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20
00619 Night Of Theater. =========================================================================
북부 원정대가 제 3지역 공략을 시작한지도 어느새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우려와 불안 속에서 시작된 공략이었다. 그러나 김유현이 거인을 선두로 내세우는 ‘허수아비 효과’를 구상한 이후, 북부 원정대의 공략은 계속해서 순항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따금 하늘을 배회하는 괴조만 몇 번 발견됐을 뿐이지, 닷새째의 진군도 어제와 크게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면, 현재 거인을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전략이 통하고 있는 걸까? 여느 괴물들이 이 3지역에 터전을 잡은 거인이 두려워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정말로?
아주 영향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것 하나로 100%라고 보기도 어렵다.
현재 북부 원정대의 거리낌 없는 진군이 가능한 것은, 지금 통과 중인 지역과 연관 지어 생각해야만 한다.
김수현은 그랬다. 이르면 6일, 늦어도 8일 안에는 공략 포인트에 도착할 거라고. 이틀의 차이를 둔 것은 진군 도중 괴물과 조우함으로써 지체되는 시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북부 원정대는 첫날 같은 지역에서 이틀 동안 머물렀지만, 이후로는 한 번도 방해 받지 않고 남쪽 방향으로 꾸준히 직진했다.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못해도 2, 3일 안에는 공략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여기서 공략 포인트는 바로 ‘거인들의 터전’을 의미한다는 것. 말인즉, 현재 통과 중인 지역은 허수아비 거인만이 아닌, 제 3지역을 호령하는 모든 거인들의 영향이 미친다는 소리였다.
이게 바로 지금까지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라 볼 수 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괴조가 아니고서야, 어느 괴물이 거인들의 영향이 강한 지역을 버젓이 돌아다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북부 원정대가 공략 포인트에 가까워질수록 순항은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게 보면, 여기까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행운이 공략 끝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건 매우 요원한 일일 것이다.
사용자들도 알고 있다.
강철 산맥에 들어온 이상, 괴물의 출현을 확인한 이상, 또한 놈들이 지성을 갖춘 존재라는걸 확인한 이상.
언젠가는, 아니 근시일 내로 괴물과 부딪쳐야만 함을. 혹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맞닥뜨릴 수 있음을. 바로 제 3지역을 지배하는 최강의 전투 종족인 거인들과.
그래서 사용자들은 긴장을 놓지 않는다. 분명 진군의 순항에 기분이 좋은 건 틀림없으나 해이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는 이 순탄함이 바로 1초 후에도 끝날 수 있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저 현재의 상황에 감사하며 행운이 끝나는 때를 대비해 차곡차곡 준비를 해나갈 뿐.
“정지! 정지 명령입니다! 여기서 진군을 마치겠다고 하십니다!”
“모두 야영을 준비하도록! 그리고….”
그렇게, 닷새째 날이 저물어갔다.
*
해 질 녘, 늦은 오후.
(아 잠시만, 잠시만요!)
(잠시만은 무슨 잠시만. 빨리 가자. 준비 다 끝내놨다니까?)
(실은 제가 아직 준비가….)
(아니 네가 무슨 준비가 필요해?)
야영지 중앙에서 수정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성이 연신 들려온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용자가 보면 이게 지금 무슨 일이냐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음성이 들려오는 곳에서 한 사내와 거인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으니까.
저런 모습을 보면 그동안 상당히 친해진 듯싶으나 정작 다투는 모습도 우습기 그지없다. 거인은 기둥을 꼭 껴안은 채 가기 싫다며 머리를 휘휘 젓고 있고, 사내는 그런 거인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는지 팔을 꽉 붙잡은 채 끙끙 힘을 주고 있었으니까. 뭐, 그런다고 거인이 끌려가겠느냐마는.
헌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진군이 끝나면 기둥에 묶여 있어야 하는 거인이, 왜 갑자기 온몸의 속박이 해제된 상태일까? 그리고 준비는 또 무슨 말이고?
(후유.)
결국에는 끌고 가는걸 포기했는지 김유현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러자 기둥을 꽉 붙잡고 있던 쿠샨이 스리슬쩍 돌아보더니 끔뻑끔뻑 눈을 깜빡였다. 김유현은 티 한 점 보이지 않는 쿠샨의 맑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때 말해준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
대답은 없다. 그러나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기실 두 종(?)이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부탁 때문이었다. 일전에 아버지의 소식을 말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쿠샨은 김유현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김유현은, 다름 아닌 ‘사용자들과 한 번 가볍게 대련해줄 것’을 주문했다.
김유현은 쿠샨이 자신의 부탁을 거리낌없이 수락하리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거인은 전투를 즐기는 종족이 아니던가. 물론 가벼운 대련을 전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볼 수는 있으니까.
그러나 예상을 깨고 쿠샨은 김유현의 부탁에 난색을 보였다.
(마, 말씀 드렸잖아요. 아무리 가벼운 대련이라고 해도…. 저한테는….)
쿠샨이 우물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러는 이유인즉, 바로 아주 오래 전 신들이 거인에게 내렸던 저주와 연관이 있다.
‘너희에게 광기를 부여할 것이며.’
‘너희가 마음에 충실하게 할 것이다.’
처음 쿠샨을 발견했을 때를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쿠샨은 지금처럼 맑은 눈동자나 순박한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붉은 빛을 희번덕이고 피를 뚝뚝 흘리며, 괴조를 야만적으로 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다며?)
(그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서요. 오랫동안 살아오신 분들은 스스로 조절이 가능한데, 저 같은 경우는 조금 애매해서…. 아, 아직 좀 부족하달까요.)
(목숨 걸고 싸우는 전투가 아니라 가벼운 대련이라니까? 이 대련에서 너한테 적대감을 가질 사용자는 없으니, 네가 이성을 잃는 일도 없을 거야.)
(아이 참.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요. 굳이 상대방이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아도, 저 멋대로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해가 안되냐는 듯 갑갑해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김유현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래도 걱정 마. 설령 네가 이성을 잃는다고 해도 우리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니까. 지금 기다리는 인간들, 상당히 강한 편이라고?)
(…별로 강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뭐?)
(엄청 약할 것 같은데….)
쿠샨이 김유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사용자 정보 중 ‘마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쿠샨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인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지만, 선천적으로 마력의 축복을 받지 못한 종족이다. 흐르는 피는 매우 강한 마법 저항 능력을 지녔으나, 반대급부로 마력에 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것은 김유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거 꽤나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우습게 보지 마.)
(무시하는 게 아니라, 해봤자라는 소리에요.)
(무슨 소리! 너희의 힘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 세상은 힘이 다가 아니거든.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헤….)
거인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을 조금 벌렸지만, 여전히 기둥은 놓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어지간해서는 정말 가지 않을 것 같다. 결국 김유현은 방법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진짜 이럴 거야? 우리 약속, 아니 협상했잖아. 이럴 거면 먼저 얘기해주는 게 아니었어.)
(으음. 하지만 꼭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나오시겠다? 흠…. 그러고 보니 쿠샨 토르에 관한 다른 소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 뭐라고요?)
쿠샨이 곧바로 반응했다. 김유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가면 말해줄게.)
(치, 치사해요!)
(그래, 나 치사하다. 그런데 너도 치사하잖아.)
(이익! 이건 다르잖아요!)
할 말이 없는지 쿠샨이 볼멘 소리를 냈다. 그러나 김유현은 머리를 갸웃하고는 어떻게 할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쿠샨의 볼이 빵빵 해졌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별도리가 없는지 쿠샨은 곧 천천히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행동 하나하나에 불만이 잔뜩 배어있다. 그런 쿠샨을 지켜보던 김유현은 돌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왜, 왜 웃어요?)
(그냥, 지금 이 상황이 갑자기 웃기게 느껴졌거든. 우리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하하하.)
(저는 하나도 안 웃긴데요.)
쿠샨이 여전히 볼멘 소리로 투덜거리자 김유현이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 그런데, 너를 보고 있으면 누가 떠오르거든.)
(네?)
(그래. 생각해보니까, 너랑 꼭 닮았네…. 하는 행동이 말이야.)
(……?)
갑작스럽게 음성이 가라앉는다. 그제야 불만을 거둔 쿠샨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쿠샨을 바라보는 김유현의 낯에 아주 잠깐 아련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듯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데요?)
기다리다 못한 쿠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문득 (아차.)한 김유현이 별안 두 눈을 크게 감았다 뜨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궁금해하는 쿠샨을 향해 연한 미소를 보였다.
(이것도 가면 알려줄게.)
(이익!)
*
야영지 외곽, 너른 공터에는 약 30명에 이르는 사용자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 해밀 클랜원과 여타 클랜 로드를 맡고 있는 지휘관급 사용자들이다. 오늘 김유현이 ‘샘플 분석’을 명분으로 주최한 대련에 초청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기다려온 샘플 분석임에도 불구하고 지휘관급 사용자들의 안색은 그리 밝지 못했다. 오히려 떨떠름해 보이는 기색이 그늘지어 있다. 거기다 약간 불안해하는 얼굴로 서로 수군거리기까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공터에 미약한 어수선함이 일었지만, 이내 멀리서 김유현과 쿠샨이 다가오자 소란은 바로 사그라졌다. 물론 속박이 풀린 거인을 보고 놀란 사용자도 더러 있었으나, 크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김유현의 장담이 말뿐이라지만, 그동안 쿠샨이 보여왔던 행동도 있었거니와, 만에 하나를 대비해 곳곳에 사용자들을 포진시켜놨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이윽고 김유현과 쿠샨이 도착했다.
이미 서로 얘기가 돼 있던 만큼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쿠샨이 공터의 중앙에 서자 건너편에서 한 체격 좋은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쿠샨과 첫 대련을 벌일 사용자로서, 비록 거인보다는 작지만 190에 넘는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건장한 사내였다. 다른 사용자들은 그저 담담히 지켜볼 뿐.
(자. 전투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서로 대련일 뿐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인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본격적인 대련에 들어가기 직전 김유현의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문득, 잠깐 김유현을 돌아본 사내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가 크게 심호흡하며 도로 쿠샨을 돌아본다. 그 순간, 등에 맨 창을 뽑아 겨눔과 동시에 은근슬쩍 사내의 태도가 일변했다.
“알겠습니다. 뭐, 제법 튼튼해 보이기는 하는데…. 까짓거 살살하죠. 흐흐!”
(Omnes Rectus. Etiam Eget Est Satis Fortis…. Kkajit Ego Lenis. Heuheu!)
김유현은 아직도 수정구를 활성화한 상태였다. 수정구는 들려오는 모든 말을 강제로 번역한다. 말인즉, 방금 사내의 말 또한 거인에게 고스란히 들렸을 게 뻔하다는 소리였다. 쿠샨의 눈이 가늘어진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상대는 거인 일족 중에서 가장 어리다고 한다. 감안하고, 너무 과하게는 하지 말도록.)
심지어 김유현까지.
(이런. 그럼 상대가 안 맞는 거 아닙니까? 저를 상대하려면, 일족 최고의 용사 정도는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말고.)
사내가 또 한 번 거드름을 피우며 큰 목소리로 웃어 젖혔다.
자꾸만 쿠샨의 신경을 긁는 소리들이 하나하나 번역되어 들려온다. 수천 년 동안 강철 산맥 제 3지역을 지배해온 자부심 높은 종족으로서, 저 말이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한순간 발끈할 뻔 했지만, 쿠샨은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최소한 ‘전투’에 관해서는 거인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입 한 번 열 시간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거인이라는 종족이다.
(그럼….)
그리고 잠시 후.
(시작.)
김유현의 말을 기점으로, 대련을 빙자한 연희(演戱)의 막이 올랐다.
============================ 작품 후기 ============================
조금 더 적을까 하다가, 그러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 끊고 올렸습니다. 하하.
음, 이건 여담인데요.
독자 님들. 거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본격적인 등장은 다음 회부터지만, 쿠샨이라는 거인을 독자 분들이 어떻게 보셨을까요? 저는 이게 궁금해요.
김수현이 예전에 이랬잖아요. 천성이든 전투든, 거인은 가능하면 동료로 삼고 싶은 놈들이라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