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09
00408 5. 비상(飛上)(2/2) =========================================================================
깊은 밤, 그러나 새벽이라 부르기는 조금 이른 시간.
밤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아름다운 별빛이 드리운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현아. 에덴이 보인다.”
“응.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
나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곤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팔을 쭉 뻗어 올린 채 부르르 몸을 떨자, 나란히 걷던 형이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피곤한가 봐?”
“그다지? 별로 어려운 탐험도 아니었고.”
“피곤하면 자고 가도 되는데. 우리 클랜이 여기서 가깝잖아.”
“그게 무슨….”
뭔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웃고 있는 형이 보인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쉬고 걷는데 집중했다. 어차피 형이나 나나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텐데 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잠시 후.
길을 걸어 성문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드리운 바닥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다. 이내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거리에 진입한 우리는 곧바로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그렇게 워프 게이트도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퍼뜩 떠오른 생각에 어깨를 한 번 크게 들썩였다.
– 쪼롱?
“일어나. 다 왔다.”
– 쪼롱…. 쪼로롱….
앙탈을 부리는 듯한 새소리에 어깨를 내려다보자, 손톱만한 부리를 벌려 하품하는 아기 새가 보인다. 그 안으로 소지(所持)를 쏙 집어넣자 녀석은 냉큼 부리를 닫아 손가락을 물었다.
그대로 살짝 손을 들어올리자 약지를 꼭 문 채 대롱대롱 떠오르는 아기 새. 아직 크기는 주먹만 하지만 전신에서 발하는 은은한 황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자. 가져가.”
“하하. 걔는 네가 더 마음에 든 모양인데?”
얼른 가져가라는 의미로 팔을 내밀자 형은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주인은 형이야.”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곤 아기 새를 형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 쪼롱, 쪼로롱!
아기 새는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얌전히 소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비비는 게 그쪽도 자못 마음에 든 모양이다.
형은 연신 울어대는 아기 새를 몇 번 보듬은 후 미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수현아. 이 새 정말 내가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형. 이 장비들 정말 내가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어.”
나는 곧장 등 뒤를 돌아보았다.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 중 몇 명의 등에는 배낭이 메여있었는데, 내가 말하는 장비란 배낭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즉 형의 어깨에 얹은 아기 새와 여러 장비들. 그것은 이번에 발굴한 유적 ‘발할라의 탑’을 공략함으로써 얻은 성과였다.
“그래도 네가 발견한 유적인데…. 미안해서 그렇지.”
“내가 발견한 게 아니라 같이 발견한 유적이지. 그리고 공략에 해밀의 힘도 적잖이 빌렸고.”
“너는 내 마음 모를 거다. 형이 되어서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빼앗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수현아. 아무래도….”
“형. 잘 키우겠다며. 그리고 이미 끝난 얘기야. 더는 말 않기로 약속했잖아.”
약속이라 함은 처음 성과 분배가 끝나고 다시는 얘기를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한두 번을 제외하면 잘 지키는가 싶었는데, 워프 게이트가 가까워오자 도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입을 열려는 낌새가 보여 나는 날카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약속을 깨면 실망할거야.”
그제야 형은 흠칫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유치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놔두었다면 헤어지기 전까지 서로 끝없는 평행선을 달려야 했을 것이다.
서로 피곤한 일은 하지 말자는, 내 굳은 의지(?)를 느낀 걸까.
형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 녀석도. 알았다, 알았어.”
“진작에 그럴 것이지.”
“…잘 키울게. 뇌 속성을 띠고 있으니 나랑은 잘 맞을 거야.”
“아무렴. 척 봐도 영물인데. 잘 키우면 제법 볼 만할걸?”
끄덕끄덕. 이러나저러나 형도 아기 새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아직 아기라서 잠이 필요한지, 자꾸만 고개를 꺼트리는 녀석을 부드러이 쓰다듬는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1회 차 때 형이 저 새를 엄청 갖고 싶어했었지.’
자기랑 잘 맞을 것 같다고 했었나?
아무튼, 물론 난 아기 새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녀석을 형에게 줄 때 “스스로 알아가고 싶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씩 알아가면서 친해지고 싶다나.
아무튼, 지금은 그저 차후 형과 ‘썬더스톰(Thunderstorm)’이 이루어낼 합작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할 뿐.
이윽고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워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각자 도시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하~. 드디어 도착했다.”
“그렇네. 바로 가려고?”
뭔가 아쉽다는 형의 목소리. 탐험 직후 축배라도 함께 나누고픈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이 대낮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늦어버린 이상 빨리 돌아가는 게 피차 나은 일이었다.
“늦었잖아. 클랜원들도 피곤해하는 것 같고.”
“그런가…. 알았다. 그럼 내일 연락할게.”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을 돌아보자 무척 피로해 보이지만, 기분 좋아 보이는 클랜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여 해밀 클랜원들과 간단한 작별을 나눈 후, 바로 워프 게이트로 들어섰다.
“남부 소도시 모니카. 여덟 명입니다.”
“16골드 24실버입니다.”
이번 탐험에서 얻은 장비들을 결산하고 싶지만, 일단 돌아가 푹 자는 게 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난 어느새 활성화된 포탈에 지체 않고 몸을 묻었다.
준비하는데 7일, 탐험 왕복에 4주.
장장 한 달하고도 5일만의 귀환이었다.
*
똑똑.
어슴푸레 들려온 문소리에 눈을 뜨자 서늘한 새벽 공기가 느껴졌다. 한 번 크게 들이마시자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달칵!
순간 돌연히 들려온 문 열리는 소리. 얼른 고개를 들어 문을 쳐다보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주 조금 열린 틈 사이로 검은색의 뭔가가 휙 사라지는걸 볼 수 있었다.
“…….”
나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서 나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1층으로 내려가자 로비 카운터에 앉아 있는 고용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꼭두새벽에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매우 기특했지만, 졸음 가득한 눈과 입가에 묻은 침이 보이자 고소(苦笑)를 짓고 말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머셔너리 로드님.”
“고생하시는군요.”
잔뜩 쉰 음색이 막 자다 깬 목소리가 분명하다. 스스로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 깨워줬을 가능성도 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어디에 있습니까?”
“네, 네?”
“누가 오지 않았습니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자 고용인은 멍한 낯빛을 내비쳤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팔을 들어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식당으로…. 가셨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까닥 고개를 숙이고 나서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후.
식당 문을 가볍게 밀어젖히자, 중앙 테이블을 차지해 앉아 뭔가 열심히 보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옅은 잿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그녀는, 바로 고연주였다.
후룩.
내가 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연주는 일견 머리를 들더니 진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잔 머금는다.
아직 몽롱한 정신에 한두 번 머리를 긁적인 후 그녀가 앉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수현~! 정말 오랜만….”
“예. 언제 온 겁니까?”
“…방금? 오 일 전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외출증을 요청했죠. 마침 주말이라서 나올 수 있었어요.”
“바바라에도 소문이 퍼졌습니까?”
“이미 파다해요.”
얼마나 널리 퍼졌길래 저리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보고도 돌아온 다음날 끝마친 상태였고 어차피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고연주는 턱을 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수현. 탐험은 어땠어요? 타 클랜과 협력해서 간 건 이번이 처음인데….”
“괜찮았습니다.”
간단히 대꾸하고 고개를 털자 정신이 약간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뭘 그리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까?”
“…이거 좀 보세요.”
고연주는 약간 서운해 보이는 얼굴을 들고는 검지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건.”
뭐냐는 의미로 쳐다보자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어제 오늘 뿌려진 기록들이에요.”
어여쁜 손톱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보자 가지런히 놓인 여러 기록들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기록에 집중했다.
– 해밀, 머셔너리 클랜. 동부 고대 유적 ‘발할라의 탑’ 발굴.
– 머셔너리 클랜. 도대체 어떤 클랜인가? 얼마 전 ‘얼어붙은 숲’에 이어 이번에는 ‘발할라의 탑’ 발견….
– 지금까지 발견한 던전은? ‘고대 연금술사 던전’, ‘폐허의 연구소’, ‘절규의 동굴’,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얼어붙은 숲’, ‘발할라의 탑’. 이것 모두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루어낸 성과로…. 과연 진실은?
– [단독] ‘고대 연금술사 던전’, ‘폐허의 연구소’, ‘절규의 동굴’ : 미개척 도시 뮬에서 얻은 알짜배기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얼어붙은 숲’ : 이스탄테 로우의 의뢰로 발견한 사실을 확인…. ‘발할라의 탑’은 해밀 클랜과 함께 밝혀낸 것으로 알려져….
– [단독]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 해밀 클랜 로드 김유현의 친동생이라는 사실 밝혀져…. 클랜도 ‘동맹’ 관계.
“머셔너리 클랜. 해밀, 이스탄텔 로우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고작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여섯 곳의 유적을 발굴…. 어쩌면 어떠한 목적을 지닌, 일종의 키워주기로 생각할 수도….”
“재미있죠?”
한참을 읽고 있던 찰나 다시금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동시에 불쑥 찻잔이 내밀어져 눈앞의 기록 일부를 가렸다. 잔잔한 파문이 물결치는 칠흑 빛 물이 일렁일 때마다 허연 김이 조금씩 피어오른다.
“몇몇 거슬리는 기록이 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괜찮군요.”
마침 뜨거운 차 한 잔 생각이 간절했기에 나는 군말 않고 받아들였다. 바로 찻잔을 물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시던걸 준건가?
이어서, 고연주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런 기사들이 나올 줄 알고 해밀 클랜과 함께 가신 건가요?”
“나올 줄 알았다기보다는…. 그냥 겸사겸사?”
이윽고 온몸으로 퍼지는 따뜻한 기운을 음미한 후, 난 비로소 기록에게서 눈을 떼었다.
“그곳 반응은 어떻습니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자세히. 그러니까 어떤 관심이요?”
“…대부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지만, 종종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반응도 있어요.”
역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현재 머셔너리는 1년 동안 6곳의 유적을 발굴했다. 누가 봐도 놀랄 정도로 전무후무한 기록이지만, 사용자들이 과연 놀라기만 할까?
아니. 그렇지 않다.
유적은 사용자들의 이득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설정’이다. 그런 만큼 ‘어떻게 이토록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혹이 제기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군요.”
“아직 대놓고 드러내는 건 아니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스탄텔 로우와 해밀을 끼고 있는 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을 거예요.”
“당분간은 그렇겠죠. 아마 명확한 관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꽤나 신중하게 움직일 거라 생각돼요.”
“그동안 해밀과 이스탄텔 로우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물론 고연주의 힘도 필요할 겁니다.”
북 대륙의 정보라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림자 여왕’이었으니,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윽고 고연주는 잠깐 생각하는 듯싶더니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대륙 언론을 상대로 싸우는 건 힘들어요.”
“이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럼요?”
“아니다 싶은 기록에 대해서만 적당히 받아 쳐주면 됩니다.”
우리도 말할 거리는 있다.
‘고대 연금술사 던전’, ‘폐허의 연구소’, ‘절규의 동굴’은 미개척 도시 뮬에서 발견했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와 ‘얼어붙은 숲’은 이스탄테 로우의 의뢰를 받아 발견한 유적들이다.
‘발할라의 탑’은 여차하면 해밀 클랜에서 밝혀낸 것으로 돌릴 수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완전한 해명은 되지 못한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뭔가 있는, 이상한 클랜.’에서 ‘매우 운 좋은 클랜’정도로의 완화 작용이었다.
‘여차하면 키워주기도 괜찮고.’
고연주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수현은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노리고 있군요.”
“글쎄요. 본격적으로 발돋움하기 전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렵니다.”
나는 고연주의 해석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단시간에 10강에 오르기로 결심한 이상 겸사겸사 실적도 쌓을 생각이었고.
따로 할 말이 없는지 고연주는 조용히 입맛만 다셨다. 그러더니 이내 폭 한숨 쉬며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관 일도 힘든데 앞으로 더욱 바빠지겠네요.”
그때였다. 교관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여 남은 차를 모두 들이키곤 한층 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고연주. 제가 부탁한 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의 말대로 머셔너리는 이번 차수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500명이 넘는 신규 사용자들이 들어왔을 터.
하지만 그들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수는 없는 터라, 부득이하게 고연주에게 교관 역할을 맡긴 상태였다.
그리고 해밀 클랜과 도시를 떠나기 전에, 나는 고연주에게 두 가지 지시를 추가로 내렸다.
그 중 하나는….
“흥. 여기 있어요.”
고연주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두툼한 기록 뭉치를 꺼내었다.
“이게 그겁니까?”
“네네~. 이번에 들어온 병아리들 명단이에요.”
아까 생글생글 웃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지금은 왠지 모르게 불만 가득한 투덜거리는 음색이다.
나는 멀뚱히 그녀를 응시했다가 멋쩍어 입을 열었다.
“지금도 바쁠 텐데…. 고연주에게 기대하는 게 많아 미안하군요.”
그리고 그 순간, 고연주는 뾰족한 음성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뭐예요? 지금 내가 그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요?”
“…그럼?”
눈을 끔뻑이며 묻자 기가 막히다 는 얼굴의 고연주. 입술을 꼭 깨물고 볼도 살짝 부풀어오른 게 평소 ‘그림자 여왕’답지 않은 모습이다.
하여 아무 말도 않고 있자, 그녀가 손에 든 기록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수현. 우리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지는 알고 있어요?”
“?”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분위기는 진지했다. 새벽이 되니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라도 터진 건가?
고연주는 곧 시무룩한 기색을 내비치곤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나갈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오자마자 수현만 몰래 깨웠는데….”
“…….”
“잘 지냈냐, 보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보자마자 일의 경과부터 물어보시니까…. 너무 서운해요. 나만 생각하고, 나만 기다렸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이어진 고요한 적막감.
“…….”
“…….”
나는 잠깐 동안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고연주는 여전히, 무척이나 섭섭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녀의 발그레한 볼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쪽.
“어머?”
기함하는 고연주.
“가, 갑자기 무슨? 아니! 이런다고 제가 풀릴 것 같나요?”
입술에 보드라운 살결이 맞닿은 순간 고연주는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고연주. 차 한 잔이 더 마시고 싶습니다.”
“네?”
쪽.
그리고 한 번 더 입을 맞추자, 그녀가 멍한 얼굴로 볼에 손을 올려놓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하긴요. 고연주가 저번에 그랬잖아요. 앞으로 차 마시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하라고…. 그래서 선불한 겁니다만.”
“…….”
“설마 떼어먹지는 않겠죠?”
이제야 떠올린 걸까. 고연주는 일순 멍한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나를 곱게 흘기며 몸을 일으킨다.
“정말. 내가 못살아. 그래요. 반한 사람이 잘못이죠.”
“라몬 차로 부탁합니다.”
“킥. 다음부터는 가격을 올릴 테니 그리 아세요. 아마 볼이 아닌 입술에 해야 할 거예요.”
“부디.”
마음대로 하라는 양 대꾸하자, 고연주는 태연히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섹스 한 번이 낫겠네요.”
“…그건 좀.”
“까르르.”
고연주의 차는 몇 안 되는 소소한 즐거움인데, 그렇게 되면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흐흥, 흐흐흥. 흐흥, 흐흐흥.”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가는 고연주를 보다가, 나는 얼른 기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을 다듬으며 차분히 한 장을 넘겼을 때였다.
“!”
‘이 여인은….’
첫 페이지부터 눈에 밟힌 이름에, 나는 반사적으로 기록을 꽉 쥐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조금 늦게 집필을 시작한 터라 부득이하게 늦고 말았습니다. _(__)_
이번 주는 격일로 연재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시간을 쪼개어 적은 터라, 혹시 서운하셨던 분이 계시다면 양해 부탁합니다.
다음 주는 정말로 휴재합니다.
직접적으로 시험을 치는 기간이라 정말로 연재가 힘들 것 같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방학을 하면 연재에 조금 더 신경 써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하며,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 좋은 밤 보내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