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58
00457 안현을 구출하다. =========================================================================
처음 눈에 보인 건 적막한 공기가 흐르는 허공이었다. 거기서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약 30미터쯤 아래로 둥그런 둘레를 그리는 공터가 보였다.
그렇다면 저 장소가 바로 신화 속 영웅들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란 말인가.
나는 조용히 공터를 응시했다.
공터는 확실히 수천 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고등학교 운동장 서너 개는 합친 크기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다. 어딘가 모르게 거칠고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게, 황량한 사막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공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중앙 부분으로 보이는 곳에 유독 검은색 진흙 같은 물질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다. 꼭 황토색 도화지에 검은색 물감을 흩뿌린듯한 풍경으로, 아마 중앙이 움푹 패여 있었으면 늪지대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흙 위로 둥글고 허여멀건 한 것들이 둥둥 떠올라 있었다. 안력을 돋워 두루두루 자세히 들여다보자, 곧 저 허여멀건 한 것들이 사람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은 진흙 같은 물질에 파묻힌 채 얼굴이나 발만 떠오른 상태인 것이다.
– …….
여인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공터를 내려다보는 눈이 약간 가늘어져 있는 게, 눈동자에는 처연한 빛이 서려 있다.
한동안 여인을 응시하다가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인은 화들짝 어깨를 들먹이더니 조심스레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동그래진 눈과 살짝 오므린 불그스름한 입술이 왠지 귀엽게 보인다.
“실종된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진흙에서 끌어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내려가는 길에 설치된 함정이라던가 주의해야 할 마법 진이라도 있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진흙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곧 차분히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니, 어쨌든 전체적인 의미는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면까지의 거리는 얼추 30미터. 이 정도면 내 능력으로 충분히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다.
하여 일단 먼저 내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천천히 내려오라고 말하려는 찰나.
‘응?’
갑작스레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걸 느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클랜원도 지면에서 발이 살짝 떼어진 상태였다.
범인은 여인이었다. 은은한 빛을 뿌리는 구체가 여인의 가냘픈 손을 감싸고 있는데, 일종의 공중 부양 마법을 사용한 듯싶었다.
“꺄아악! 김수현 나 떨어진다! 나 떨어진다고! 꺄아아악!”
“오, 오빠. 나 죽기 전에 오빠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킥!
‘…….’
비비앙과 유정의 호들갑을 들었는지 여인이 한순간 킥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살며시 벌린 손 틈으로 보자 한 손으로 입을 꼭 막은 모습과, 소담한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후 아래로 내려가면서도 여인이 숨죽여 웃는 소리가 계속 들려와, 나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애써야만 했다.
아무튼 약간 어수선한 소란이 일기는 했으나, 이내 지면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순간 곧바로 사그라졌다. 여인은 아래로 내려왔음에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내게서 등을 돌린 것으로 보아 아직도 웃는 중이라 생각됐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몇몇 분들도 이미 보셨겠지만, 아마도 저 늪지대 같은 장소에 사용자들이 잠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안현을 중심으로 찾되, 살아있는 사용자가 보이면 바로 끌고 나와 주세요…. 아. 사제는 예외입니다.”
막 아랫단을 걷어 올리던 신재룡과 안솔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몇 걸음 물러섰다.
나는 침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앙 일부분이라고는 해도 공터의 크기가 워낙 큰 탓에 당장 눈에 보이는 얼굴만 기백 개는 족히 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모두 다 살피기는 해야 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일단은 안현의 구출이 우선이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늪지대처럼 보이는 곳에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액체라고 보기는 어려운, 물에 불린 흐물흐물한 젤리 같은 감촉이 발목 아래까지 잠겼다.
그 순간 약간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아주 미약한 정도였다. 계속 잠겨있다면 모를까. 몇 시간 정도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 나는 늪지대를 헤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용자 김현(사망).』
『사용자 신지석(사망).』
『사용자 백혜연(사망).』
『사용자 한윤상(사망).』
한 번 크게 주변을 둘러보자 여러 사용자의 이름과 상태가 우수수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부분 사용자의 상태는 사망을 알리고 있었다. 아마 이 장소에 들어온 후로 쭉 잠들어있다가, 이 정체 모를 늪지대에 생명력이 빨려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던 중 문득 눈에 익은 이름이 눈에 밟혔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가 이름이 떠올라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 한 구가 놓여있었다.
마치 미라를 보는 것 같다. 얼굴은 핼쑥한 걸 넘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건조돼있었다. 발을 들어 이리저리 몸을 굴려보자, 가슴이나 허리의 모양으로 확실히 여인의 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용자 성유빈(사망).』
성유빈. 구 황금 사자 클랜의 간부였던 사용자.
한때는 잘나가는 사용자였지만 황금 사자의 몰락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여인이었다. 전쟁 포로들을 처리하며 구금에서는 풀려날 수 있었으나, 황금 사자를 둘러싼 소문이 매우 좋지 못했던 터라 이후의 생활은 꽤 힘들었을 것이다.
성유빈이 왜 이 장소에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다가, 역전의 발판으로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온 게 아닐까 추측한다. 비록 이렇게 돼버린 게 약간 불쌍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홀 플레인은 원래 이런 세상이었으니까.
문득 한 클랜원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차분히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숨이 붙어있는 사용자를 찾았는지 두 발을 잡아 질질 끌고 나가는 한별을 볼 수 있었다.
말할까, 말까.
잠깐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괜히 말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나는 들었던 발을 빼고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나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바로 생각을 돌려 외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현은 이 장소에 가장 최근에 들어왔을 것이다. 망인들이 중구난방으로 던져놓지만 않았다면, 안쪽보다는 바깥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이었다.
이내 둘레를 따라, 나는 무수히 떠오르는 사용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며 걸었다. 그리고 공터를 절반 정도 걸었을 즈음, 비로소 목표했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용자 안현(중상).』
나는 곧바로 외쳤다.
“안현을 찾았습니다! 사용자 안솔! 사용자 신재룡! 이쪽으로!”
나는 듯 달려가 확인하자, 얼굴만 둥둥 떠오른 채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안현을 볼 수 있었다. 클랜원이 이곳에 다다르기 전, 나는 안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리고 바로 늪지대에서 끌어올려 바깥쪽으로 데리고 나갔다.
안현은 성유빈과 같이 미라처럼 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전의 건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살가죽에 뼈가 보일 정도로 피골이 맞닿아 있었다.
방금 때린 걸 약간 후회하며 안현을 바닥에 조심조심 눕혔다. 그리고 코에 손을 대보자 가늘면서도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제 3의 눈으로도 확인한 만큼, 일단은 살아있다.
허리를 들자 안쪽으로 들어갔던 클랜원이 하나같이 나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바로 손을 들어 늪지대를 가리켰다. 안현은 나중에 보고 지금은 다른 사용자들의 구출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 신재룡, 안솔, 여인이 영혼이 차례대로 도착했다. 그들이 안현을 보는 반응은 꽤 다양했다. 신재룡은 격한 신음을 흘렸으며, 안솔은 눈썹을 한껏 추켜올렸다. 깜짝 놀랐는지 화가 났는지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살아…. 있는 겁니까?”
신재룡이 더듬거리며 묻자, 여인이 조용히 한 손을 들어올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리고 여인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안현의 가슴에 손을 대어 시간을 역행하는 마법을 외웠다.
– Tempus Auxilium….
이윽고 쏙 들어갔던 안현의 볼에 조금씩 조금씩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헐렁헐렁하던 장비가 솟은 살과 근육으로 꽉 차고 있었다.
저게 바로 내 몸을 되돌린 마법의 실체인가.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안현을 응시했다.
잠시 후.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느덧 안현의 안쓰러웠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혈색이 좋고 호흡도 고르다. 제 3의 눈도 더는 중상이 아닌 양호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감아 잠자고 있기는 했지만, 다시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이내 치료를 끝낸 여인의 영혼이 나를 돌아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살짝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
안현을 우선적으로 구출한 후, 우리는 다시 생존한 사용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대로 놔둬도 큰 상관은 없으나, 최소한 안현, 한결과 동행한 사용자들은 찾아내야 했다.
모든 구출 작업을 끝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정체 모를 지대에 잠긴 사용자들은 가히 수백 명에 가까웠으나, 사망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용자는 총 17명. 정말 일부에 불과한 숫자였다. 어쨌든 의뢰인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나는 생존한 사용자 전원의 치료를 부탁했다. 여인의 영혼은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시간 역행 마법으로 사용자들을 모조리 치료해주었다.
화정의 말에 따르면 원래 저런 마법은 등가 교환의 원리에 따라 발동자가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 하나, 여인이 영혼의 상태라 그렇게 큰 부담은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냥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잠자코 안현을 보고 있던 찰나, 문득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침착히 시선을 돌리자 나를 보며 머리를 갸웃 기울이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시간 역행의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 모든 치료를 마친 여인의 영혼은 처음보다 상당히 희미해져 있었다. 아직 형체는 알아볼 수 있었으나, 혹시 이러다 영영 소멸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아둬서 미안합니다.”
여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천천히 공터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조 작업을 끝낸 클랜원은 모두 한곳에 모여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은 안쓰러움과 호의가 섞여 있다. 아마 마지막을 지켜보려는 모양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로써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구출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네요. 이제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그리고 부디 원하는 곳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였다.
화악!
그 순간 영혼이 환한 빛을 발하는 것과 함께, 여인이 살짝 미소 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인의 영혼은 바로 승천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내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시선을 내린 순간이었다.
여인의 키는 약간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깨금발을 들었는지, 느닷없이 여인이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입술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지는 걸 확인한 순간.
쪽.
입술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뭐지…? 지금, 나한테 입을 맞춘 건가?
“기, 김수현? 야! 야! 야아아아!”
“뭐, 뭐…? 지금 뭐…? 아, 아니…. 뭐…?”
소리를 빽 지르는 비비앙과 어벙한 얼굴을 한 안솔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내 눈에 쌍심지를 돋운 채 다급히 단검을 꺼내는 유정의 기척을 느낀 걸까. 여인은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더니, 양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발그레한 입술을 떼었다.
– 안녕…. 우리, 다음에 또 만나요.
흡사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고운 목소리.
이윽고 내가 어떤 대답도 못하고 있는 사이, 여인은 금세 한 줄기 빛으로 화해 안솔의 허리춤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멍하니 입술을 매만졌다.
============================ 작품 후기 ============================
이로써 안현의 구출 파트도 마무리 지었네요. 하지만 다음 파트에 아직 풀어야 할 약간 복잡한 이야기가 남아있어, 아직 끝났다! 라고 외치기에는 이른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전 회에 사내와 여인이 영혼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내용이 있었지요? 사내가 뭐라고 속닥거리고, 여인이 호호 웃으며 사내의 옆구리를 가격한 내용이요. 네. 그렇습니다. 사내는 바로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거죠. 후후. 독자 분들도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대충 짐작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아. 마리 앙트와네트의 말은 제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더군요. 어느 독자 분 말씀대로 엔하위키를 참조했는데, 마리 앙트와네트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 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이 똑똑한 여인이었다고,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고 하신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 말씀이 진짜였나 봅니다. 😀
PS. 아인현석 님!
쪽지는 잘 보았습니다. 답신을 눌렀는데, 현재 수신 거부 상태라 나오고 있어요! 일단 질문해주신 내용은, 131회 초반 부분에 있습니다. 현재는 그냥 있지만 차후 이북 수정 진도가 다다르면 삭제할 예정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