 힘껏 발을 내질렀다.
꽈장창!
그러자 발바닥에 뭔가가 와짝 일그러지는 감각이 느껴졌고, 동시에 육중한 철문은 산산조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얼음이 서려있던 지라 충격이 전체로 전달된 모양이다.
이윽고 다시 뻥 뚫린 입구와 부서진 파편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원혼을 응시했다.
– 히킥?
원혼의 반응은 꽤나 미묘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부릅떠 핏발이 보이는 게, 조금 전 여유로 이 식사를 즐기던 모습과 대비하면 확연한 차이가 보였다.
스스슥…! 스스스슥…!
그렇게 핏발이 서서히 굵어져갈 즈음, 하나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나풀나풀 움직이던 머리카락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동일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전조를 느꼈고, 하여 곧바로 외쳤다.
“모두 전투 준비!”
일순 상세한 오더를 내릴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처리하는 거야 어렵지는 않지만….’
원혼은 내가 긴장할 정도로 강한 괴물이 아니다. 물론 한 유적의 보스인 만큼 일반 괴물들과는 차별화되는 무력은 갖추었지만, 그뿐이었다.
화정을 사용하면 3초안에 결딴낼 자신이 있고, 굳이 화정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혼자서 압도적으로 박살낼 자신이 있었다.
대강 가늠해보건대 원혼은 마볼로는커녕, 재생 능력을 제외한 파멸의 기사 ‘호렌스’와 비슷하거나 혹은 아랫선에 있는 놈이었으니.
그러나 원맨쇼로 해결을 보는 것보다는, 이번 기회로 비슷한 상황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쳤을 때, 보인 것은 쩍 벌려진 원혼의 입이었다. 그리고 사방팔방으로 삐죽하게 솟구친 무수한 머리카락들. 가만히 모습을 보고 있자 꼭 미친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원혼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끼이이이이이이이!
벌려진 입에서 귀를 괴롭게 만드는 커다란 음파가 퍼져 나온다.
발음체의 파동은 공기를 타고 들어와 곧바로 우리가 있는 곳을 강타했다.
『한이 맺힌 음파 공격입니다! 온전한 마법 행사로 볼 수 없는 공격입니다! 마법 저항 행사에 제한을 받습니다!』
『마력 능력치 96! 행운 능력치 90! 일부 방어로 판정합니다!』
순간 아주 미약한 어지러움이 머리를 스쳤다가, 이내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큭!”
“꺄악!”
하지만 몇몇 클랜원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듯 나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리의 진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 삐죽하게 솟아오른 머리카락들이 일거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랜원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보호(Protect)!”
“쉴드 오브 리펠링(Shield Of Repelling)!”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하연과 신재룡의 방어 주문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푸른 달의 언약(Covenant Of Blue Moon) 아래…. 나는 소원한다.”
“월령, 3일의 초승달(Crescent Moon).”
그리고 연이어 들려온 주문은 한 사람, 분명 하연의 음색이었다. 한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건네준 ‘영광의 목걸이’를 사용한 것이다.
우웅!
전방으로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눈썹 모양의 커다란 달이 생성된다. 이내 삽시간에 구체화를 완료한 하연은 짓쳐 들어오는 머리카락을 향해 매섭게 외쳤다.
“분열!”
그 순간 초승달은 순식간에 수십 조각으로 분열되었고, 이내 연속으로 회전하여 사방으로 발출됐다. 그녀의 장기인 마법 연쇄가 시크릿 클래스 ‘푸른 달의 마도사’와 합쳐져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썩둑! 썩둑! 썩둑! 썩둑!
이윽고 핑그르르 돌며 날아간 초승달은 가시 모양의 머리카락은 단숨에 잘라내었다. 푸르스름한 빛은 자신의 예기를 뽐내듯이 거침없이 자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분명 하연의 마법은 효과적이었지만, 들어오는 머리칼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일부 잘라져 떨어진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치고 들어왔고, 두 겹으로 생성된 방어막을 거세게 찔러 들었다.
쨍! 파캉!
“수, 숫자가 너무 많아요!”
“이대로라면 보호막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하연과 신재룡의 다급한 목소리.
흘끗 뒤를 돌아보자 애꿎은 창만 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안현과, 쉴 새 없이 섬광을 터뜨리는 임한나가 보인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서 있는 비비앙. 음파 공격이 어지간히도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꽤나 일그러져 있다.
이윽고 비비앙은 씨근대는 말투로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 약간만,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되니까!”
마수를 소환하려는지. 이내 바로 영창에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전투에서는 알게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벌어주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나는 바로 마음을 굳히곤 스스로 보호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수, 수현! 뭐 하는 거예요!”
“클랜 로드!”
붙잡는 목소리들은 개의치 않고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왼손에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혼이 나를 바라본 것도 바로 그때였다.
– 키힛?
놈은 나를 보자마자 몇 번 눈을 끔뻑이더니 입을 크게 벌리며 웃어 젖혔다.
– 키히히히히히히히!
하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 않고, 왼손에 ‘허공섭물’의 묘리를 응용해 마력을 일으켰다. 대상 지정은 바로 ‘머리카락.’
수수숙! 수수수숙!
널린 게 머리카락이라 지정한 대상은 삽시간에 한 줌 가득히 쥐어 들었다. 동시에 원혼 또한 음산한 귀곡성을 내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쥔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팔을 위로 쳐올렸다.
쿵!
– 끽!
머리카락이 너무 길었던 걸까. 삽시간에 솟구친 머리는 천장에 보기 좋게 부딪쳤다.
이내 또다시 힘껏 팔을 내려치자.
쾅!
– 껙!
빛의 속도로 내려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원혼을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시간 벌이에는 이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신명 나게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쿵! 쾅! 쿵! 쾅! 쿵! 쾅! 쿵! 쾅!
– 끽! 껙! 끽! 껙! 끽! 껙! 끽! 껙!
천장과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원혼이 외마디 비명으로 추임새를 넣는다.
‘…의외로 재미있는데?’
하여 나는 약간 변화를 주기로 결심해 이번엔 둥글게 원을 그려보았다.
쿵! 찌지직! 쿵! 찌지지직!
– 끄겍! 끄게레레레렉!
공간이 제한돼있는 만큼 중간중간 걸리는 게 있어 부드러운 원을 그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도중에 걸릴 때마다 난 근력으로 억지로 밀어붙였고, 그리하여 원혼의 얼굴은 걸리는 지면을 그대로 쓸어 지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던 도중, 문득 뒤가 조용해졌음에 나는 차분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얌전히 가라앉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몇몇 클랜원들이 보인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아니. 시간을 벌어달라고 해서….”
그때, 안현이 다급히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혀, 형! 뒤요!”
“?”
하여 얼른 뒤를 돌아보자, 갑작스레 손아귀에서 묵직한 끌어당김이 느껴졌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원혼이 내 손길에서 벗어나려 움직인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끌어당겼고, 그 결과 찌지직! 머리칼을 한 움큼 뽑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머리칼을 쳐다보다가 이내 탁탁 손을 털며 전방을 응시했다.
– 키하아아아아아아!
조금 전 당한 일에 꽤나 화가 난 모양이다. 별로 티가 나지 않음에도 원혼은 분노에 찬 비명을 힘차게 질렀다. 그러더니 다시 음파 공격을 하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원혼의 입 속에서 가는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번쩍! 번쩍!
섬광은 두 번 세 번 이어졌고, 결국 악착같이 날아드는 화살을 이기지 못해 원혼은 다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라! 피에르! 제 4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마침내 발동한 비비앙의 마수 소환진.
4군단이라면 66군단 중 6군단 안에 드는, 평소 비비앙이 자랑해 마지않는 최상위 군단이었다.
오늘 참 눈 한 번 호강한다는 생각에 나는 깊은 관심을 갖고 떠오르는 마법 진을 지켜보았다.
파츳! 파츠츳!
– 히히히…. 히히히히…. 히히히히히!
이윽고 마법 진 위로 어두운 심연 속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방안을 소슬히 메운다. 그러더니 거진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 비죽 솟아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자세히 모습을 살펴보았다.
십자가 모양의 눈, 루돌프 같은 빨간 코, 그리고 길게 칠해진 새빨간 입술.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장난감 같은 알록달록한 막대기.
이 모습은…. 그래. 꼭 현대의 피에로와 정말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을 떠라! 피에르! 눈앞에 있는 머리 괴물에게 너의 위엄을 보여줘! 아주 꼼짝도 못하게 눌러버려!”
이윽고 비비앙이 명령이 떨어지고, 감겨있던 피에르의 눈이 번쩍 떠지었다. 장난기 가득한 피에르의 시선은 곧장 원혼을 향하였고, 이내 빨갛게 칠해진 입을 한껏 벌려 방안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 후헤헤헤헤헤헤헤!
그때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나는 얼른 원혼을 응시했다.
피에르가 출현한 순간, 어느덧 원혼은 끽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아까 뭔가 있어 보이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완전히 기에 눌려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
이제 슬슬 끝낼 생각에 나는 다시 허공섭물을 일으켜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푸른 달의 언약(Covenant Of Blue Moon) 아래…. 나는 소원한다.”
“월령, 3일의 초승달(Crescent Moon).”
동시에 하연의 주문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원혼의 주위로 시퍼런 초승달이 생성되었다.
잡힌 머리카락.
방이 떠나가라 웃는 피에르.
주변을 감싸는 예기 넘치는 초승달.
– …….
그러한 상황에서 원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길로 주변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지그시 눈을 감았을 뿐.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나는 가볍게 팔을 쳐올렸다.
아무 저항 없이 허공으로 올라간 원혼은, 이어서 둥그런 곡선을 그리며 소환된 마수에게로 떨어졌다.
그리고 피에르는 부드러이 떨어지는 머리를 보며 입을 함지박만 하게 크게 벌렸…. 응?
‘설마 먹으려고?’
콰직!
============================ 작품 후기 ============================
1. 퇴고 문제로 10분 가량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_(__)_
2. 탐험 성과는 생략했습니다. 다만 완전한 생략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파트 ‘모여드는 인재들’에서 이 부분과 약간 연관되는 부분이 있으며, 그때 회상 및 본 내용으로 추가하겠습니다.
3. 얼어붙은 숲 파트는 호러물 아니에요…. 믿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