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7
00596 웃으며 안녕. =========================================================================
미친 듯이 통로를 달려왔다.
도중에 만난 안현도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오직 계속해서 달려, 마침내 저 멀리서 간신히 신재룡을 발견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쿠르르르르르르릉!
그것은 신재룡을 발견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껏 겨우겨우 버텨오던 천장이 더 이상의 붕괴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확실히 신재룡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신재룡. 거의 동시에 무너지려는 천장.
아마 저 상태로라면 8초 안에 압사당한다. 괜히 멈춘 게 아니다. 지금 여기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8초 안에 목적지에 닿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컵은 엎어졌고 물은 흘러나온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토(土)라는 기운과 어떤 연관도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저만한 규모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냥 흙 암석만 떨어지는 거라면 모를까, 아예 천장 그 자체가 무너지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면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이대로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건가?
정말로 빛처럼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거나, 아니면 시간을 늘릴 수 있는 묘수가 있다면….
5초.
잠깐.
빛, 시간.
…어쩌면.
4초.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었다.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올려 파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냥 한 번 쏘고 끝나는 파동이 아닌, 발출 후 형상이 남아 지속적으로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파동.
3초.
찰나의 순간, 전신의 회로가 가열차게 회전한다. 두 발부터 시작으로 허벅지, 복부, 가슴, 심장, 머리까지 일주한 마력을 소용돌이 형태로 모은다. 모으고 모아 한층 강렬해진 마력을 둥글게 꾹꾹 눌러 담고, 오른팔을 하나의 통로로 삼아 모조리 빅토리아의 영광에 불어넣는다.
2초.
웅웅웅웅!
비로소 빅토리아의 영광이 환한 빛을 밝히며 가열찬 검음을 울어 젖힌다. 그와 동시에 검 끝으로 동그란 구체 하나가 생성된다. 마치 전신의 마력이 빨려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해일처럼 밀고 나가는 기세를 최대한 보존하며, 검 끝의 구체를 힘차게 밀어낸다.
그리고, 그대로 발사.
1초.
콰앙!
그 순간, 나는 0.1초나마 숨이 끊기고, 온몸이 경직되는 반발력을 느껴야만 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충격. 아무리 조절하지 않고 완성하는데 집중했다고 하더라도, 체력 능력치가 100포인트임을 감안하면 절대로 흔한 일이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효과는 확실했다.
0초.
아슬아슬한 직전의 순간, 빛과 어둠이 교차했다.
10초 안에 절대로 닿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거리를, 파동은 하나의 섬광이 되어 삽시간에 가로질러버렸다.
화아아악!
한순간, 통로에 들어찬 어둠이 새하얀 빛으로 반전한다.
눈부실 정도의 어마어마한 빛의 축제였으나,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검 끝부터 통로 끝까지 미끄러지듯이 가른 파동이, 영향권에 들어온 것들을 모조리 꿰뚫고 없애버리는 것을.
그렇게 쭉 이어진 파동은 하나의 막이 되어 주었다. 신재룡을 향해 무너지는 천장을 잠시나마 막아주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성공했다.
신재룡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면, 지금이 바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최후의 기회였다.
웅웅웅웅웅웅웅웅!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듯한 빅토리아의 영광을 부여잡았다.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달리기, 점프, 궁신탄영, 이형환위…. 파동의 영향이 미치는 그 틈을 이용해,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돌진했다.
그 결과, 정확히 11초 만에 신재룡에 닿을 수 있을 정도까지 간격을 줄일 수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내뻗었다.
“사용자 신재룡!”
그리고, 마침내 붙잡았다.
사르르르….
쿠르르릉, 쿠르르릉!
그때였다. 돌연 통로를 가득히 메우던 빛이 약해지며 등골에 짜릿한 감촉이 내려앉았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틈은 없다. 그 즉시 붙잡은 손에 힘을 주는 동시에, 사선으로 한껏 몸을 기울이며 힘껏 땅을 박찼다.
쿵, 쿵, 쿵, 쿵!
한순간 시야에 노이즈가 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무언가 단단한 것들이 몸을 긁듯이 스치고, 또 어떤 것은 정수리를 강타했다. 흡사 들이닥친 해일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기분.
그러나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왼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만을 놓지 않은 채, 나는 발이 닿자마자 역으로 궁신탄영을 사용했고, 몸이 멈출라치면 재차 사용했다. 마치 뛰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그저 무조건 달려온 통로를 되돌아가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우당탕!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발이 꼬임과 동시에 세차게 지면을 구르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리자 비교적 온전해 보이는 천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영향권은 완전히 벗어났다는 소린가?
“헉…. 헉….”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숨도 턱 끝까지 차올라있었다. 하기야 파더와 전투를 치를 때부터 지금껏 몸을 한계까지 가동하고 있었거니와, 간간이 화정도 얹어서 사용했다.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거짓말이리라.
나는 잠시 숨도 돌릴 겸 신재룡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냥 계속 도망치는 게 낫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신재룡이 버텨준다는 가정하에 일어날 수 있는 일.
일단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완전한 구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척 봐도 신재룡의 상태가 숨 넘어가기 일보직전처럼 보였으니까.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역시나 신재룡의 상태는 무척이나 심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십 초 이내 사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마 안현과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아무튼, 괜찮다. 신재룡을 확실히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예전에 그 사건 이후로, 밖으로 나갈 때는 무조건 엘릭서 한 병씩은 꼬박꼬박 챙기고 다니니까.
“……!”
이윽고 아무 생각 없이 품에서 엘릭서를 꺼내려는 찰나, 나는 잠시나마 흠칫하고 말았다. 동작을 멈춘 원인은, 처음 이들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일종의 고민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나 자신답지 않은 위화감이라고나 할까…?
천천히 시선을 내려 신재룡을 응시했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는 얼굴과 잔잔한 미소를 확인한 순간.
“저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위화감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탁!
곧바로 엘릭서를 묶는 줄을 끊고, 마개를 찢었다. 황금과도 같은 액체에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내음이 콧속을 상쾌하게 찔러온다.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신재룡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병을 기울였다. …과연 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역시나 엘릭서라 그런지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차차 안정된 호흡을 보이는 신재룡을 확인한 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통로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안현이 안솔과 만났을 테고, 헬레나가 사제 치료를 받았을 테지. 조금 더 빠르면 아예 도착했을 수도 있고.
그러면 괜찮다. 한소영이 기다려주든 기다려주지 않든, 헬레나가 치료받은 이상 3명의 탈출은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아니,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지체 않고 신재룡을 둘러 업은 후 무너질 듯 말듯한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지면이 무너지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이미 한 번 무너져 구덩이를 형성한 지면이, 재차 무너지며 더욱 넓혀가는 광경을.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공포를 느끼게 한다.
우르르르르르르릉!
흡사 천둥이 울리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 여파로 인해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언덕에 서 있던 사용자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그러한 사용자들 중에서, 오직 한 여인만이 꼿꼿이 선 채 구덩이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한소영이었다.
한소영은 결국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어떻게든 김수현을 기다리려고 했으나, 안현이 도착했을 때가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어느덧 구멍 주변을 감싸고 있는 내벽조차도 조금씩이나마 붕괴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끌려 나온 한소영은, 나오자마자 부상자 후송을 처리한 후 남은 인원의 구조에 직접 힘을 기울였다. 사실상 한소영이 마지막으로 나온 셈이니 남은 인원이래 봤자 김수현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그것조차도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붕괴 현상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바깥쪽 구덩이 지면도 이상 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조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용자들이 거듭하여 철수를 호소했고, 3번이나 참은 한소영은 4번째 호소에 가슴을 억누르며 철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언덕의 장벽까지 철수할 생각이었으나, 구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이상 그곳도 안전 지역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림자 언덕 최전방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이로써 김수현을 구조할 수 있는 길은 모조리 끊겨버린 셈이다.
물론 아직 남은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첫 번째로 김수현이라는 사용자 자체에 기대할 여지가 있다. 파더와 전투할 때 보였던 움직임이라면 자력으로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밧줄보다 그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계속해서 구덩이를 응시하던 한소영이 잠시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한 여인이 한소영과 똑같은 선에서 구덩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온몸에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채로.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안솔.
그랬다. 안솔은 지금 기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덩이에서는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나, 이번에는 사용 대상이 달라졌다. 애당초 김수현 때문에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사용 대상이 김수현으로 확정된 이상, 당연히 안솔의 마음도 바뀔 수밖에 없다.
꽈르르릉, 꽈르르릉!
그 순간, 엄청난 소음과 동시에 구덩이 주변의 대지가 푹 꺼지듯이 가라앉았다. 아직까지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었으나 눈에 확실히 보일 정도로 들어간 것이다.
멀찍이서 보고 있던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얼굴로 안솔과 구덩이를 번갈아 응시했다. 기적의 효능은 익히 알고 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김수현이 나오지 않으니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안솔은 여전히 보고만 있었다.
“안솔, 안솔! 지금 사용해야 하는 거 아냐? 응?”
결국 참지 못한 이유정이 안솔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한껏 집중력을 짜내고 있던 안솔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귀찮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언니. 조용히 하고 있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약간은 차갑게 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그러나 이유정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기적을 준비한다고 해서 억지로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시시각각 무너지는 땅을 보고 있자 더는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 사정을 듣지 못해 모르지만, 김수현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방법만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을 것이다.
이유정이 도로 안솔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응? 빨리…!”
“시끄럽다고 했잖아요!”
돌연히 안솔이 날카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저도 모르게 주춤한 이유정의 머릿속으로 별안간 멍한 기분이 찾아 들었다.
“뭐, 뭐…?”
“누구는…. 누구는 지금 사용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요?”
“…….”
“…아무것도 모르면서!”
꽈르르르르르르릉!
그때였다.
안솔이 거의 울먹이는 투로 말을 끝맺으려는 찰나, 느닷없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사용자들의 귓전을 떠르르 울렸다. 지면의 떨림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안솔과 이유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정말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이라고 생각하던 사용자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일어났다.
쿠르르릉, 쿠르르릉!
구덩이가 무너진다.
말 그대로 일거에 무너지고 있다. 지금껏 어찌어찌 버텨온 것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대지 자체가 아래로 움푹 내려가며, 지면이 깨진 계란 껍질처럼 갈라져 서서히, 그러나 깡그리 허물어진다. 그 엄청난 파괴 현상에 절로 숨이 막히면서도, 이유정은 재차 소리쳤다.
“안솔!”
아니, 비단 이유정뿐만 아니라 다른 클랜원들까지 똑같이 외쳤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상, 안솔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지팡이를 잡은 손이 올라갔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마치 누군가 안솔을 만류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메시지가 출력됐으나,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기…!”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화륵, 화르륵!
별안간 어디선가 홀연히 불타오르는 소리가 나더니, 아직 채 무너지지 않은 지면이 녹아 내렸다.
파앙!
그와 동시에, 지면을 뚫고 나온 누군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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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 끝났어요.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