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06
00505 밀어주는 수현과 버림받은 수현. =========================================================================
사용자 아카데미 사건은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클랜 로드로써 봐야 하는 기본적인 업무도 있거니와 계획한 일들도 진행시켜야 했으니까.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일에 비해 내 몸은 하나였고, 그런 만큼 모든 일을 하나하나 쫓아다니며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일은 클랜원들에게 맡기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용병 아카데미는 이미 공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거주민은 아카데미를 새로 짓는 것 보다는, 도시 중앙 성채를 새로 개축하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말인즉슨, 어차피 한 해 정원이 6명인 이상 크게 지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 나는 바로 허락해주었고, 그 덕에 예정 기간도 상당히 줄어들어 수료 전까지 충분히 완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을 돌린 건, 바로 새로 보낼 총 교관을 선발하는 일이었다.
김민서는 총 교관 겸 사제 클래스의 교육을 맡고 있었고, 그에 따라 이효을도 사제 계열 사용자를 보내주기를 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클랜원은 신재룡이었다. 사용자 정보나 성격이나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아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안솔이 끼어든 것이었다. 신재룡을 추천하겠다는 말을 들은 안솔이 자기도 사용자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고 생떼를 부렸다. 바닥을 구르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는 통에 엄청 짜증이 일었는데, 나는 문득 안솔을 데리고 가는 방향으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현의 사건으로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앞서, 안솔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안솔에게 총 교관은커녕 교육 교관을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보조로 데리고 가겠다고 공언했다.(사실 보조는 필수가 아닌 조건이라 딱히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자 안솔은 가는 것 자체로 만족했는지 더는 조르지 않았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하나하나 일을 진행하고 처리하는 와중, 나는 중앙 관리 기구로부터 하나의 전령을 받을 수 있었다.
『발신인 : 이효을 & 수신인 : 김수현』
(내용 : 사용자 아카데미 5주차 교육 종료 안내. 중앙 관리 기구로 특별 교관 신고 및 교육 과목 배당. 최소 6주차 시작 하루 전까지는 도착 요망.)
전령으로 온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곧 사용자 아카데미 6주차가 시작될 예정이니, 중앙 관리 기구에서 특별 교관 전입 신고를 마친 후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비로소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
“교관~! 보조~! 교관~! 보조~! 교관~! 보조~! 교관~! 보조~!”
“…….”
“나는 보조? 오라버니는 교관! 나는 보조? 오라버니는 교관!”
“…….”
6주차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오후쯤 클랜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기세 좋게 클랜 하우스를 떠났지만, 설마 바바라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원인은 지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안솔 때문이었다.
당최 무에 그리 좋은지. 떠날 때부터 내내 뜻 모를 괴상한 노래를 불러 젖히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는 탓이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꼴에 양팔을 휙휙 휘두르며 리듬을 타니, 같이 다니기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미 바바라로 오면서 수십 번의 킥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조용히 하라고 해도 도무지 들어먹지 않을 기세라 은근슬쩍 거리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안솔은 되레 악착같이 쫓아오며 더욱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결국 중앙 관리 기구에 도착했을 때는 심신이 뜻 모를 피로에 지쳤을 즈음이었다. 뭔가 한 것도 없는데. 나는 곤히 잠든 마르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비척비척 계단을 올랐다.
“가장 늦게 왔네?”
이윽고 방안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앉힌 순간, 이효을이 빙글빙글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바라보자 이효을은 킬킬 웃으며 품에서 연초를 꺼냈다.
“특별 교관 중에서 가장 늦었다는 소리야. 소영이는 꼭두새벽에 도착했고, 우리 유현씨는 아침에 도착했거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적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 어느 것부터 지적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네 친구냐. 그리고 내 형 그렇게 부르지 마라. 마지막으로 연초 도로 집어넣어. 아. 마지막만 부탁이야.”
막 불을 붙이려던 이효을은 황당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너 번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시선을 살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곧 물어보려고는 했는데. 그건 뭐야?”
“아기 요정이야. 이름은 마르.”
“그럼 그 아래는?”
“?”
“네 발목을 물고 있는 동물처럼 보이는 것.”
“아. 얘는 아기 페가수스. 이름은 도도.”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이어서 왼발을 들어올려주자 발목을 꼭 물고 있는 도도가 때맞춰 날개를 퍼덕인다. 그러자 이효을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차분히 연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콧잔등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요새 피곤해서 그런가…. 헛것을 보는 기분이네. 아니, 아무튼 게네들은 외부인이잖아. 네가 사용자 아카데미 원칙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갑자기 왜 그래?”
“외부인이라니. 말조심해. 이 둘은 차후 교육에 사용할 엄연한 성과의 일종이라고.”
“…교육에 사용할 성과?”
“그래.”
이효을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봐. 사용자 아카데미는 병아리들이 홀 플레인에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잖아? 그러면 한 시라도 빨리 현대의 향기를 지우는 게 관건이고.”
“그렇지. 그런데?”
“마르와 도도를 데려온 이유가 바로 그거야. 요정과 페가수스는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잖아. 그러니 홀 플레인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보여주고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말이지.”
“…호.”
이효을은 설마 이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몰랐다는 듯이 미약한 감탄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가슴이 콕콕 찔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뱉은 말은 전부 헛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얘기하면 도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을 터라,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름 괜찮은 방법인데?”
“으음. 그런 거지.”
이효을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얼굴을 하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말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이라서. 잠깐 구경해도 돼?”
“얼마든지.”
“음~. 마르는 자고 있으니 안되겠고. 도도라고 했나? 도도야~. 이리 좀 와보련~.”
“…….”
그러자 도도는 이효을을 흘끗 곁눈질했다. 그리고 무척 놀랍게도, 곧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같던 내 발목을 놓고서 종종거리며 달려갔다. 이내 이효을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손을 아래로 내밀자 도도는 그 손을 덥석 물어버렸다.
“어머. 얘 좀 봐. 꽤 귀엽잖아?”
그래도 천성이 여인이라 그런지, 이효을은 예뻐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도도의 행동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더니 이효을의 손을 곧바로 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침을 탁 뱉기까지. 누가 봐도 비위가 상했다는 행동이었다.
도도는 도로 아장아장 걸어와 내 발목을 물었다. 그리고 그런 도도의 행동을 보는 이효을의 얼굴은 자못 볼만했다.
“무, 무슨 그런 놈이 다 있어?!”
“네가 맛이 없었나 봐.”
“나 참. 정말이지 기도 안차서. 아 됐으니까, 가서 교육을 하든 육아를 하든 마음대로 해.”
“Ok. 어차피 애기들이야.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이효을은 “퍽이나.”라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아무래도 도도의 행동에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아, 나는 속으로 고소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허락도 맡았고 어찌어찌 신고도 넘어갔겠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문을 나서려는 찰나,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니 이효을에게 한 가지 물어볼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효을.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보자.”
“응? 궁금한 거?”
“아. 그 사용자들은 잘 지내고 있는가 해서.”
“그 사용자?”
“진수현. 그리고 맹아라.”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가면서 나는 중간중간 하연에게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물론 보고라고 해도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병아리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만큼 그에 관한 정보는 들을 수 없지만, 그 외의 것은 가능했다. 예를 들면 누가 교관으로 들어왔나 등 그런 것들은, 외부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하연의 보고 중 의외의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진수현이라는 사용자가 교육 교관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맹아라를 보조로 달고서.
“…그래. 네가 결국 맹아라와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지. 그런데 알면서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이효을은 서너 번 입맛을 다시고는 뭔가 언짢은듯한 말투로 말했다. 아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인데, 잊지 않고 말을 꺼내니 자못 불편한 모양이다.
진수현이 교관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놀랍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참가권이 있다면 그 누구도 교관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효을이 양보해달라던 참가권이 누구에게 갔을지 추측해본다면, 진수현이 교관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우선 첫 번째. 진수현은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공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걸까?
그리고 두 번째. 맹아라는 북 대륙의 수호자이다. 최대한 자신을 숨겨야 하는 입장인데, 정체가 드러날 것을 각오하고 보조로 따라 들어왔다. 드러내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뭔가 보일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아직은 뜬구름을 보는 느낌이랄까.
나는 이효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아는 건 없지. 거의 추측만하고 있을 뿐, 아직 정확한 사정은 모르니까. 어쨌든 이제는 말해도 상관없지 않나?”
“…미안하지만 그래도 알려줄 수는 없어. 이건 비밀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연관돼있기도 하니까. 내가 그걸 말할 자격은 없잖아?”
이효을은 여전히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사실 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터라,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럼 결국 천사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그걸 꼭 알아야 해?”
“영 찜찜해서. 울먹울먹하면서 자기들이 버림받는다고 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잖아?”
“…후. 그럼 그러시던가. 내가 그것까지 막을 권한은 없으니. 멋대로 해.”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좌우간 이효을에게 이제 더는 볼 일이 없다. 그리고 안솔도 밖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잠깐만.”
그렇게 생각해 문을 나가려는 찰나, 돌연 이효을의 말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반쯤 시선을 돌리자 아까 도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매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는 이효을이 보였다.
“김수현. 갑작스럽겠지만, 내가 조언 하나 해도 될까?”
“조언? 해봐.”
해보라는 듯 머리를 끄덕이자 이효을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희고 고운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붉은 입술이 상하로 떼어진다.
“전에도 한 번 바꾸려고 한 적이 있다지?”
“…그게 무슨 소리지?”
“네 담당 천사. 세라프라고 하던가?”
“…….”
“그 천사, 별로 소문이 좋지 않아. 아무튼 그냥 흘려 들어도 상관은 없는데, 웬만하면 바꾸는 게 좋을 거야.”
“킥.”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나는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비로소 문을 밀어젖히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나는 애당초 천사 자체를 믿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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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틀 연속 자정 연재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