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08
00407 5. 비상(飛上)(2/2) =========================================================================
딱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창문을 통해 비쳐온 햇살이 너무 포근했던 탓일까. 집무실 책상에 앉은 채 그대로 졸아버린 모양이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창문을 응시했다. 반들반들한 윤이 흐르는 창틀에 찬란한 햇살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에메랄드를 뿌려 놓은듯한 옥빛 정원이 펼쳐졌다.
이윽고 시선이 정문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부디, 머셔너리 클랜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를 바래요.’
떠나기 전, 한소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 한 마디는 현재 머셔너리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효을은 조만간 10강의 공석을 채울 예정이다. 억지로 상황을 조장한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핵심은 남은 7자리 중 1자리에 1년 차가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 말인즉슨 나를 10강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10강이 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나저러나 차후의 일을 생각해보면 실보다는 득이 많다고 예상되니 말이다.
문제는, 그 하나의 실(失)이 자못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미 머셔너리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나가고 있다. 그러나 난 여기서 한 번 적당히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다.
잘나가는 건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도가 지나치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지금, 머셔너리에 대한 사용자들의 관심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가는 상황.
여기서 내가 덜컥 10강이 돼버린다면?
결과야 뻔하다. 내가 지금껏 어떤 실적을 쌓았든 태클을 거는 자들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이건 100% 장담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헐뜯을 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냥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에는, 한소영의 말을 한 번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남은 일곱 자리 중, 여섯 자리는 내정된 상태에요.’
정리해보자. 남은 한 자리는 아직 내정하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나를 10강으로 올릴 생각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분간 자리를 비워놓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내 해석이 맞는다면….
‘어느 정도는 기다려주겠다는 건가?’
나는 비로소 복잡했던 생각이 차차 트여감을 느꼈다. 동시에 추가로 든 생각은, 지금의 고민은 비단 나 하나에 국한된 게 아닐 거라는 것.
‘내정’이라는 말에 너무 한 쪽으로 생각을 해버렸다. 그래. 이효을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중대한 문제를 성급히 진행할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10강으로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차차 연차를 쌓아가며 착실히 실적, 평판을 쌓아가는 것. 그리하여 누가 봐도 10강으로 인정할 만큼의 명성을 구축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엄청난 활약을 하여 사용자들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다만 이 방법은 실제로 실현된 적이 드물다고나 할까.
이 두 개의 방법 중 현재 내가 택해야 할 방법은 바로 둘 모두였다. 즉 둘 사이를 적당히 저울질해 이루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경우, 내가 행해야 할 행동 또한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한 번 생각이 트이니 거침없이 계획이 수립된다.
난 복잡했던 머릿속을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었고, 곧바로 손을 뻗어 통신용 수정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마력을 흘려 보내자 곧 말간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잠시 후.
파츳, 파츠츳!
상대 쪽에서 연결을 확인했는지 약간의 노이즈가 생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누가 봐도 가슴이 설렐 정도의 매력적인 얼굴이 수정구에 비쳤다.
한순간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드는 냉랭한 시선이 나를 쏘아본다.
“형. 나야.”
그 순간 싸늘했던 인상이 봄 만난 겨울처럼 사르르 녹는걸 볼 수 있었다. 이내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남성은….
– 그래 수현아. 오랜만이야.
바로 내 형, 김유현이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어.”
– …섭섭하다. 보자마자 안부는커녕 용건부터 꺼내니.
“형. 그동안 잘 지냈어? 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어.”
– 원, 녀석도.
형은 정말로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그래. 할 말이 뭔데?
“형의 도움이 필요해.”
– 무슨 도움?
“저번에 말했던 거야. 기억하지?”
– 저번에 말했던 거라면…. 아.
형은 바로 말을 알아들었는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긴 얘기야?
“조금?”
– 으음. 긴 얘기면 수정구보다는 직접 만나서 듣는 게 좋겠구나.
“아니. 그렇게 길지는 않을….”
– 겸사겸사 얼굴도 보자는 얘기야.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잖니.
차분하게 타이르는 형의 목소리.
‘…….’
이리도 낯부끄러운 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내 형은 한두 번 헛기침을 하더니, 뭔가 번뜩 떠오른 듯 아차 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 어차피 조만간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차라리 그때 얘기하는 건 어때?
“조만간 만나다니? 왜?”
– 곧 사용자 아카데미가 활성화되는 건 알고 있지? 효을이가 일차적인 의견을 종합했나 봐. 머잖아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야.
또 회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용자 아카데미가 연관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확실히 일리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느릿하게 끄덕였을 때였다.
– 아. 그러고 보니 너희 클랜 이번에 좋겠더라.
“응? 뭐가?”
– 이건 효을이가 살짝 흘려준 얘긴데….
“?”
나는 의아히 반문했다. 설마 벌써 남다은이 가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건가?
그러나 이어지는 형의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는 교관으로 참가할 수 있는 클랜들이 제한돼있잖아.
“그렇지.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을 우선으로 선발하겠다고 했던가.”
– 거기에 두드러진 공적을 세운 곳도 포함되지. 아무튼….
형은 내 말을 곧바로 받고는 깍지를 껴 턱을 괴었다.
– 이번에 머셔너리 클랜에도 참가 우선권이 보장될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형과의 연락을 마치고 3층으로 내려가자, 활짝 열린 창고와 부산스레 움직이는 클랜원들이 보였다. 얼마 전 장비 결산 후 대대적인 창고 정리를 지시했는데 임무를 맡은 이가 바로 하연이었다.
“사용자 정하연. 이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로브네요. 방어구들을 모아 논 곳으로 갖다 놓되, 클래스 별 분류를 확실히 해주세요.”
“그럼 왼쪽 진열대에 두겠습니다.”
“정확해요.”
이내 빠릿빠릿하게 돌아서는 선유운. 그리고 한 쪽에서는 열심히 무구를 나르는 우정민이 보였다. 딱히 도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나온걸 보면, 저들도 서서히 적응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하연은 크게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현아! 너 그거 뭐야?”
“예? 그, 금화 상자요.”
“금화 상자? 그걸 왜 거기다 둬? 앞쪽 벽에 붙여놓으라고 했잖아.”
안현은 미처 생각지 못한 듯 눈을 끔뻑이더니 뜨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우. 이거 엄청 무거운데…. 누님. 그냥 여기 두면 안 돼요? 어차피 아무것도 없잖아요.”
“거기 공간 없어. 갑옷들 둘 거란 말이야. 내가 도와줄 테니까 같이 하자.”
“아이고. 누님도 참 융통성 없어요.”
“그래. 나 융통성 없는 여자야. 이제 알았니?”
힘겨움 가득한 투덜거림에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곤 팔을 걷어붙였다. 곧 서서히 다가가는 그녀를 보며, 안현은 건들건들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형한텐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는 융통성 있는 여자. 그러나 우리 앞에서는 없어지는 신비로운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
막 상자를 잡으려던 하연은 일순 멍한 표정으로 안현을 쳐다보았다.
“킥!”
“쿡쿡.”
이어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미약한 웃음소리. 간만에 안현의 농담이 먹혔다. 오죽하면 한 쪽에서 조용히 보석을 정리하던 한별이조차 손으로 입을 막고 있을 정도였다.
하연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무척 화가 났는지 거세게 손을 떨쳐 내린 것이다. 그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너, 너? 이 자식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흠, 흐흠.”
그때 나는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섰고, 순간 몇 명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동시에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하연의 어깨가 움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아. 다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잖니. 그렇게 누나를 놀리면 못써요. 다음부터 그러면 안 돼. 알겠지?”
약간의 틈을 두고 이어진 하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상냥했다. 나는 속으로 잠깐 웃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하연. 고생하는군요.”
“어머. 클랜 로드 오셨어요?”
하연은 이제야 깜짝 놀란 척 나를 돌아보았다.
“…예. 현이가 또 놀렸습니까?”
“그냥 농담이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군요. 그래도 가끔 보면 하연은 너무 무른 데가 있습니다. 그래도 엄연히 임무 수행 중인데…. 조금 더 매섭게 몰아붙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호호. 이왕 하는 거 즐겁게 일하는 게 좋잖아요?”
동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 그 눈길에는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는 낌새가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별을 곁눈질했고, 멍하니 입을 벌린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오기 전까지 꽤나 시달렸던 모양이다.
결국 누군가 참지 못했는지, 억지로 변조한 티가 나는 음성이 한 쪽 구석에서 들려왔다.
“무, 무슨! 장비 하나 놓는데 각까지 잡게 했…!”
“그래도 클랜 로드의 말씀은 가슴 깊숙이, 뼛속까지 새기겠어요.”
그러나 빠르게 말을 끊은 하연의 대응 또한 민첩했다. 이어서 싸늘한 빛을 뿌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녀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아니. 뼛속까지 새길 필요는 없어요.
이윽고 하연의 입가에 지어진 진한 미소를 보며, 나는 속으로 애도했다.
아무튼.
나는 팔을 뻗어 안현이 들고 있던 상자를 아래쪽에서 들어올렸다. 이 거대한 상자에 금화가 가득 차서 그런지 약간 묵직한 느낌이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안현에게 비키라는 신호를 보낸 후, 아까 하연이 말한 방향으로 가볍게 상자를 던졌다.
쿵!
그리고 허공에서 좌우로 빙글 돌은 상자는, 구석 모서리로 정확히 안착했다.
일순 토끼 눈으로 변한 클랜원들을 돌아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창고 정리를 끝마치는 순간 바로 장비 분배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그만한 보답이 돌아가겠지요. 이 부분은 제가 하연에게 필히 보고받도록 하겠습니다.”
클랜원들은 순간 멍한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곧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삽시간에, 다들 바삐 몸을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영차, 이영차.”
그 중 안솔이 가장 가관이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화살 하나를 곧장 내려놓고는 무거운 갑옷을 들어올린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끙끙대며 내 앞을 지나가기까지.
문득 들려오는 짧은 한숨 소리에, 나는 하연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왜 저럽니까?”
“괜찮은 사제 장비가 하나 나왔거든요.”
“…….”
“저번에 얼음 벽 안에 갇혀있던 공주 기억하시죠? 그거에요.”
하연은 명료한 대답에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여 픽 웃음을 터뜨렸다가, 천천히 창고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시선이 잡힌 곳은 바로 레어, 시크릿 클래스들을 모아둔 진열대였다.
두 개의 구슬, 두 권의 책, 하나의 보자기.
‘저 보자기는….’
레어 클래스 황혼의 무녀.
그 순간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 하나의 생각. 하여 난 얼른 보자기의 주인공을 찾았고, 마침 숙였던 허리를 일으키는 한나를 볼 수 있었다.
“응?”
역시 감이 예민해서 그런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이마에 흐르던 땀을 훔치던 한나는, 문득 나를 돌아보더니 머리를 갸웃했다.
나는 까닭 없이 머리를 끄덕였고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손뼉을 두어 번 쳐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짝짝.
“보아하니 창고는 오늘 중으로 정리가 완료될 것 같네요. 그럼,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 한 가지 공지할 사항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내일 아침 회의를 열 예정이니, 단 한 명의 제외 없이 참가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사안이요? 어떤 일인지 미리 알 수 있을까요…?”
“음. 자세한 건 내일 아침에 말씀 드리겠지만….”
하연의 물음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어차피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같이 하려고 했으니까.’
하여 입술에 간단히 침을 적신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해밀 클랜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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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네요.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