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87
00486 평온한 한 때. =========================================================================
“연합 해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조금은 놀란 마음으로 서지환을 응시했다. 초연한 눈이 보였다. ‘설마 정말로 하라고 하겠어?’라는 허세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눈. 서지환은 나를 찾아와 무릎을 꿇을 때부터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면 사용자 정보가 궁금해지지 않는가.
1. 이름(Name) : 서지환(6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ician,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상인 조합 클랜(Clan Rank : A Plus)
5. 진명 • 국적 : 상도(商道)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42)
7. 신장 • 체중 : 176.7cm • 87.6kg
8. 성향 : 기회 • 안전(Chance • Safe)
다른 것은 그저 그렇지만, 진명, 성향 그리고 행운은 주목할만했다. 특히 성향. 기회와 안전이 한꺼번에 나오는 건 나도 처음 보는 사례였다.
그러고 보니, 1회 차 때도 코란 연합은 징글징글하게 내분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저 서지환이라는 양반은 연합이 망하는 날까지 자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사용자였다. 그때는 그저 처세술이 좋구나 라고 만 생각했는데, 성향이 저러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허언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이 사태를 책임질 수 있다면, 기꺼이 연합을 해체하고 코란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하하…. 조금 의외네요. 코란 연합이라면 첫 번째 조건은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였는데요.”
“…첫 조건 중 각 클랜의 사과와 발견한 유적을 넘기는 조건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히 사과는 당연한 부분이고요. 하지만, 배상금은 앞선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사과는 당연한 일.
그런데요. 그 유적도 원래 내 거예요 이 양반아. 우리 형한테 주려고 아껴놓은 건데….
아무튼,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배상금으로 요구하신 2천만 골드는…. 무리입니다. 아니. 사실 저도 상인 조합을 맡고 있는 만큼, 온 연합을 쥐어짜내고 코란도 쥐어짜내면 어찌어찌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허나 그렇게 해버리면 연합은 폭삭 망합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모든 클랜원이 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연합이 망하면, 앞으로 코란의 경제는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한 일이겠지요. 연합의 사용자들에게. 그리고 코란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그런 고통은 안겨주느니, 차라리 연합을 해체하고 조용히 물러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흠.”
나는 턱을 매만지며 서지환의 말을 하나하나 음미해보았다. 과연. 진명이 상도라는 건 이걸 말하는 거였나.
잠시 후, 서지환은 재차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아예 바닥까지 닿을 정도였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두 조건을 고수하신다면, 저희는 두 번째 조건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 진정한 속내는 첫 번째 조건을 완화해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연합은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반성했습니다. 부디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신다면 기필코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완화라. 어느 정도를 원하시는지를 모르겠네요.”
“예. 배상금을 줄여주시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일시불이 아닌 분납으로만 완화해주시면, 제 모든 것을 걸고 마련해보겠습니다.”
“분납…. 으음.”
서지환의 나이는 42살.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한테 이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모든 것을 버리고 매달리고 있다. 보아하니 책임감도 강한 편인 것 같은데…. 수완만 좋은 사용자라면, 약간은 탐이 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이쯤 하기로.
어차피 코란 연합은 이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 세렌게티, 남벌, 아르테미스, 가리사니, 이끼. 주축을 이루던 여덟 클랜 중 여섯 클랜이 거의 망하거나, 또는 탈퇴한 상태였으니까. 또한 중앙 관리 기구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으니, 적당히 숨통을 틔워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코란 연합을 협력(을 가장한 산하) 클랜으로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여, 나는 지긋이 말을 기다리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연합을 해체하세요.”
“…………예.”
침통한 목소리. 결국에는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 눈을 꾹 감는 게 보였다. 잠시 그 얼굴을 감상하다가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사용자 서지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길. 제 기준으로 보면, 지금의 연합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설 의도는 좋았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 물이 너무 고였다고나 할까요?”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지금의 연합은 해체하시고, 새로운 연합을 만드세요.”
“예…. 예?!”
그 말에 서지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코란에서 물러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예. 물이 고여 썩었으면, 덜어내고 새로 부으면 되는 일입니다.”
“물을…. 새로 부어라?”
서지환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을 탁 치고는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한 건지 완전히 알아들은 듯싶었다. 말인즉슨 지금의 연합은 해체하고 새로운 연합을 만들라는 소리였다.
“변화하는 연합보다는, 새 출발하는 연합이 더욱 보기 좋을 것 같군요. 그 편이 사용자 서지환의 뜻에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연합을 새로 만들라는 멍석을 깔아주기는 했지만, 차후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또한 코란이라는 커다란 파이를 포기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이득이 있는 방향으로 이번 결정을 이끌어야 한다.
즉 보험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지금 나를 보며 언뜻언뜻 웃고 있는, 저 보험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박환희를 응시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어디 한 번, 몇 가지 조건을 완화해볼까요? 한 두어 개 정도를 말이죠.”
“두어 개라면….”
“우선 첫 번째. 제가 듣기로는 현재 수 로드가 실종된 상태라 들었는데…. 어쨌든, 수 로드가 없는 동안에는 누군가 대표로 이 상황을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사과는…. 생각해보니까, 클랜마다 각각 사과하는 게 번거로울 것 같네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분들 중 사용자 박환희가 여러분들의, 그러니까 새로운 연합의 대표로 나서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읍시다.”
“…환희가요?”
서지환은 서너 번 눈을 끔뻑이더니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로 박환희를 돌아보았다. 비단 서지환뿐만이 아니라, 민백화와 우설희도 박환희를 응시했다. 저놈이 대표로 나온다는 게 어색해들 보이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명분으로 들어가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기실 연합 내 종주 역할은 수 클랜이 맡고 있었고, 클랜 로드인 박태진은 현재 실종된 상태였다. 그러니 수의 2인자인 박환희가 연합의 전면으로 나서는 게, 아주 경우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박환희를 대표로 내세우라는 건 차후 새로운 연합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서지환이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용자라면, 방금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조건은 어디까지나 거래에 불과하다. 박환희를 연합의 대표로 선출해라. 그렇게만 하면 두 번째 조건인 엄청난 배상금을 꽤 줄여줄 수도 있다는 일종의 거래.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한참 동안 박환희를 바라보던 서지환은 이내 시선을 돌려 침착히 머리를 끄덕였다.
“예, 예. 좋습니다. 어차피 태진이가 없으면 환희가 맡는 것도 나쁜 모양새가 아니니…. 태진이가 돌아오기 전까지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거야 연합 내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죠.”
서지환은 박태진이라는 상황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구변 좋게 화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서지환이 덧붙인 말은, 어디까지나 박태진이 생환한다는 가정 아래 말하는 거였으니까.
“좋네요. 그럼 두 번째 조건은…. 배상금을 줄이고 지불 방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첫 번째 조건, 아니 거래를 받아들였으니, 이제는 본론인 두 번째 조건을 완화할 차례. 잔뜩 긴장한 얼굴들을 보며 나는 왼쪽부터 차례대로 시선을 던졌다.
“원래는 연합 전체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려 했는데, 이것도 생각해보니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구경한 클랜은 잘못한 클랜보다 상대적으로 죄가 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건 앞선 사과 조건과는 반대로, 연합 전체가 아닌 각 클랜이 배상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바꾸겠습니다.”
“그, 그렇다면.”
“예.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말씀 드리죠. 수는 300만 금화, 상인 조합도 300만 금화, 그리고 백화는 400만 금화를 지불하시면 됩니다. 이 조건은 어떻습니까?”
“…예? 그게 정말이십니까?”
서지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리고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1000만 금화도 결코 적은 수준은 아니었으나, 기존 2000만 골드보다는 절반이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나름 구색도 맞고 연합도 어느 정도 무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면…. 반 년, 아니 아니. 4개월이면 완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십니까?”
“저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합니다. 세 클랜 합해서 1000만 골드. 이걸로 두 번째 조건도 마무리 짓도록 하죠.”
우리 클랜 돈 많아요.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말을 겨우 삼키며 나는 가볍게 손짓했다.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지환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사정을 알고 있는 박환희는 웃는 듯 아닌듯한 미묘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남은 두 여인, 우설희와 민백화는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우설희야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고, 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민백화를 마주했다.
“백화 로드도 사용자 송희선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앞선 두 클랜보다 지불 금액이 높은 이유도, 바로 사용자 송희선 때문입니다.”
“…네.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예. 말씀하세요.”
“외람된 말씀일지도 모르나…. 희선이라는 아이를 아실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송희선. 당연히 알고 있다. 신혁의 지시로 김수정 캐러밴이 머셔너리에 의뢰를 넣도록 만든 장본인.
민백화가 말을 이었다.
“지금 희선이는 실종된 상태에요. 물론 행방불명 된 건 아니고,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탄 거라 생각돼요.”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송희선의 근황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민백화는 정황을 모르니 아마 잠적했다고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좌우간 송희선을 가만히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그렇겠죠. 죄가 밝혀졌는데 처벌을 받기는 두렵다. 그런 심리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래서요?”
“…지금 저희 백화에서도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혹시 찾게 되면, 자비로운 선처를 부탁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사실 사용자 송희선에 대한 현재 제 심정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요. 아무튼 그거야 찾고 난 다음의 이야깁니다.”
“혹시 찾게 되면 제가 잘 말해 볼게요. 부디 오늘의 부탁을 기억해주세요.”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양 머리를 까닥였다. 그리고 크게 기지개를 피는 것과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아무튼 얘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방금 세 분은 협의가 된 걸로 아시고,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예, 예. 머셔너리 로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어서.”
“아, 알겠습니다.”
서지환은 처음보다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뻣뻣이 굳어있는 한 명을 힐끔 쳐다본 후, 남은 두 명을 데리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이내 방문이 닫힌걸 확인한 후, 나는 남은 한 여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설희.
이 여인이 다른 사용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번 계획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우설희도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르테미스 로드.”
“네…. 머셔너리…. 로드….”
“왜 혼자만 남겨놨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건….”
“아니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르테미스는 1000만 금화입니다.”
“…네?”
1000만 금화. 그 순간 우설희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나를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다.
“마, 말도 안 돼요! 왜, 왜 저만!”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요.”
“하, 하지만…. 무리에요! 아르테미스가 상단 클랜도 아니고, 아니 상단 클랜이라도 힘들어요! 1000만 금화는 도저히 무리라고요!”
“그래요? 그럼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물론 그 결과는 잘 알고 있으실 겁니다.”
딱 잘라 말하자 별안간 우설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이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걸 보았을 때, 아무 예고도 없이 빠르게 다가오는 우설희를 볼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바닥이 쿵, 울릴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났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바짓단을 잡으며, 우설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때 그 성과의 일은…! 시, 신혁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래요! 저도 피해자라고요!”
“구차하게 이러지 맙시다. Yes Or No. 하나만 말해주시면 되는데, 그게 그리도 어렵습니까?”
“왜 저한테만 이러시는데요? 네?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앞으로 개가 되라면 개가 되고, 옆에서 모시라면 모시겠어요! 그러니까 제발!”
“하라는 대로?”
듣자 듣자 하니까 하는 말이 가관이다. 이건 매달리는 걸 넘어서 그냥 진상이었다. 하여,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네! 하라는 대로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내가 솔깃해한다고 느낀 걸까? 거의 미친년처럼 붙잡고 늘어지던 우설희가 돌연히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더니 어떻게든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듯 숨을 고른다.
“저, 저요. 생각보다 정말 쓸만하거든요. 여, 여러모로 요. 아마 머셔너리 로드도 사용해보시면 만족하실 거예요.”
“사용?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
우설희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다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고 얼굴은 황혼이 비치는 강물처럼 발갛게 익었을 즈음.
우설희는 갑자기, 느닷없이,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가죽 바지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곧 매끈한 살결을 노출한 허벅지와 두툼히 솟은 둔덕을 가리는 새하얀 속옷이 보였다. 이내 내려간 바지가 종아리 부분에서 멈췄을 때, 나는 기함했다.
“아르테미스 로드!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그러자 그렁그렁한 눈을 들은 우설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 말씀 드렸잖아요.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요. 정말이에요. 저 정말 잘해요. 춤도 출 수 있고, 흉내도 잘 내고. 또….”
“춤? 흉내? 그만, 그만, 그만!”
그제야 비로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아, 나는 벌컥 소리치며 화를 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기분으로 우설희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머, 머셔너리 로드.”
“나 참. 고작 한다는 생각이…. 그래서 그 몸으로 무얼 하겠다고?”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결국 우설희는 눈에서 한 줄기 서러운 눈물이 흘렀다. 기껏 부끄러운 부분까지 보여가며 애원했는데도 먹히지 않자, 수치심 및 좌절감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갑자기 까닭없는 혐오감이 치솟아 속이 거북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슈욱!
아까부터 일렁거리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솟구쳤다. 갑자기 일어난 그림자는 곧 사람의 형상을 갖추더니,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와, 얘 좀 봐. 얘 진짜 웃기네? 호호호!”
그림자의 정체는 고연주였다. 지금껏 그림자에 숨어 사태를 관망하던 고연주가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꺄악!”
설마 그림자 여왕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우설희는 재차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고연주를 바라보았다. 허락 없이 멋대로 나오면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렸는데, 지시를 어기고 스스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용자 고연주?”
“수현.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잠시만요.”
그러자 바로 나를 돌아본 고연주는 매섭게 눈을 빛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 고연주의 눈에서…. 무언가가, 어떤 감정이 스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왠지 모르게 복수심이라 느껴졌다.
설마 고연주와 우설희는 구면인가?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얘 좀 봐. 얘 아주 꼴불견이네. 응? 남의 남편 앞에 두고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나, 남편…? 죄, 죄송…! 몰랐어…. 요….”
꽤 놀란 모양인지, 우설희는 간간이 딸꾹질을 하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중이었다. 고연주는 살기 어린 미소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가만히 몸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우설희에 속삭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였다.
“얘. 너 내가 누군지는 아니?”
“네? 네, 네. 그림자 여왕…. 님.”
우설희는 더듬거리면서도 간신히 답했다. 그러자 고연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림자 여왕? 아닌데? 어디 사는 누구누구는 그림자 창녀 씨라고 했던데?”
“힉! 어…. 어떻게…? 그때는 분명…!”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거든. 설마 내가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태진이가 입 조심하라고는 말 안 해주디?”
“그, 그럴 수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말실수로 한 번 죽어~. 봐야~. 정신~. 차리지?!”
“히익!”
고연주는 나른히 말을 잇다가 끝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우설희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은 듯 보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것처럼, 온몸의 미세한 동작마저도 정지한 것이다. 고연주가 내뿜는 살기는 그 정도로 차가우면서, 매서웠다.
나는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우설희가 고연주에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어쩌다 고연주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사실 저런 반응이 아주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 똑같은 말을 한 반다희는 단번에 목이 찔려 죽지 않았던가. 고연주에게 그림자 창녀라 비아냥거리고 살아남은 사용자는, 내가 알기로는 처형의 공주밖에 없다. 뭐, 우설희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다고나 할까.
잠시 후, 고연주는 가녀린 손으로 우설희의 턱을 강제로 움켰다. 우설희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시선을 올렸다. 아무튼 다 좋은데, 바지라도 다시 입히지. 계속 아래로 내린 상태로 있으니까 솔직히 진짜 꼴사나워 보인다.
고연주가 말했다.
“너. 아까 말 정말이니?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거?”
“네? 네, 네! 정말이에요!”
“정말로? 나중에 다른 말하기 있기? 없기?”
“어, 없어요! 그러지 않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금화 걱정을 하는 걸까. 우설희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바탕 까르르 웃어 젖힌 고연주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휙 돌리는 것과 동시에, 사르르 녹는 봄바람 같은 미소로 나에게 달려왔다. 어찌나 한순간에 변했는지, 조금 전 싸늘한 살기를 뿜어내던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수현~. 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우설희를 넘겨달라는 겁니까?”
무슨 부탁인지 알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치자, 고연주가 방실방실한 얼굴을 끄덕인다. 나는 잠깐 머리를 긁적였다. 우설희는 어떻게 처리할지 이미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하지만 고연주의 부탁이라면 조금 말이 달라진다. 이번 일에 매우 고생한 것도 있거니와, 고연주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고민은 잠깐이었지만, 결정은 한순간이었다.
“좋습니다. 뜻대로 하세요. 아, 그래도 경과 보고는 하셔야 합니다.”
물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연주는 진한 미소와 함께 그러겠다 답했고, 이내 우설희를 잡아 질질 끌며 방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문이 닫힐 때까지 여전히 하의가 내려가 있었다는 것.
아무튼 어쩌다 고연주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쯧쯧 혀를 차며 우설희의 불행을 애도했다. 그리고 연초를 한 대 꺼내는 것과 함께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코란 연합과의 협의를 마쳤으니 이로써, 길었던 음지 전쟁도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아니, 아직은 아닌가?
“후.”
연기를 뿜으며, 나는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실종으로 발표된 박태진.
잠적했다 알고 있는 송희선.
감옥에 있는 신혁.
그리고 고연주가 처리하겠다고 한 우설희.
사실 이들은, 이미 모두 내 손안에 있다. 다만 아직 결과만 나오지 않았을 뿐. 이르나 늦으나, 곧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될 연놈들이다.
그렇게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기며 연초를 거의 태워갈 즈음. 문득 품 안에 요동치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품에 손을 넣자 딱딱한 구슬이 잡혔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다만 일반적인 수정구와는 달리, 거무칙칙한 빛을 띠는 게 특징이랄까.
공교롭게도 마침 소식이 왔다는 생각해, 나는 지체 않고 마력을 흘려 넣었다.
파츳! 파츠츳!
이윽고 밝게 달아오른 수정구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어서 노이즈도 완전히 사라진 순간, 이내 수정구 겉면에 검은색 형체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살문이었다.
(접니다. 머셔너리 로드.)
“오호라. 마침 소식을 주는군.”
(예?)
“아니, 아니야. 좋은 타이밍이라고…. 그래. 일은 어떻게 됐지?”
일이 어떻게 됐냐고 물은 순간, 수정구가 보여주는 풍경이 일변했다. 어딘가 숲 속에 있는 모양인 듯, 검은색 일색이던 수정구에 나무와 풀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중요한 건 풍경이 아니었다.
어느덧 수정구에 누군가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뚝, 뚝, 뚝, 뚝.
뭔가가 뚝뚝 떨어진다. 나는 수정구에 비친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처음 눈에 보인 건, 핏방울이 찔끔찔끔 떨어져 내리는 풍경이었다. 한 칼에 베었는지 목 부근이 깔끔하게 절단돼있다. 거기서 조금 시선을 올리자 쩍 벌린 입이 보였고, 다음으로 까뒤집힌 눈동자가 보였다. 보아하니 기습을 당한 것 같은데, 아마 자신의 목에 언제 칼이 꼽혔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Ok. 확실히 박태진이네. 고생했어.”
(별말씀을. 그럼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태워버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지? 나는 하루면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도 마십시오. 박태진도 엄연한 강자입니다. 그리고 주변 부하 놈들이 어찌나 보호하던지…. 목숨을 걸고 탈출시키는데 정말로 놓칠뻔했습니다.)
“하. 별일이야. 살문이 우는 소리도 다하고.”
(그래도 의뢰는 완수하지 않았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박환희 포함 서너 명만 제외하고는 전부 추적 및 살해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송희선이란 사용자도 잡아드렸지요? 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럼, 이걸로 빚은 다 갚은 겁니까?)
다시 풍경이 변했고, 검은색 형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 쳐주었다.
“헛소리. 너희같이 쓸만한 놈들을 왜 놔둬? 아무튼 흰소리는 그만하고 의뢰 금이나 받아가. 그래도 두둑이 챙겨줄 테니까.”
(…설마 그러고서 저희를 죽이시려는 건?)
“그 정도로 개 자식은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용병 클랜을 운영하는데, 의뢰를 했으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리고 걱정 마. 고연주한테 전해주라고 할 테니까. 아마 일주일 후에 창고로 오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창고요…? 아. 코란에 있는 창고 말씀이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안 오겠다는 말은 안 하는 걸 보니, 돈은 받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홀로 킥킥 웃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잊지마. 일주일 후니까…. 아차. 송희선은 잘 있나?”
(걱정 마십시오. 우리 식구가 잘 지키고 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그 송희선이라는 사용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왜?”
(실은…. 송희선, 아시다시피 현대에서 꽤 유명한 배우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국 욕구를 못 참은 식구가 있어서 말이죠. 서너 번 가지고 논 것 같습니다.)
“아아. 상관없어. 어차피 죽일 거니까. 하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고연주가 갈 때까지 목숨만 살려놔. 일주일 후에 창고로 들어갈 놈이 한 명 더 있으니까.”
(놈이라면…. 혹시 신혁입니까? 지금 감옥에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중앙 관리 기구와 모종의 거래를 하신 건….)
한없이 음침하던 목소리가 도로 은근하게 변했다. 이놈은 꼭 무언가 원하거나 궁금한 게 있을 때 이렇게 목소리가 변한다. 정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오늘따라 이야기가 길어지네. 살문이 언제부터 내 일에 관심이 많았지? 의뢰, 돈. 이게 너희 모토잖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실수했다는 사실을 느낀 걸까. 이윽고 실례했다는 말과 함께 흘러나오던 빛이 꺼졌다.
나는 잠시 수정구를 매만졌다가 이내 느릿하게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손을 바로 꺼내지는 않고, 또다시 연초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실종으로 발표된 박태진은, 죽었다.
잠적했다 알고 있는 송희선은, 코란의 어느 창고에 있다.
감옥에 있는 신혁은, 곧 처리할 예정이다.
그리고 고연주가 처리하겠다고 한 우설희는…. 뭐, 알아서 하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연초를 깊게 빨아들였다.
잠시 후, 한 줄기 흐릿한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
처음 눈을 떴을 때 눈에 보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
주변을 둘러본 신혁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저녁을 먹은 후, 느닷없이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해 잠이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분명히 감옥에 있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떠보니 모든 게 변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이 감옥이 아니라는 것. 여기는….
“웁?!”
생각 도중, 신혁은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손과 발도 무언가로 꽁꽁 묶여있다. 그 중 오직 하나, 시야만큼은 트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혁은 공포보다는 위화감을 먼저 느꼈다. 마치 이곳을 처음 와본 게 아닌 것 같은, 아니 얼마 전에도 한 번 와본 것 같은 그런 위화감이었다. 그래. 마치 얼마 전 박환희를 데리고 왔을 때 있었던….
“!”
이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한순간 호흡이 멎었다. 그리고 신혁은 본능에 따라 서서히 전방으로 시선을 올렸다. 이어서 고개를 최대한 끝까지 젖혔을 때, 신혁은 비로소 볼 수 있었다. 허공에서 느릿하게 흔들리는, 좌우로 진자 운동을 하는 하나의 시체를.
“우우우우우우우웁!”
쩌렁쩌렁한 비명이 어두운 공간을 왕왕 울렸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곧 환한 빛이 켜졌다. 그러자 시체의 얼굴이 더욱 자세히 드러났고, 정체를 확인한 신혁은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 걸린 줄에는, 송희선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우우우웁! 우우우웁! 우우우우우우우웁!”
“아, 정말 시끄럽네. 언니. 깨어난 것 같아요.”
그때 귓가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 음색으로 보아 여인의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신혁은 자신도 모르게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곧 언니라고 추정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 저놈이 깨어날 때 꿈틀거렸으니까. 그런데, 주연이가 어떻게 죽었다고 했지?”
목소리 자체는 무척 나른한 어조였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은은한 살기가 깃든, 어두운 목소리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림자를 목소리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신혁은 온몸에 까닭 없이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그러나 목소리들은 그에 전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신혁이 깨어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시체도 못 찾았어요. 아마 여기서 기르던 개한테 모조리 뜯어 먹힌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똑같이 하면 되겠네.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개밥으로 던져. 아니면 산 채로 뜯어 먹히게 하던가.”
“네 언니.”
“우우우웁! 우우우웁!”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개밥으로 던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혁은 번뜩 고개를 들어 미친 듯이 휘젓기 시작했다. 누구냐고, 누가 이러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만두라고, 하지 말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갈이 꽉 물린 탓에 어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때였다.
“쟤 발광한다. 아무튼 처리 잘하고, 나는 이만 간다.”
“네 연주 언니. 살펴가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린 틈으로 드러난 밤의 거리가, 쓰러진 신혁의 시야에 아주 잠시 들어왔다.
그렇게 밖의 풍경을 보았을 때, 신혁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납치된 장소가 어느 공간이었는지를.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도 너무 늦은 상태였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일지도 모르는데, 문은 너무도 매정하게 닫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들려오는, 수많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들.
그르릉…. 그르르릉….
그르릉…. 그르르릉….
주변으로 무언가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척들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 장소에서 저질렀던 짓이 홀연히 떠올랐다. 그래. 신혁은 예전 박환희의 끄나풀이라 생각한 여인을 잡아와 차마 말 못할 짓을 저질렀다. 창관에 카운터를 보는 여인이었나?
‘저년, 참 독한 년이더라. 하다못해 별 짓거리를 다해봤는데, 그래도 입을 다물더라니까.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시간이었어. 가끔 사람이 개랑 섹스하면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흐흐.’
그때 그 여인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렇게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이 찾아들 무렵, 신혁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뜻 모를 암울함이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우득, 우드득! 쩝쩝….
우득, 우드득! 쩝쩝….
============================ 작품 후기 ============================
드디어 이번 파트도 끝났네요. 하하.
혹시 궁금하신 부분이 있다면 부디 코멘트로 달아주세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자꾸만 머리가 멍해져서요. 여러분들 모두 맛있는 점심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