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07
00406 4. 모여드는 인재들(4/4) =========================================================================
“미안. 아무래도 조금 힘들 것 같아.”
한동안 원혜수를 유심히 보던 비비앙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죄송해요. 저도 장담할 수는 없어요.”
이어지는 안솔의 말 또한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그렇게 두 여인의 동시에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자, 두 남성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레어, 시크릿 클래스의 능력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모양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번에 백서연의 정신을 억지로 망가뜨렸던 것처럼…. 반대의 경우는 힘든 건가?”
“위그드라실의 과실이 남아있다면 모를 일이지. 하지만 그때 여분을 만든다고 전부 써버렸는걸.”
비비앙은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럼 기적은?”
“아직 재사용 대기 시간이 2개월 정도 남았어요. 그때 가서 한 번 해봐야 알겠지만….”
안솔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무척 가엾다는 얼굴로 침대를 응시했다. 원혜수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싼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설정에 의한 정신 오염이라면 어떤 것이든 100% 치료할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이분은 커다란 충격으로 인한 정신병의 발병이라….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기적은 만능이 아니니까요.”
그렇군.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의 ‘기적’으로도 힘든 건가.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자, 씁쓸한 얼굴을 한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우정민과 선유운이었다.
사실 망가진 정신을 치료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이유는 안솔이 말한 대로였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날 정신이 갑자기 돌아오거나, 아니면 서서히 나아지는 자연적인 회복 정도일까.
아무튼.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번거로이 둘을 부른 이유는….
“괜찮다. 어차피 다른 데서도 들었던 말이야. 머셔너리 로드.”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우정민과 선유운을 머셔너리에 끌어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여러 방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둘이 꽤나 소중히 생각하는 원혜수를 신경 써주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빚을 지우려는 의도도 없잖아 있었고.
“혜수를 살펴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여기가 가장 희망적으로 말해주는군요.”
우정민과 선유운. 둘은 비비앙과 안솔에 깍듯이 고개를 숙이곤 고소(苦笑)를 지었다.
잠시 후. 어색이 인사를 받는 둘을 내보낸 후, 나는 우정민과 선유운과 자리했다. 원혜수는 여전히 달게 자는 중이었다.
나는 세 명을 번갈아 보았다가 미안해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괜한 기대를 가지게 만든 건 아닌가 모르겠군. 미안하다.”
“무슨!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하잖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경 써주신 것,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냥 겸양 한 번 떨어본 거야.
우정민은 한두 번 헛기침을 하더니,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인사가 늦었어. 덕분에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고맙다.”
“…지내는데 불편한 점은 없어?”
“전혀. 그림자 여왕님께서 이것저것 신경 써주시더군. 혜수도 괜찮아진 느낌이고. …요즘에 아주 가끔 웃기도 하거든.”
여인과 꽤나 각별한 사이였는지 우정민은 아련한 눈길로 원혜수를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할 말이 있다.”
나는 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우리가 이곳에 온지도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하냐니?”
나는 눈을 살짝 떠 천연덕스레 응답했다. 사실 기다리던 질문이었지만, 곧바로 말을 꺼내기에는 조금 속보이잖은가.
“혜수는 이곳이 마음에 든 것 같다. 물론 우리도 그렇고. 하지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지내기에는 눈치가 보이기도 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으음. 뭐라도 하고 싶다 라.”
깊이 생각하는 척으로 한 번 더 시간을 끌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조만간 세 명 모두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등록하는 건 어때?”
“…네 클랜에 가입하라는 소린가?”
역시나 하는 우정민을 보며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가입이 아니라, 그냥 등록만 하라고.”
“가입이 아니라 등록? 당최 그게 무슨 말이지?”
“간단히 말해서, 같이 일을 하자는 소리야.”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우정민과 선유운은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하여 나는 머셔너리 클랜에 대한 성향. 즉 ‘용병’의 개념에 대해서 추가로 덧붙였고, 둘은 그제야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도 용병으로 활동하라는 말인가?”
“그렇지. 현재 머셔너리의 최대 단점은 적은 인원이야. 예를 들어 의뢰가 몰리는 상황인데 인원이 부족하다면? 그 의뢰에 대해서는 포기하거나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지. 그런 것들은 이제 막 발돋움하려는 우리 클랜에 타격이 될 테고.”
“그러면 인원을 늘리면 되지 않나?”
“말했잖아. 소수 정예를 지향한다고. 그렇게 어중이떠중이 등 아무나 받을 생각은 없어.”
바꾸어 말하면, 너희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뭔가 좋은 얘기 같기는 한데.”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그럼 혹시 나중에….”
“머셔너리에 등록하는 순간 신분은 자유 용병으로 바뀌게 되지.”
나는 일부러 자유라는 말을 강조했다.
우정민은 굉장히 야망이 큰 인물이다. 그런 만큼 단순히 “내가 너를 도와줬으니 우리 클랜에 들어와라.”고 하면 반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
해서 나는 우정민의 성격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자존심이 높지만, 은원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오죽하면 이제 곧 어디선가 창단될 부랑자들의 모임, ‘살인 여단’을 깡그리 쓸어버리지 않았는가. 고작 클랜원 한 명 죽었다는 이유로.
그런 우정민이 1회 차 시절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말이 바로 “은혜는 바다같이 갚고, 복수는 칼날같이 갚는다.”였던가.
이윽고 둘은 내 말을 충분히 알아먹은 듯 보였다. 우정민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멋쩍어 보이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그래도 될까?”
머리가 있으면, 내가 지금 말한 조건들이 얼마나 사정을 봐주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사실상 반승낙이나 다름없는 대답에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승낙한 걸로 알고 서류를 준비해둘게. 조만간 등록소로 가자고.”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 원혜수는…. 의사 표현이 걸리네. 아무튼 등록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태를 감안하면 대리인 신청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그녀도 외출을 준비해줘.”
그 말에 우정민과 선유운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혜, 혜수도 받아주는 건가?”
“그럼?”
“하지만 지금의 혜수는…. 알다시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은 너네 둘로 충분해. 아마 등록하게 되면 조금 더 신경 써줄 수 있을 거야. 일단은 같은 클랜원이라는 명분이 생기니까.”
그 순간, 나는 우정민의 눈동자가 서너 번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제법 묵직한 목소리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려는 내 발목을 붙잡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물어도 되겠습니까.”
흘끗 고개를 돌리자, 우묵해 보이는 얼굴의 선유운이 보인다. 내게 질문을 던지는 그의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선유운의 입이 열렸다.
“저희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
“물론 말씀해주신 것들은 저희에게 한없이 감사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혜수와는 예전에 안 좋은 기억도 있고….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안 좋은 기억이라 함은 동생이 죽었다고 꼬장을 피운 일을 말하는 건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깐 상념에 잠겼다.
사실 우정민과 선유운은, 엄밀히 말해서 내 ‘적’이었다. ‘붉은 송곳니 클랜’은 차후 연합군의 한 축을 담당할 만큼 크게 성장하고, 그만큼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런 만큼 사실상 기회를 봐서 처리하는 게 옳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생각이랄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당신이라는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날 들었던 유현아의 말은, 내 가슴에 제법 깊숙이 박힌 상태였다.
이미 미래는 변해도 한참 변했다. 하여, 난 이후로 생각을 바꾸었다. 앞으로는 유현아와 같은 사례보다는 고연주와 같은 사례를 만들어보자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냥….”
그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예고한대로 우정민 일행과 등록소에 다녀왔고, 원혜수까지 무사히 신분 변경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클랜 하우스로 되돌아오자, 예상했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클랜 로드 님이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이스탄텔 로우 로드께서 방문하셨어요.”
고용인의 말에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한소영의 방문은 예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전령을 보내 검후의 출현을 알렸기 때문이다. 하여 고용인에게 조만간 방문할 수 있음을 공지했고, 혹시 내가 없을 때 오면 검후와 자리를 마련해주라 일러둔 상태였다.
사실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검후를 둘러싼 관계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고, 그것을 확실하게 풀고 싶었으니까.
여태껏 기껏 관계를 잘 유지해왔는데, 그것을 어그러뜨릴 불씨는 시작부터 진화하는 게 좋았다.
“그렇군요. 지금 어디 계시죠?”
“네. 말씀하신 데로 4층에 검후 님과 자리를…. 아! 마침 저기….”
놀란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공교롭게도 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이 보였다.
성적 매력이 충만한 몸동작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농염한 몸매. 그러면서도 퇴폐적이지 않은, 오히려 세련된 자태를 뽐내는 여인의 정체는 바로 한소영이었다.
‘남다은을 포기한 모양이군.’
언뜻 보기에는 무표정해 보이지만, 눈가에 알게 모르게 아쉬움이 배어져 있다.
이윽고 한소영 또한 나를 확인했는지 보자마자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머셔너리 로드. 실례했어요.”
“검후 또한 허락한 일이니 실례랄 것 까지는 없습니다. 아무튼, 얘기는 잘 나누셨는지요.”
“네. 검후의 뜻을 확실하게 받았어요. 머셔너리 클랜에 경사가 생겼군요.”
사실상의 포기 선언. 그래도 경사라 말하는걸 보니 어지간히 부러운 모양이다.
“혹시 속이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의도치 않게….”
“아니요. 괜찮아요. 속이 상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아쉬울 뿐…. 애초 검후는 머셔너리 클랜에 뜻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
“…제가 너무 부담을 준 모양이에요.”
우리는 서로 말끝을 흐렸고, 그 사이로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다시 말문을 연 사람은 한소영이었다.
“지금 클랜으로 되돌아갈 생각인데. 잠시 같이 걸을 수 있을까요?”
“배웅해드리겠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이윽고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입구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한소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예전에 ‘얼어붙은 숲’을 주선했던 일에 대한 사과와, 최근 근황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본론을 꺼내든 것은, 정원의 중앙. 즉 주변 인기척이 확연히 줄어들었을 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현재의 검후는 굉장히 가치가 높은 사용자에요. 단순히 능력뿐만이 아니라, 명성을 통한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죠. 차후 10강 중 1인이 될 수 있을 만큼….”
“그렇군요.”
“네. 그럼 혹시 10강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10강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꺼낼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용히 말을 경청했다.
“현재 10강의 10자리 중 7자리가 비어있어요. 아마 조만간 일부 자리가 채워질 예정이에요.”
“10강은 누가 정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확해요. 다만, 그 상황을 누가 의도적으로 조장할 수는 있죠. 언급된 사람이 10강에 합리적으로 부합되는 사용자라면.”
이어서 터져 나온 말은 가벼이 흘려 들을게 아니었다. 하여 걸음을 멈추고 한소영을 쳐다보자,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수호자는 아직 북 대륙이 완전히 정상이라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는 중이고요.”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계획이라.”
그 순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일환 중 하나가…. 이효을은 10강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채울 생각인 겁니까?”
“맞아요. 이미 남은 7자리 중, 6자리는 내정된 상태에요.”
“그 6명이 도대체 누구인가요?”
“…미안해요.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에요.”
“…….”
“배웅 감사해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한소영은 한숨과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이윽고 멍하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 일순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는걸 볼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북 대륙의 수호자는 당신을 주목하고 있어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요.”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남은 한 자리는 아마 1년 차 사용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군요.”
내가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한소영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디, 머셔너리 클랜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를 바래요.”
은은한 색기가 어린 한소영 특유의 목소리는, 이내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여운처럼 감돌았다.
*
남다은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서너 번 눈을 깜빡이고는, 양팔을 하늘위로 들어올렸다.
“만세.”
마침내 한소영에게서 벗어나 축하하고 싶었던 걸까. 홀로 경축을 터뜨린 남다은은 조용히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4층 계단을 내려가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다은의 머릿속은 복수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 자신을 속인 이강산과 부랑자들에 대한 증오가 깊숙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남다은은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부랑자를 증오한다.
순수했던 0년 차 시절. 그네들에게 당한 일을 잊기에는 그녀의 가슴은 너무나 많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다만.
그러한 감정은 전쟁과 추적대에 참가하는 과정을 거치며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 한치의 자비도 없는 부랑자 살해로 세간의 평가가 수정된 지금, 이제는 어느 정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윽고 3층에 다다른 남다은은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얼마 전 그녀는 클랜원들 앞에서 정식으로 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되돌아온 반응에 슬퍼했다. 대부분 축하는 해주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려워하는 기색을 느낀 탓이다.
하지만 남다은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명랑한 성격이었고 대인 관계도 원만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본성을 되찾아가는 지금. 남다은은 생각했다. 이왕 새 출발을 하기로 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 보자고.
이윽고 3층 끝에 다다른 그녀는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문틈을 들여다보자,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남다은은 한두 번 심호흡을 한 후 차분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야?”
“저기…. 저예요.”
“저가 누구…. 어.”
“안녕하세요.”
대답한 사람은 바로 비비앙이었다.
사실 남다은이 비비앙을 찾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왠지 낯설지 않다고 느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뭔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순한 착각일수도 있지만, 아무튼 현재 그녀로서는 김수현을 제외하고 가장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상대였다.
“당신은…. 검후라고 했나? 여긴 어쩐 일로?”
“그냥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친해지고 싶어서요.”
남다은의 직설적인 화법에 비비앙은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드, 들어오던가.”
가볍게 떨어진 허락에 남다은은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비비앙이 내준 자리에 앉은 그녀는 적극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하하. 계단에서 마주친 이후로 뵙지 못한 것 같아요.”
“많이 바쁘니까. 나는 연금술사거든. 그리고 연구도 해야 하고….”
“와. 연금술사. 그러고 보니 클랜 로드에게 무척 뛰어나신 연금술사라 들었는데.”
비비앙은 자신이 연금술사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여인. 그런 만큼, 남다은이 의례적으로 띄워주자 금세 코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래? 김수현이 정말 그랬어? 요호호호. 내 입으로 하긴 그렇지만, 사실 맞는 말이야.”
“역시. 같은 클랜에 뛰어난 연금술사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네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비비앙과, 그에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남다은.
연신 이어지는 칭찬에 비비앙은 몸을 뒤로 젖혀 거만하게 다리를 꼬더니, 약한 콧숨과 함께 자랑을 시작했다.
“휴. 사실 좀 피곤한 정도로 부탁이 많이 들어오기도 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없으면 김수현은 항상 곤란해하는걸.”
김수현이 들으면 코웃음을 넘어 한 대 맞기까지 할 말이었지만, 비비앙은 서슴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문제는 남다은이 곧이곧대로 믿고 있다는 것.
“정말이요? 그분이 곤란해하기도 해요?”
“그럼~. 얼마 전에도 내게 새로운 부탁을 해왔는걸. 그래서 열심히 이 책을 탐독하고 있었지.”
남다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책이 뭔데요?”
비비앙은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각인하려는지, 거대한 책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연금술에 관한 책. 고대 마법사 한 명이 자신의 일지를 적어놓은 책으로, 예전 탐험에서 얻은 거야.”
“와. 그럼 다 고어로 되어있을 텐데.”
“상관없지. 난 당신들 말마따나 거주민이니까. 해석엔 문제없어.”
잠시 숨을 고른 비비앙은 곧 뻐기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자랑은 끝나지 않았다.
“아 참. 혹시 백서연이라는 부랑자 알아?”
“네.”
“그럼 이건 알려나 모르겠네. 그때 포로로 잡은 백서연의 정신을 망가뜨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책 덕분이었어. 김수현이 말하기를, 내 덕에 사용자들 틈에 섞여있던 부랑자 첩자들을 색출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아하. 그 사건도 알고 있어요.”
그 사건은 무척 관심 깊게 지켜봤던 사건이었기에, 남다은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던가? 그녀는 비비앙에 대한 호감이 부쩍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저는 클랜 로드가 한 줄 알았는데, 숨은 공로자도 있었군요.”
“흥. 뭐 상관없어. 진정한 연금술사는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야.”
“그렇구나.”
“그런 거지.”
이내 둘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이어서 비비앙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돌연히 남다은이 입을 열었다.
“비비앙씨. 저 그 책 내용이 정말 궁금한데, 한 번 봐도 될까요?”
“어? 어. 그래.”
남다은이 두터운 책을 가리키며 묻자, 비비앙은 순간 얼떨떨한 얼굴로 긍정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용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서슴없이 책을 건넸다.
“그런데 읽을 수 있어? 전부 우리 언어로 되어있는데.”
팔랑.
이윽고 책을 무릎에 놓고 펼친 남다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 아카데미 다닐 때 고어도 배운 적이 있거든요.”
“…어?”
“물론 약간이긴 하지…. 어, 어머?”
그리고.
같은 시각.
“에취!”
막 입구를 들어오던 김수현은 거센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팔을 감싸 안고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작품 후기 ============================
“자, 잠깐만!”
“흠. 제법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게 다라면 아직 부족하군요. 비비앙씨.”
“어, 어?”
“명심하세요.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실전은 다른 법이에요.”
………. ………. ……….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그날 둘은 의기투합했다는 소문이….
농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