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5
00594 웃으며 안녕. =========================================================================
광산 열차.
지금 상황에서는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니, 어쩌면 이게 마지막 남은 구명줄일지도 모른다.
“현아!”
한순간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곱씹을만한 틈은 없다. 신재룡의 외침에 안현은 곧바로 반응했다.
쿵!
엎어놓은 바구니, 아니 광산 열차를 번쩍 들어올려 힘차게 철도에 얹었다.
덜컥!
그러자 신기하게도 바퀴가 마치 자석이라도 된 것처럼 레일에 바짝 붙는다.
안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해지려 애썼다. 지금부터 이 녹슬고 낡아빠진 광산 열차를 굴려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어딘가 장치가 있을까?
무언가 당기는 거라도 있을까?
“안현!”
그때, 다시금 신재룡의 외침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린 안현은 기절한 헬레나를 주섬주섬 둘러업는 신재룡을 볼 수 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걸까?
“열차 내부, 아니면 주변을 자세히 찾아봐라! 분명히 무언가가 있을 게다!”
그러나 의문이 채 끝나기도 전, 다급하기 그지없는 외침이 이어졌다. 안현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 여기는 홀 플레인이었지.
그렇게 생각한 안현이 재빠르게 열차 내부를 훑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내벽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적당한 크기의 보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것의 정확한 정체는 모르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쪽에 보석이 하나…!”
“보석? 보석이면 마력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을 이해 못할 안현이 아니었다. 곧장 열차 안으로 뛰어들어 내벽에 붙은 보석에 마력을 주입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 순간, 갑자기 열차 아래서 격한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각각 꼭지점에 달린 바퀴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진동음만 들려올 뿐 그 이상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광산 열차는 여전히 레일에 붙은 채로 서 있었다.
이제 됐다는 기쁨도 잠시, 안현은 당황한 기분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돌렸다.
풀썩!
“어쩔 수 없지. 지체할 시간이 없어. 누군가 밀어야 할 것 같구나.”
그 순간 신재룡이 열차 안으로 헬레나를 집어넣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열심히 열차를 더듬던 안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머리를 돌렸다.
“예? 미, 밀어요?”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그, 그럼 제가….”
“아니. 안 돼.”
금방 나오려는 폼을 잡는 안현을 신재룡이 얼른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미는 건 내가 한다.”
“형!”
당연하게도, 안현이 크게 반발했다. 그리고 막으려는 신재룡을 무시하고 억지로 나오려는 찰나, 돌연 온몸이 바짝 굳는 것을 느꼈다.
안현은 멍하니 신재룡을 응시했다.
어느새 신재룡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안현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안현으로서는 처음 보는 신재룡의 얼굴이었다.
“어리광부리지 마라! …사용자 안현.”
그랬다. 신재룡은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살짝 힘을 푼 신재룡은 서로간의 얼굴 거리를 서서히 줄였다.
“현아. 지금 상황이 굉장히 급하다. 이러고 투덕거릴 시간이 없어. 우리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해.”
“혀, 형….”
“앞길을 보거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 등…. 너는 열차 자체는 물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비해 동료를 보호해야 한다. 이게 쉬운 일인 것 같으냐?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
돌연 안현은 지금 이 공간에 신재룡과 둘만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신재룡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정도로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치,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처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열차를 미는데 집중하는 것뿐이야. 알아들었니?”
“…그럼.”
“현아. 제발!”
“알겠으니까! …하나만, 제발 하나만 약속해줘요.”
그러한 상황에서, 결국에는 안현이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로 죽지 말아요. 어느 정도 열차를 밀면 무조건, 무조건 타겠다고 약속해요.”
“…좋다. 약속하마.”
약간의 텀을 두고, 신재룡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이죠? 괜히 저와 헬레나를 살리겠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
없다. 적어도 안현이 기억하기로는 한 번도 없었다.
결국 흙 암석 하나가 추가로 떨어지고 나서야, 안현은 신재룡의 약속을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그때였다.
“끄응….”
신재룡이 막 고오환을 부축해 일으키는 찰나, 미약한 침음이 거뭇거뭇한 입에서 새어 나왔다.
깜짝 놀란 신재룡이 잠시 주춤한 사이, 지금껏 감겨있던 고오환의 두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리고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더니 비틀거리면서 몸을 바로잡는다.
“무사 로드…?”
“아아. 됐소.”
“저,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뭐, 이야기는 아까부터 언뜻언뜻 듣고 있었고…. 업혀오면서 느낀 것도 있으니까. 아무튼 상황은 대충 알고 있수다.”
아직은 정신이 어지러운지 고오환이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그러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우~. 무슨 현기증이…. 아무튼 말은 됐으니까, 그쪽도 얼른 타기나 하쇼. 미는 건 내가 하리다.”
이윽고 터벅터벅 걸어간 고오환은 가볍게 몸을 풀며 양팔을 걷어붙였다.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러면 정신이 약간은 깨어있었다는 소리일까?
안현은 열차에 선 채로 멍하니 고오환을 응시했다.
대신 밀어준다고?
안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고오환의 이런 행동은 물론, 애당초 깨어날 거라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문득 고오환과 안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뭘 봐. 인마.”
백형식에게 당한 가슴은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고오환은 조금도 아랑곳 않으며 광산 열차의 후면을 부여잡았다.
“저…. 감사….”
“감사는 개뿔. 여기 볼 여유 있으면 앞이나 봐라. 자식아…. 콜록, 콜록!”
한껏 투덜거리면서도 기침을 뱉은 고오환이 끙 힘을 주며 서서히 열차를 밀려는 듯 폼을 잡았다. 그리고 와짝 찌푸린 얼굴로 옆으로 휙 머리를 돌렸다.
“사제 형씨는 뭐하쇼? 어서 타지 않고.”
“무, 무사 로드.”
“주변 상황 안 보여? 빨리 가자며!”
“그냥 제가….”
“아 속 터지네 진짜! 형씨, 내 몸은 내가 알아요. 어차피 이거 탄다고 해봤자 가다가 뒤질게 뻔히 보이는데…. 나는 그렇게 죽기는 싫어.”
“…….”
그제야 신재룡이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다시 앞으로 머리를 돌린 고오환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애송이 자식아.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라. …사실 알고 있었으니까. 너희가 나를 싫어하는 것 정도는.”
“그, 그건.”
안현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나도 너희를 싫어했으니까!”
뜬금없이 킬킬 웃은 고오환이 왠지 모르게 신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애송아. 그래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말끝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까 저 양반이 그랬잖아. 자기도 한 번도 같이 싸운 동료를 버린 적이 없다고.”
“…….”
“그러면 나도 지금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너희 동료라는 말이지? 응?”
“…예. 그렇죠.”
안현의 회답했다.
“좋아.”
고오환이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지금껏 동료를 버린 적은….”
그리고, 정말로 만족해하는 얼굴로 한 차례 숨을 들이킨다.
“단 한 번도 없거드으으은!”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힘을 잔뜩 주는 얼굴로 격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줬는지 가슴에서 핏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광산 열차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녹이 심하게 슬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원인이 있는 걸까?
고오환이 찡그린 얼굴로 있는 힘껏 밀어붙이고 있음에도, 마치 레일에 딱 붙어버린 것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고오환은 발악하는 얼굴로 신경질을 부렸다.
“제기랄! 이거 왜 이래?!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자. 한 번 같이 밀어봅시다.”
때마침 신재룡이 옆으로 걸어와 빠르게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자 흘긋 눈을 흘긴 고오환이 헛기침을 하며 약간 자리를 비켜주었다.
“…젠장. 민망하고만.”
그것도 잠시. 이내 두 거한의 사용자가 동시에 광산 열차를 밀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으음!”
“크으으으으윽!”
그래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광산 열차였으나 두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온 힘을 끌어내며, 사력을 다해 열차를 힘차게 밀어붙였다.
그러자.
끄르르릉!
우우우웅!
무언가 끌리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점차 잦아들던 소음이 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안현은 느릿하게나마 몸이 천천히 이동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광산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르르릉, 끄르르릉!
“안현! 이제부터는 절대로 우리한테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앞쪽에 집중해라!”
별안간 신재룡의 호통이 이어졌다. 안현은 보석에 재차 마력을 주입하며 한 손으로 흑 창을 꼬나 쥐었다. 그리고 기나긴 통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광산 열차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번 간신히 움직인 바퀴는, 두 번, 세 번을 돌아갈수록 더욱 빠르게 회전했다. 처음의 억지로 끌리는 듯한 느낌은 사라지고, 가면 갈수록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밀려온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통로는 아직 뚫려 있었다. 붕괴 현상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나 아직은 갈라지는 선에서 그칠 뿐. 아예 무너져 길이 막히는 광경은 보이지 않는다.
안현은 부릅뜬 두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열차 문제로 지체하는 사이, 어느덧 붕괴의 균열은 자신들을 한참이나 앞질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무의미하게 허비한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는 이 열차로 다시 쫓아야 하고, 앞질러야 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두 사내가 광산 열차를 밀어주고 있다. 여기서 안현이 해야 할 일은 열차와 헬레나를 최대한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돌연 안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차 속도가 빨라지면서 주변의 풍경도 비슷한 속도로 지나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가속이 붙으면 붙을수록, 소음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안현은, 딱 붙어있던 열차가 느닷없이 좌우로 흔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설상가상으로 천장에서 흙 암석들이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안현이 창을 휘둘러 쳐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바닥에 꽂히거나 아니면 철도를 건드렸다.
한 번 지면에 부딪칠 때마다 적잖은 충격파가 광산 열차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지면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의 감촉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안현의 경종을 울리고 있다.
안현은 이를 악물었다. 신재룡과 고오환에게는 더 이상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안현을 믿고 광산 열차의 보호를 맡겼고, 또한 지금 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나칠 정도로 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이 찰나의 순간, 한 생각이 안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덜커덩! 덜커덩덜커덩! 덜커덩! 덜커덩덜커덩!
흔들림이 심해졌다. 안현은 보석에 손을 댄 채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지금은 되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어라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안현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현이 선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최근에 개화한 능력인 신창합일.
창술의 일정 이상의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창이 되고 창이 사람이 되는 능력. 안현은 바로 그 능력을 응용했다. 보석에 댄 손과 자신의 마력을 이어 넣어, 광산 열차를 창으로 대입한다. 어찌 보면 들어오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지도 모르는 도박에 가까운 방법.
덜커덩, 덜커덩!
그리고 그 방법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아까 주현호와의 전투 때 느꼈던 창과의 일체감이 이번에는 광산 열차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석으로 흘려 넣은 마력은 차체는 물론, 안현의 뜻에 따라 열차 전체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당장에라도 날뛰고 넘어질 것 같은 광산 열차가 삽시간에 안정됐다. 불규칙하던 소음이 규칙적으로 변화함으로써 반발력이 최소화되고, 그에 따라 저항이 적어진 열차에 가일층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하다. 현아.”
우우우우우웅!
바퀴가 맹렬하게 회전한다. 처음 들려왔던 소음이, 이제는 웅혼한 마력음을 울리며 한층 안정된 상태로 통로를 빠르게 통과한다.
안현이 흘긋 시선을 올리자, 저기 멀리서 앞질러가던 붕괴의 균열이 차차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거리는 착실하게 좁혀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충분히 따라잡거니와, 곧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됐다, 됐다!
안현이 속으로 환호했다. 어떻게 이루어지는 원리인지는 모르나, 광산 열차를 사용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제야 신재룡에 생각이 미쳤는지, 안현은 한껏 기뻐하는 와중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이 정도로 가속이 붙었다면 적어도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이제는 신재룡이 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재룡이 형! 이제…!”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뒤를 돌아본 순간.
“…형?”
안현은, 망연히 말을 흘리고 말았다.
광산 열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
그러나 신재룡과 고오환이 보이지 않는다.
열차의 뒤편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는 ‘웃으며 안녕.’ 파트의 마지막 회입니다.
드디어 이 파트를 종결 내는군요. 엉엉….(감동의 눈물이에요.)
PS. 어제 응원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도 열심히 싸워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