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19
00418 9. 머셔너리의 소소한 일상(2/2). =========================================================================
“기적(Miracle)!”
안솔의 전신에서 찬란한 빛이 솟구쳤다. 천장에 닿은 새하얀 빛살은 둥그런 타원을 그렸고, 중앙으로 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고결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고요히 눈을 감은 그녀는 영락없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와….”
이내 방 내부가 빛으로 가득 물들자 침대에 누워있던 차소림이 미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하기야 광휘의 사제(Brilliance Priest) 고유 능력 ‘기적’은 실제 효능이 좋은 만큼 시각 효과도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천사는 소원을 말하라는 듯 안솔을 내려다보았다.
안솔은 차소림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천사 님, 천사 님. 이분이 리치에 당한 상처를 치료해주세요.”
어려울 건 없다는 듯 천사는 자애로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천사를 보며 안솔을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천사의 손이 차소림을 향하려는 찰나, 안솔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 차라리 몸 상태 전부를 회복해주시면 어떨까요? 이왕 치료해주시는 거 서비스 좀 팍팍 넣어주세요.”
천사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면 눈이 착각을 일으킨 걸까? 이내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이는 천사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천사를 상대로 서비스를 논하다니. 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솔을 얕보고 있었다.
“으~응. 잠시만요. 천사 님, 천사 님. 생각해보니 우리 지금 보고 한동안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수현이 오라버니도 치료해주세요. 요새 무척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서 너무 안쓰러워요. 해주실 거죠? 네?”
순간 천사가 나를 쏘아본다. 아니 왜 날 노려봐. 난 잘못 없어 이 사람아. 아니 이 천사야.
“아, 아니다. 그러면 다른 분들이 섭섭해하실 수도 있으니까…. 에이, 그냥 머셔너리 하우스에 있는 전원을 회복해주세요. 그 있잖아요? 전쟁에서 해주셨던 거. 그 정도면 충분할거 같아요. 헤헤.”
안솔은 혼자서 끄덕끄덕하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나는 감탄했다. 세상에. “그 있잖아요? 전쟁에서 해주셨던 거.”란다. 신성 주문 중에서 가히 최고 수준이라 부를 수 있는 게 바로 기적인데, 흡사 뉘 집 개 이름 부르듯 불러대는 안솔의 작태는 실로 대단함 그 자체였다.
천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눈길로 안솔을 내려다보니, 이번에는 착시가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안솔도 천사의 눈길을 느꼈는지 금세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시무룩이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그냥 하고 싶은 데로 해주세요….”
천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꼭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꽉 쥔 손을 피더니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성스러워 보였지만 왜 갑자기 하기 싫은 티가 팍팍 나는 걸까?
번쩍!
『모든 체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이윽고 눈이 멀 정도의 큰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전에 한 번 보았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동시에 전신에 활력이 가득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를 사용한 이후 이따금 몸이 찌뿌둥할 때가 있었는데, 그러한 거북함이 눈 녹듯 사라진 기분이었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옆쪽에 서 있던 안현과 유정이 쌍으로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적의 천사. 이러나저러나 일단 안솔이 해달라는 대로 해준 모양이다.
어쩌면 안솔이 상재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심각히 고려하며 나는 침대를 응시했다. 어느덧 모두의 몸에 스며든 빛도 서서히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끝난…. 겁니까?”
“네. 끝났어요. 한 번 움직여보시겠어요?”
차소림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솔의 말대로 조심스레 팔을 움직이더니 일순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어?!”
몇 번이고 팔을 움직인 차소림은 얼른 몸을 반듯이 세웠다. 그리고 하나하나 점검하려는 듯 느릿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에서 전에 보였던 부자연스러움이 더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주인이여! 정말로 상처가 회복된 건가?”
“그, 그래.”
“정말로? 참말로?”
“그렇다니까.”
이제야 치료가 됐다고 확신한 걸까. 차소림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밀어내며 떨리는 눈망울로 날 응시했다. 그러나 난 조용히 머리를 가로젓고 안솔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차소림은 놀란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안솔의 손을 꼭 쥐었다.
“사, 사용자 안솔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안솔은 싱글벙글. 그러고 보니 전쟁 후 가끔씩 신전에 자원 봉사를 하러 나간다고 들었다. 평소 약간 엉뚱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도왔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가 보다.
“몸이….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좋아진 느낌입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뭘요. 회복되셨다니 다행이에요.”
“우호호호!”
안솔은 우쭐한 얼굴로 겸양을 떨자 뱀파이어는 즉시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양팔을 넓게 펼치더니 과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안솔! 이름이 안솔이시군요! 이게 바로 기적입니까? 당신이 홀 플레인의 성녀인 겁니까?”
“네…? 에, 에이. 성녀라뇨. 그냥 평범한 사제일 뿐인걸요. 헤헤.”
한 마디로 오버였다.
안솔은 자상한 얼굴로 뱀파이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조용히 그를 일으켰다.
“자, 일어나세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너무 곤란하잖아요.”
“하, 하지만…! 그렇지만…!”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기적은 노력하는 자에게 우연이라는 다리를 놓아주는 법. 오늘의 기적은 그대의 노력이 보답을 받은 날이에요. 그러니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주세요.”
“서, 성녀님!”
‘얼씨구.’
둘이서 북치고 장구치고 노래도 한다. 뱀파이어는 발광했다. 그리고 차소림은 어색한 얼굴로 간신히 웃음짓고 있었다.
더는 못 보겠어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서로를 꼭 붙들고 있는 안현과 이유정이 보였다. 오, 보기 좋은데.
“으으…. 쟤…. 내 동생 맞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미친 거 아냐? 요즘 신전에 자원 봉사 다녀오더니만 착각 한 번 잘하네. 어휴, 소름 돋아.”
“야. 이유정. 그래도 내 동생이라고. 말조심 좀 해라.”
“꼴에 동생이라고…. 응?”
이제야 이상한 기분을 느꼈는지 유정은 미간을 좁히며 안현을 응시했다. 안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유정을 더욱 끌어안고 있었다.
“야, 야! 안현?”
“아 가만히 좀 있어봐. 안 그래도 오그라드는데.”
안현의 무덤덤한 말에 유정의 얼굴이 와짝 일그러졌다. 그렇게 3초의 시간이 흘렀다.
퍽!
“미친 변태 새끼!”
“크헉!”
유정은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복부를 강타했고, 쓰러진 안현에게 거센 발길질을 선사했다. 한동안 성난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던 유정은 씩씩 숨을 몰아 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어요. 앙?!”
“누, 누가 네 몸을….”
퍽!
“닥쳐! 오빠! 쟤가 나한테 변태 짓 했어!”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게 착 달라붙어 몸을 껴안았다. 제법 무르익은 육체라 그런지 여인 특유의 향기가 코를 푹 찔러 들었다.
나는 어이없는 마음에 물었다.
“…그럼 너는 뭐 하는 건데?”
“으응. 정화. 안현에게 더럽혀진 몸을 정화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마…. 으으응, 이거 좋은데….”
“아니. 안현이 바퀴벌레는 아니잖아.”
“아니야 오빠. 안현은 바퀴벌레야.”
유정은 단언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은 후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음을 흘리는 유정과 신음을 흘리는 안현. 뱀파이어는 여전히 찬양에 여념이 없고, 안솔은…. 말도 하기 싫다.
그 중에서 오직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차소림만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벌겋게 달아오른 게, 아마 어떻게든 안솔과 뱀파이어에 적응하려다가 결국 포기한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왜 동질감이 느껴지는 걸까…?’
까닭 없이 느껴지는 익숙한 기분. 차소림은 이해한다는 눈길로 나를 마주했다.
이윽고 나와 차소림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차소림이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지도 며칠의 시일이 흘렀다. 어느덧 완전히 몸을 회복한 그녀는 예전에 약속한 테스트를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솔직히 차소림에게 테스트는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제 3의 눈이 없는 클랜원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기에, 나는 차소림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원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클랜원들이 모여있는 정원은 고요한 적막과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안현과 차소림이 서 있었다. 두 명은 각자 창을 든 채 서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테스트의 방식은 바로 ‘대련’. 사실 차소림의 상대가 안현인 건 약간 어폐가 있는 말이었다. 나 또한 원래는 남다은을 상대로 붙일 예정이었고.
그러나 테스트를 공지했을 당시, 안현은 차소림의 상대를 자신으로 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것도 있고 같은 창술사다 보니 호승심이 이는 모양이다. 그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나는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기실(其實) 차소림 입장에서는 안현이 상대로 나온 게 더욱 부담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만일 상대가 남다은이었다면 약간만 선전해도 클랜원들은 납득했을 것이다. 그녀는 검후라는 명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안현은 차소림보다 저년 차 사용자였다. 즉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하지만 나는 만일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다. 안현이 레어 클래스고 동년 차에 비해 수준이 높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갓 1년 차에 오른 애송이에 불과하다. 진심을 다한 차소림을 이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슬슬 시작하겠군.’
테스트가 시작하고 서로를 응시한 채 2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은 건 안현의 흑색 창이었다. 허공을 살랑살랑 부드러이 유영하는 안현의 창 끝은 상대의 시야를 어지럽히며 한순간 공격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고 있었다.
그에 반해 차소림의 자세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굉장히 편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창 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늘어뜨리고 정면도 텅 비워놓은 상태였다. 마치 틈을 줄 테니 공격하려면 공격해보라 도발하는 자세였다. 다만 살짝 치켜 뜬 눈동자는 끈임 없이 안현의 전신을 주시하고 있다.
이윽고 안현의 왼손이 움직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창을 흔들고 있었지만 왼손으로 창의 반대 부분에 슬쩍 손을 얹은 것이다. 동시에 자세도 조금씩 조금씩 구부러지는 게, 순간적으로 치고 나갈 것이라 예상되었다.
이윽고, 안현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됐을 때였다.
휙!
“헉!”
차소림이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사실상 아무런 의미 없는 휘두름이었지만 안현은 깜짝 놀라 허리를 크게 젖혔다.
‘쯧.’
멍청한 회피 동작. 기껏 예리하게 잡았던 자세가 엉망으로 흐트러져버렸다. 고수를 앞에 두고 일으킨 긴장이 과도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젖혀진 안현의 허리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크게 기울어진다. 그러더니 허리를 크게 퉁기는 것과 함께 온몸을 던지듯 세차게 달려들었다.
기공창술사의 장점은 유연한 체술에 있다. 상대의 사각을 노리고 자신의 사각은 없앤다. 그들은 어떤 기형적인 자세에서라도 정확히 창을 내지르고 회피할 수 있다.
안현의 노림수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것은 맞지만 그 순간을 역이용했다. 즉 ‘이 상태에서 공격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라 여기고 들어간 것.
슈웅!
흑색 창이 허공을 가르며 앞으로 쭉 뻗어나간다. 그동안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속도도 신속하고, 찔러 들어가는 궤적 또한 꽤나 깔끔하다.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어 안현의 창이 차소림이 있던 자리를 꿰뚫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발이 왼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승부가 났군.’
나는 직감했다. 허를 찌른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안현은 교전이 아닌 일격필살을 선택했다. 즉 두 번의 여지는 없다는 것.
차소림은 애초부터 안현의 전신을 보고 있었다. 말인즉슨 창과 상체만이 아니라 하체 또한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현의 허리에 비해 하체가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고 버텼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터.
들어올 거라 알고 있는 이상 막는 것은 쉽다. 사실 차소림이 창을 휘둘렀을 때부터 승패는 갈라졌다.
곧 한 걸음 옆으로 피한 차소림은 안현의 창을 그대로 흘려 보냈다. 동시에 쥐고 있던 창을 그대로 쳐올려 안현의 복부를 후려쳤다.
퍽!
“커헉!”
이윽고 안현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과 동시에 승부는 완벽하게 갈렸다. 차소림은 세 가지 동작만으로 안현을 제압한 것이다.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테스트였다.
짝짝짝짝.
잠시 후, 이어지는 박수에 차소림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안현은 힘없이 떨구었다. 나 또한 가볍게 박수를 쳤다. 승자에게는 축하를, 패자에게는 위로를.
차소림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절대로 거만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예, 예. 가, 감사합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괜찮은 것 같아요. 하, 하하.”
차소림은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더니, 멍하니 앉아있는 안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안현은 미약한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 차소림의 얼굴과 내밀어진 손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조심스레 맞잡았다.
“그럼.”
“자, 잠시만!”
이윽고 안현을 일으켜준 차소림은 나에게 다가와 섰다. 어땠느냐는 눈길에 나는 흡족히 입을 열었다.
“테스트 합격을 축하합니다. 깨끗한 회피와 깔끔한 동작이 돋보였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정식 클랜원으로 대우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머셔너리에 오신걸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차소림은 슬쩍 눈을 내리깔더니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왠지 모르게 내 시선을 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갸웃했다가 아직 중앙에 남아있는 안현을 응시했다. 패배의 충격이 컸던 걸까. 안현은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좌절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한참 동안 안현을 보다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가시죠. 일단 식사를 마친 후 정식적인 클랜원의 절차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절차라면…?”
차소림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부로는 장비를 점검하거나 숙소를 배정하고, 외부로는 신분을 변경하는 게 있겠네요.”
차소림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전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
“이 방도 싫다.”
“꺄아아아악!”
머셔너리 하우스 별관. 평소 클랜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3층에 때아닌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니 다른 방을 보여다오. 연금술사여.”
“야!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이게 벌써 몇 번째 방이야!”
비비앙은 절규했다. 원인은 바로 뱀파이어 ‘사샤 펠릭스’ 때문이었다.
김수현은 차소림을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등록하면서, 노예 관계인 뱀파이어도 함께 등록했다. 하여 등록소에서 절차를 마치고 난 후, 김수현은 비비앙에게 한 가지 특명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머셔너리 하우스를 안내하면서 숙소 등 여러 가지를 챙겨주라는 것. 거기에는 이제 서로 한솥밥을 먹게 됐으니, 예전의 기억은 잊고 한 번 친해져 보라는 깊은 뜻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문제는 터졌다. 기껏 밥 잘 먹고 구경 잘한 뱀파이어가 숙소를 고르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까다로워진 탓이다.
적당히 안내해주고 남다은에게 달려갈 생각이었던 비비앙은, 뱀파이어가 방을 고르는 과정을 보고는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가 방을 고르는 방법은 특이했지만, 과정 자체는 간단했다.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고는 곧바로 방을 평가한다.
하지만 이유가 웃기다. 예를 들면 “춥다.”라던가, “냄새가 이상하다.”라던가,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던가 등등.
아무튼.
사정이야 어찌됐든, 단순한 냄새로 가부를 결정하는 모습에 비비앙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너 말이야. 내가 사지 좀 잡아뜯고 고문 좀 했다고 이러는 거 아니야. 응? 유치해 진짜.”
당장에라도 얼굴을 할퀴려는 듯, 비비앙은 눈에 불을 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의연했다. 대차게 콧방귀를 뀌더니 한심한 눈길을 보낸 것이다.
“흥. 역시나 저급한 거미답군. 고작 방을 안내해주는 게 그리 어려운가.”
“아니. 그러니까 이게 몇 번째냐고요. 너 지금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엿? 뱀파이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뱀파이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스스로 다른 방의 문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한동안 킁킁대더니 역시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별로. 너무 척박하다.”
“하…. 마음대로 해. 나 안 해. 아니. 못해!”
결국 비비앙은 참다못해 포기를 선언했다.
“흠. 난 길을 잘 모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또다시 혀를 쯧쯧 찬 뱀파이어는 느릿하게 걸어 또 하나의 문 앞에 섰다.
“저게 진짜.”
안 하겠다고 했지만 비비앙의 시선은 뱀파이어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순간 다급히 외쳤다.
“야, 잠깐! 거긴 주인 있는 방이야!”
그러나 뱀파이어는 이미 문을 벌컥 연 상태였다. 드러난 방은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와 새하얀 사제 복들이 걸려있었다. 또한 벽에 걸린 예쁜 선반과 널빤지에 가득히 쌓인 찻잔이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킁킁. 킁킁킁.”
이내 얼굴만 슬쩍 들이밀어 냄새를 맡는 뱀파이어를 보며 비비앙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야! 주인 있다고 했잖아!”
“킁킁킁. 킁킁. 킁…?”
“안 들려? 그 방은 안솔 방이라고!”
자신을 무시하는 행태에 열이 받았는지 비비앙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더니 엉덩이라도 걷어찰 기세로 씩씩거리며 다가섰다.
“너 지금…!”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우웨에에에엑!”
“꺄아악! 꺄아아악!”
갑작스레 토악질을 하는 사샤 펠릭스. 비비앙은 기함해 후다닥 물러났고, 걸쭉한 욕지기를 내뱉었다.
“미, 미친! 너 진짜 미쳤어?”
“우욱! 으웨에엑!”
그러나 연거푸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거짓말 같지는 않다. 하여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떠 살피다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야. 야?”
“우욱…. 웁…!”
“너 갑자기 왜 그래?”
“허억…, 허억…. 제기랄! 도대체 이 방은 누구 방인가!”
쾅!
“안솔 방이라고 했잖아.”라고 대답하려던 비비앙은 거세게 닫히는 문소리에 찔끔했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연신 입을 닦으며 경멸 어린 눈초리로 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냄새를 맡는 게 아니었어…!”
“왜, 왜 그러는데?”
“침 냄새! 여인의 애액 냄새! 무슨 놈의 이런 변태적인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정말이지 지금껏 봐왔던 방 중 최악의 방이다!”
뭔가 단단히 한이 맺힌 듯, 가열차게 내뱉은 뱀파이어는 이내 몸을 휙 돌려 복도를 걸었다.
“침? 애액?”
고개를 갸웃하던 비비앙.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뱀파이어를 보다가 곧바로 뒤쫓기 시작했다.
“또 어디 가는데?”
“됐다. 혼자 보겠다.”
“거기부터는 주인들이 있는 방이라고!”
조금 전 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걸까. 가장 복도 끝까지 걸어간 뱀파이어는 곧 어느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채 비비앙을 돌아보았다.
“여기도 주인이 있는가?”
“어? 거, 거긴….”
“주인이 있는가?”
“지금은…. 없는데.”
“후유. 그럼 상관없겠지.”
뱀파이어는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방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번 방에도 누군가 사용한 흔적은 있었다. 침대는 뽀얀 먼지가 살짝 쌓여있고 그 위로 빛 바랜 로브가 벽면에 걸려있었다. 책상에는 두꺼운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한 쪽에는 연금술에 사용되는 간단한 기구들이 놓여있었다.
“잠시만!”
뒤늦게 들어온 비비앙은 문틀에서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안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
“킁킁, 킁킁킁.”
이내 코를 벌름거리는 뱀파이어를 보며 비비앙은 급히 팔을 잡아 끌었다.
“자자. 여, 여기도 별로 지? 다른 방 보여줄 테니까, 4층으로 가보자.”
“아니, 잠시만.”
그때였다.
비비앙의 팔을 뿌리진 사샤 펠릭스는 이내 살며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비앙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여태껏 밖에서 냄새만 맡던 뱀파이어가 처음으로 안쪽으로 발을 들인 것이다.
“흐음, 흐으음.”
뭔가 마음에 드는 듯 비음을 뱉으며 방을 둘러보는 뱀파이어. 비비앙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떤데?”
“한심하다.”
뱀파이어는 즉답했다. 그와 동시에 비비앙의 눈살이 크게 찌푸려졌다.
“뭐라고?”
“기막히고, 딱하고, 한심스럽군. 깊이 고뇌하고 발버둥친 흔적이 이곳저곳에 아로새겨져 있어. 너무나 번거롭고 갑갑해 내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야.”
“하. 그래서 여기도 마음에 안 드신다?”
“하지만.”
그때, 뱀파이어는 둘러보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내비쳤다.
“따뜻하다.”
“…뭐?”
“이상하군. 유독 이 방만이 온기가 있어. 음음. 아주 마음에 들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라고 했나? 주인이 없다면 나는 이 방으로 하겠다. 괜찮을까?”
그리고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는 뱀파이어를 보며 비비앙은 눈을 끔뻑였다.
“…정말?”
“그래.”
“진짜로 이 방이 마음에 들어? 왜?”
“흠…. 이 방만큼은 딱히 까닭은 없다. 그냥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뱀파이어는 침음을 흘릴 뿐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사샤 펠릭스는 한참 동안 방안을 꼼꼼히 둘러보더니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이 있지. 계절도, 삶도 지독한 추위가 지나야 봄이 오는 법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비비앙이 의아해하며 되묻자, 뱀파이어는 조용히 대답했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온다는 소리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아 팔을 벌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막히지만, 성실하다…. 딱하지만, 끈기가 느껴진다…. 한심하지만, 열정적이다…. 그래. 이 방은 마치….”
이윽고 뱀파이어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슬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갓 겨울이 지난, 따뜻한 봄과 같지 않은가.”
============================ 작품 후기 ============================
하하. 죄송합니다. 용량을 꾸역꾸역 집어넣다 보니 예상외로 집필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_(__)_
저번 회 코멘트는 잘 보았습니다. 저 여러분. 한 가지 알려드릴게…. 뱀파이어는 남성체입니다. 여성체가 아니에요.(순간 제가 혹시 여성체로 서술했나 몇 번이고 다시 살폈습니다.) 그런데 안현이랑 뱀파이어를 이으면…. 탁 까놓고 말할게요. BL이잖아요. -_-a BL 싫어하시면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ㅜ.ㅠ
아. 외전은 거의 끝났습니다. 지금 순번이 9잖아요? 외전은 순번 10에서 끝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