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16
00715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예상대로였다. 회의가 끝난 이후,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클랜원이 집무실로 쳐들어왔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터라,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적은데?’
그래도 최소한 절반을 몰려올 줄 알았는데 겨우 예닐곱 명이라. 무엇보다 이유정이 없다는 게 가장 놀랍다.
탕!
“클랜 로드! 등급이 왜 이따위입니까?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신 겁니까?”
이윽고 선두로 달려온 김동석이 책상을 내리치듯이 짚으며 다짜고짜 외쳤다. 상당히 전투적인 태도였다. 들어올 때도 화끈하게 들어오더니 말하는 것도 화끈하다.
“음. 클랜원 등급제가 싫으신 겁니까? 아니면 본인의 등급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둘 다 아닙니다!”
김동석은 약간 의외의 말을 하면서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사실 후자이기는 해요. 그런데요. 제가 D 등급이기는 해도, 등급을 공~정하게 구분하셨다면 납득했을 겁니다.”
김동석은 공정하게 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나는 잔잔히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그러면 등급 구분이 공정하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왜요?”
“아니. 정말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EX 등급만 봐도 납득이 안 갑니다. 납득이!”
“EX 등급이라면…. 제 등급에 불만이?”
“아 클랜 로드. 저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어느 누가, 감히 클랜 로드의 등급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거고요. 클랜 로드 말고 EX 등급이 한 명 더 있지 않습니까! 안솔이 EX 등급이요? 허! 안솔이 EX 등급인데 제가 D 등급입니까?”
김동석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침까지 튀겨가면서 말했다.
“물론 안솔이 능력 좋은 사제라는 건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EX 등급은 너무한 것 같습니다. 그냥 탁 까놓고 말해서, 확실치도 않은 예감과 기적만 빼면, 남는 거라도 있습니까? 그런데도 EX 등급이라고요?”
“흠….”
“특정한 클랜원을 편애해서 누구는 등급을 후하게 주신 거라면, 또 누구는 짜게 주셨다면!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 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나는 말을 끊으며 진정하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옆에 있는 박다솜이 적당히 하라는 듯 검지로 살그머니 찌르는 게 보였지만, 어쨌든 들어온 모두가 김동석의 의견에 공감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튼 안솔이 문젯거리가 될 것은 예상했고, 대충 생각하던 말도 나왔다. 그렇지마는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상 안솔의 능력은 정말로, 정말로 엄청난 수준인데, 어린이 같은 행동으로 평가가 절하되는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안솔의 성격이 정하연과 비슷했다면 과연 반응이 이랬을까.
일말의 아쉬움을 삼키면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명에 앞서 우선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EX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씩씩 숨을 몰아 쉬던 김동석이 끔뻑끔뻑 눈을 움직였다. 보아하니 모르는 것 같다.
“EX. ExtraOrdinary. 사용자 정보의 능력 랭크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놀라운, 엄청난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죠. 그러나 등급제에서는 다릅니다. 일반적인 현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인 동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요.”
말하면서 화정의 힘을 일으키자, 화르륵 불타오르는 소리에 이어 왼손이 맑은 불꽃에 삼켜졌다.
“…그러면 그런 힘을 가진 사용자만이 EX 등급에 오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만히 응시하던 김동성이 멍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층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이제는 숫제 어이가 없다는 어조였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사용자가 유리한 건 맞습니다. 허나 힘만 가졌다 해서 무조건 오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발표한 등급은 사용자 정보를 기준으로 잡되, 여태껏 여러분이 클랜 발전에 이바지한 공헌도도 포함했다고요.”
“아니. 그러니까요….”
“그래도 이해를 못 하시겠으면 예를 들어드리죠. 2년 전의 전쟁에서 모든 아군을 회복시키고 전세 역전에 크게 기여한 사제가 누굽니까?”
“그, 그건.”
조금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까. 시종일관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동석이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말이라도 하고 싶은지 열심히 생각하는 모습이었으나 과연 할 말이 있을까?
“용이 잠든 산맥에서 본 드래곤과 수천의 영혼에 둘러싸였을 때, 주문 하나로 그들을 정화하고 맹세의 검까지 얻어낸 사용자가 누구죠? 근래 지옥 대공이 출현했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 엄청난 일격을 한 번이나마 빗겨내고, 여러분을 살려내고, 돌려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용자가 누구냐 이 말입니다. …바로 안솔입니다.”
“…….”
“그럼 사용자 김동석은, 제가 방금 열거한 일을 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
아니. 당연히 할 수 없다. 비단 김동석뿐만이 아니라 머셔너리의 누구도 안솔을 대신할 수 없다.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사실이다.
어느새 김동석은 입을 헤 벌린 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래. 그럴 테지. 차라리 S 등급 사용자라면 몰라도 김동석은 이렇게 나설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저…. 클랜 로드….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그 순간 조용히 서 있던 박다솜이 살그머니 손을 들었다.
“확실히 솔이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아시잖아요. 너무 어린애 같다는 거. 예전처럼 클랜 로드가 없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럼 그때 우리가 안솔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건가요?”
음. 이건 그나마 건설적인 질문이로군.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물론 등급이 높을수록 여러 사안에 보다 강한 영향은 미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권한은 혜택과 대우가 중점이지 명령 체계의 완전한 장악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회의에서도 말씀 드렸듯, 머셔너리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변화할 예정입니다. 그 변화에는 새로운 명령 체계의 정립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하나 조곤조곤 설명해주자 박다솜은 작은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쯤이면 대충 알아들었으려나.
이윽고 양손을 깍지 낀 후,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더 질문 있으신 분?”
*
아틀란타 남쪽 외 도시.
중앙 성의 7층 숙소.
“으음….”
창문을 뚫고 들어온 따뜻한 아침 햇살이 얼굴을 두드리자 안현은 작은 침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똑똑.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으나 안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여운을 좀 더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철 산맥 공략 당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숙할 때와 비교하면, 현재 몸을 받치는 푹신한 침대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똑똑. 똑똑.
“이러면 안 되지.”
돌연 혼잣말을 중얼거린 안현이 끙 몸을 일으켰다. 눈에는 아직 졸음이 가득했으나 히죽히죽 웃고 있다.
실제로 안현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아니. 오늘만이 아니라, 클랜원 등급제가 시행된 이후, 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기껏해야 C, D 등급을 받을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B 등급을 받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흡사 4등급인 줄 알았던 과목을 2등급을 받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B 등급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런 안현의 마음에는 믿어주신 만큼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무감 비슷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곧장 침대에서 나와 창문을 활짝 열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며 힘껏 기지개를 켜는 찰나였다.
달칵.
“…어머. 일어나 계셨어요?”
“…….”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 안현의 동작이 갑자기 정지했다.
삐걱삐걱 머리를 돌린 안현은 곧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 복장치고는 상당히 우아하게 차려 입은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밤의 꽃으로 일하던 여인으로 고연주의 소개 이후 머셔너리 클랜의 비 전투 사용자로 들어온 여인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 안현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사실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
“네. 저는 박해연이라고 합니다. 머셔너리 클랜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어요.”
“…아니. 왜?”
“아. 오늘부터 제가 사용자 안현 님의 전속 하녀를 맡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릴게요?”
자신을 박해연이라 밝힌 여인은, 차분히 웃으면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안현은 비명을 질렀다. 전속 하녀이고 뭐고, 속옷 한 장만 달랑 걸친 알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소 옷을 홀랑 벗고 자던 버릇으로 일어난 사달이었다.
하녀는 한동안 허리를 굽힌 채 땅만 바라보았다. 악악 비명만 지르던 안현은 그런 하녀를 간신히 바라보고는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었다.
너무 오랫동안 허리를 굽히고 있어서일까. 이내 몸을 젖힌 하녀가 “끙.” 신음을 내며 허리를 두드리고는, 안현을 보며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마치 귀여운 남동생을 보듯이.
“그럼 제게 잠시 설명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밤의 꽃 출신이라서 그런지 묘하게 야하게 느껴지는 눈짓에, 안현은 떠름히 머리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하녀의 설명을 들은 안현은 비로소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전투 사용자처럼 새로이 개편된 비 전투 사용자의 체계부터 시작해, 오늘부터 B 등급 이상의 클랜원에게는 수행 인원 역할을 해주는 전속 하녀가 한 명씩 붙는다는 것과, 일주일 후 더 나은 생활 공간과 개인 연구실이 포함된 6층의 B 등급 전용 숙소로 이동해야 하는 것까지.
마지막으로 오늘 점심 즈음 집무실로 찾아오라는 김수현의 전언을 전한 하녀는 품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오늘은 인사차 찾아뵀고,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호출석과 통신용 구슬을 두고 갈게요.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침대에 구슬 두 개를 얌전히 놓은 후, 하녀는 양손으로 치마를 집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이내 문이 조심스레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현은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찌어찌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허나 그러한 와중에도 안현은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황당하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것은 어색하면서도 신선한 일종의 체감이었다. 사실 클랜원 등급제가 시행된 이후 며칠 동안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하나씩 서서히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호기심도 일었다. B 등급이 이 정도 대우를 받는데, 과연 A 등급은 어떤 대우를 받을까? S 등급은? EX 등급은?
‘아무튼…. 대접받으니까 기분은 좋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점심이랬나? 늦지 않게 가야겠다.’
이윽고 가벼운 세안을 마친 안현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발걸음도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 작품 후기 ============================
네. 맞습니다. 이 파트는 특정 캐릭터를 죽이려는 파트가 아니라, 오히려 살리려는 파트입니다. 물론 되살아나는 데는 그만한 고난이 필요하겠지만요.
물론 김수현은 언제나 이 메모라이즈의 왕관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왕관을 구성하는 보석도 아름답게 반짝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